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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7:39:19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colbgcolor=#E1D4D4><colcolor=#000000> 러시아의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Великий князь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оссии
파일:Grand_Duke_Nikolas_Nikolaievich_of_Russia.jpg
이름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출생 1831년 8월 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사망 1891년 4월 25일 (향년 59세)
러시아 제국 크림반도 알룹카
배우자 올덴부르크의 알렉산드라 여공작 (1856년 결혼)
자녀 니콜라이, 표트르, 올가(사생아), 블라디미르(사생아), 예카테리나(사생아), 니콜라이(사생아), 갈리나(사생아)
아버지 니콜라이 1세
어머니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형제 알렉산드르 2세, 마리야, 올가,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미하일
종교 러시아 정교회
파일:Nikolai_Nikolaevich_the_Elder_by_N.Shilder_(1870s,_Museum_of_Artillery_etc).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군인 시절2.2. 결혼 생활2.3. 말년과 사망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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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황족이자 군인. 니콜라이 1세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4남 4녀 중 3남이다.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네 아들들에게 자신과 형제들의 이름을 물려줬다. 이에 장남인 알렉산드르 2세는 첫째 큰아버지인 알렉산드르 1세, 차남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둘째 큰아버지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삼남인 니콜라이 본인은 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 막내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작은아버지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동갑내기 고종사촌이다.

2. 생애

2.1. 군인 시절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해서 군인으로 활동했다. 썩그리 좋은 지휘관은 아니었다.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육군 원수, 기병대 감찰관, 러시아 공병대 감찰관의 계급을 받았으며, 국무원에서도 활동했었다.

2.2. 결혼 생활

올덴부르크 공가의 알렉산드라 공녀[1]와 결혼해서 2남을 두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안좋았다. 발레리나 출신 또? 정부 예카테리나 치슬로바와의 사이에서 5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큰 형 알렉산드르 2세는 동생의 불륜에 대해서 그냥 눈감아줬지만 신중하라고 조언했다.

2.3. 말년과 사망

니콜라이 대공은 큰 형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할때 두 아들과 함께 칸에 있었고, 1881년 3월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조카 알렉산드르 3세가 러시아 황제가 오르면서 니콜라이 대공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숙부인 니콜라이 대공을 좋게 보지 않았고 그의 영향력을 서서히 박탈시켰다. 니콜라이 대공의 권위는 그가 사기적인 군사 징발에 연루되었을때 더욱 손상되었다. 급기야 니콜라이 대공은 1880년 파리 누벨 가극단에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했을 때, 무분별하게 정부 관리와 군 사령관을 공격했고 결국 직위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알렉산드르 3세는 숙부의 혼외정사도 비판했다.[2]

니콜라이 대공은 정부 예카테리나 치슬로바와 살고있었다. 아내 알렉산드라 대공비는 1881년 니콜라이를 영원히 떠나 키예프로 갔지만 남편이 원하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혼을 할 수 없는 와중에 정부 예카테리타 치슬로바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예카테리나가 죽은 이후 니콜라이는 미쳐버렸고 뇌로 퍼진 구강암에 걸렸다. 망상에 시달리는 그는 모든 여성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한 발레 공연에서 대공은 젊은 남성 무용수를 여성으로 착각하여 공격하기도 했다. 1890년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미쳤다고 발표되어 크리미아의 실내에 감금되었고 이후 알룹카에서 사망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Nicholas Nikolaevich of Russia)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파벨 1세
(Paul I)
표트르 3세
(Peter III)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도로테아[3]
(Margravine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eußen)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ederick William II)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Landgravine Frederika Louisa of Hesse-Darmstadt)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trelitz)
헤센다름슈다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Hesse-Darmstadt)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Nicholas Nikolaevich)
1856년 11월 18일 1929년 1월 5일 몬테네그로의 아나스타샤 공주[4]
2남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Peter Nikolaevich)
1864년 1월 22일 1931년 6월 17일 몬테네그로의 밀리카 공주[5]
슬하 1남 3녀

4. 여담



[1] 넷째 고모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손녀이다. 즉, 오촌 조카.[2] 알렉산드르 3세는 혼외정사를 싫어했던 황제이기도 하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정부였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대놓고 사생아까지 낳으며 불륜을 저질러서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를 맘고생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의 불륜으로 맘고생하던 마리야 황후는 병사했고 알렉산드르 2세도 폭탄테러로 암살되자 알렉산드르 3세는 기다렸단 듯이 눈엣가시였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그녀의 사생아들까지 모조리 타국으로 추방시켰고 자신은 바람따윈 피지 않고 정실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만 바라보고 살았다.[3]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외손녀다.[4] 니콜라 1세의 3녀다.[5] 니콜라 1세의 차녀다.[6] 외손자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크리스티안 10세의 처남이였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10세의 고종사촌 알렉산드라 공주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