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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0:06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colbgcolor=#F0F4C3><colcolor=#000000>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Luise zu Mecklenburg-Strelitz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ouise_of_Mecklenburg-Strelitz.png
이름 루이제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아말리
(Luise Auguste Wilhelmine Amalie)
출생 1776년 3월 10일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선제후국 하노버
사망 1810년 7월 19일 (향년 34세)
프로이센 왕국 호엔치리츠 성
배우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793년 결혼)
자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샤를로테, 프레데리케, 카를, 알렉산드리네, 페르디난트, 루이제, 알브레히트
아버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어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형제 샤를로테 게오르기네,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게오르크 카를, 테레즈, 프리드리히 게오르크, 프리데리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카를, 아우구스테 알베르티네, 카를
1. 개요2. 생애3. 평가와 인기4. 어록5. 가족관계
5.1. 조상5.2. 자녀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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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의 넷째 딸로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왕비.

2. 생애

1776년 3월 10일 하노버에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와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1]의 여섯째 아이이자 넷째 딸로 태어났다.

파일:루이제 왕비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부부.jpg
179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결혼해 9명의[2]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루이제 왕비는 당차고 엄청난 미녀로 유명해서 프로이센 왕국의 백성들과 신하들 사이에서 남편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미모뿐만 아니라 키도 160대 후반의 장신이기까지 해서 168cm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과 비슷했다. 아름답고 친절한데다 남편을 훌륭하게 내조한 루이제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여성상이었다.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문란하고 가정에서 개막장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가정적이고 부부 사이도 좋아서 루이제는 당대 왕비들 중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남편이 즉위한 후, 루이제는 원로 장관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많은 국정 사안을 루이제와 논의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아버지의 외교 정책에 따라 프랑스 제1공화국과의 분쟁 초기에 중립을 선호했다. 루이제는 이 견해를 지지하며, 만약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의 연합국 편을 든다면, 군사적 지원을 위해 후자의 힘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프로이센이 강대국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약했기 때문에, 그러한 동맹의 결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프랑스의 침략은 왕이 결국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그는 프랑스와 연합국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루이즈 왕비와 그의 장관들의 많은 다른 의견들을 상담했고, 결국 최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파일:1807년 나폴레옹과 루이제 왕비.jpg
이런 루이제 왕비의 명성 때문에 웃지못할 일화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탈탈 털린 뒤 평화협상으로 영토의 절반 이상과 과중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매력넘치는 유능한 루이제 왕비를 협상단 대표로 보냈다. 나폴레옹도 루이제의 우아함과 결단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요구사항은 칼같이 관철시켜서 별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보호하려는 루이제 왕비의 노력은 많은 찬사를 받았다.

파일:루이제 왕비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자녀들.jpg
나폴레옹 전쟁 도중에도 프로이센의 왕비로서 국가를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활동했고, 힘들어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했다.

파일:루이제 왕비 사망 당시 모습 석관.jpg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 동프로이센메멜까지 피신하는 등,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고생한 여파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거기다 첫째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부터 막내 알브레히트까지 무려 9차례나 출산을 한 데다 사망 시점에서 알브레히트를 낳은 지 불과 10개월밖에 안 되었으니 잦은 출산이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다. 부검 결과 폐 중 하나가 파괴되었고 심장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1814년 8월 3일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죽은 아내의 이름을 따서 '루이제 훈장'을 제정했다.훈장의 모습 루이제 훈장은 1918년까지 독일 최고의 여성 훈장이었다. 1920년대에 보수적인 독일 여성들이 퀸 루이제 리그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부터 딱 60년 뒤 프로이센 왕국프랑스 제국 사이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여기서 차남 빌헬름 1세가 다스리는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여 보나파르트 왕조프랑스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제대로 복수해줬다. 빌헬름 1세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어머니의 석관 옆에 무릎을 꿇으며 결의를 다졌고,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고 이듬해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1871년 3월 17일에 빌헬름 1세는 다시 베를린에 있는 어머니의 묘를 찾았다.

3. 평가와 인기

나의 아름다운 적.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은 최고의 장관을 잃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제 왕비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추모하며.
루이제 왕비는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현대 독일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미덕의 영혼이자 프로이센 민족주의의 의인화로까지 평가받을 정도로 근대의 인물임에도 신화적 여성으로 평가받았다.

루이제 왕비는 역사, 언어 및 종교뿐만 아니라 수학과 지리에서도 학습, 읽기 및 교화 자료로 거의 모든 곳에서 언급되었다. 애국적인 기념식은 루이제 왕비와의 유대감을 롤모델로 삼아 더욱 깊어졌다.

점차적으로 루이제 왕비의 숭배의 모성적 측면은 프로이센 왕국의 발전과 독일 제국의 건국 과정에서 그녀의 아들들이 한 역할에 상응하여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이러한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 이후 루이제의 생애와 업적은 없어서는 안 될 제국의 건국신화로 체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제정이 폐지되고 들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인기는 많았지만 국가에서 숭배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래도 독일 국민당과 왕비 루이제 연맹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정치단체에서 역할 모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 시대에는 딱히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의 모성애적 이미지보다 남성의 강인함을 더 강조한 나치의 이데올로기적 개념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여전히 존경받기는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또다시 독일이 패한 이후 1947년 연합국은 프로이센을 완전히 해체했다. 이후 현대 독일에서는 프로이센에 대해 부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루이제 왕비는 긍정적으로 평가가 유지되고 있으며 독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왕비 중 하나다.

4. 어록

그이는 모든 점에서 날 기쁘게 해주고, 나 역시 그를 기쁘게 하죠. 우리는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Luise of Mecklenburg-Strelitz)
<colbgcolor=#fff3e4,#331c00>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trelitz)
<colbgcolor=#ffffe4,#323300>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Adolphus Frederick II, Duke of Mecklenburg-Strelitz)
슈바르츠부르크존더하우젠의 크리스티아네 아말리 공녀
(Princess Christiane Emili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1세
(Ernest Frederick I, Duke of Saxe-Hildburghausen)
에르바흐에르바흐의 조피아 알베르티네 여백작
(Countess Sophia Albertine of Erbach-Erbach)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Princess Friederik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크 빌헬름 공자
(Prince George William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8세
(Louis VIII,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하나우 리히텐베르크의 샤를로테 여백작
(Countess Charlotte of Hanau-Lichtenberg)
라이닝겐닥스부르크팔켄부르크의
마리아 루이제 알베르티네 여백작
(Countess Maria Louise Albertine of
Leiningen-Dagsburg-Falkenburg)
라이닝겐닥스부르크팔켄부르크의
크리스티안 카를 라인하르트 백작
(Count Christian Karl Reinhard of
Leiningen-Dagsburg-Falkenburg)
졸름스뢰델하임의 카타리나 폴릭세나
(Katharina Polyxena of Solms-Rödelheim)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Friedrich Wilhelm IV)
1795년 10월 15일 1861년 1월 2일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3]
2남 빌헬름 1세
(Wilhelm I)
1797년 3월 22일 1888년 3월 9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4]
슬하 1남 1녀[5]
1녀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Alexandra Feodorovna, Empress of Russia)
1798년 7월 13일 1860년 11월 1일 니콜라이 1세
슬하 4남 4녀[6]
2녀 프리데리케 공주
(Princess Frederica)
1799년 10월 14일 1800년 3월 30일
3남 카를 왕자
(Prince Charles)
1801년 6월 29일 1883년 1월 21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마리[7]
슬하 1남 2녀[8]
3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비 알렉산드리네
(Alexandrine, Grand Duchess of Mecklenburg-Schwerin)
1803년 2월 23일 1892년 4월 21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9]
슬하 2남 4녀[10]
4남 페르디난트 왕자
(Prince Ferdinand)
1804년 12월 13일 1806년 4월 1일
4녀 네덜란드의 프리디리크 왕자비 루이세
(Louise, Princess Frederick of the Netherlands)
1808년 2월 1일 1870년 12월 6일 네덜란드의 프리디리크 왕자
슬하 2남 2녀[11]
5남 알브레히트 왕자
(Prince Albert)
1809년 10월 4일 1872년 10월 14일 네덜란드의 마리아너[12]
슬하 1남 3녀
로잘리 폰 라우흐[13]
슬하 2남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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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1세의 친 사촌이다.[2] 사산된 아이까지 합치면 10명(5남 5녀)이다.[3]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3녀.[4] 파벨 1세의 외손녀(3녀 마리야 파블로브나의 차녀)다. 사위 니콜라이 1세의 외조카(마리야가 니콜라이의 누나)이기도 하다.[5] 프리드리히 3세, 바덴의 대공비 루이제[6] 알렉산드르 2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비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7] 위에서 나온 빌헬름 1세의 아내 아우구스타의 언니다. 즉, 겹사돈.[8]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 등.[9] 파벨 1세의 외손자(차녀 옐레나 파블로브나의 아들)다.[10]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등.[11]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루이제 등.[12] 1849년 이혼[13] 귀천상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