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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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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0년 8월 3일 | ||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 |||
사망 | 1840년 6월 7일 (향년 69세) | ||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
재위기간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
1797년 11월 16일 ~ 1806년 8월 6일 (8년 8개월 3주, 3,184일) | |||
프로이센 국왕 | |||
1797년 11월 16일 ~ 1840년 6월 7일 (42년 6개월 3주 1일, 15,543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어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 |
배우자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1793년 결혼 / 1810년 사망) | ||
아우구스테 폰 하라흐 (1824년 결혼) | |||
자녀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샤를로테, 프리데리케, 카를, 알렉산드린, 페르디난트, 루이즈, 알브레히트 | ||
형제자매 |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루트비히 카를, 빌헬미네, 아우구스타, 하인리히, 빌헬름 | ||
가문 | 호엔촐레른 가문 | ||
종교 | 칼뱅파 → 프로이센 교회 연합[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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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제5대 국왕이자 마지막 브란덴부르크 선제후.[2]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 알브레히트 왕자의 아버지이자 니콜라이 1세의 장인이며, 프리드리히 3세, 바덴의 대공비 루이제, 알렉산드르 2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비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스웨덴의 로비사 왕비의 할아버지다.
하필 나폴레옹이랑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신명나게 털렸으며, 바로 옆동네의 근성가이 프란츠 2세와 달리 재평가할 여지도 없이 무능하고 우유부단했다.
2. 생애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가정적으로 개막장이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전혀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 이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아내와 평생 금슬이 좋았고 자녀들에게도 가정적인 아버지였다.프로이센은 1795년 프랑스 제1공화국과 바젤 조약을 체결하여 마인강 이북의 독일 지역 영향권을 인정받고 하노버 선제후국을 점령한 상태였다. 즉위 후에도 프랑스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도 중립을 지켰으나, 나폴레옹이 라인 동맹을 결성한 후 하노버를 영국에 반환한다는 썰이 돌면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1807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왕국군이 시원하게 박살나자 동프로이센 끝자락에 있던 틸지트(Tilsit)[3]까지 도망갔다. 여기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중재로 나폴레옹에게 굴복하며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폴란드 원정 참고.
결국 내각이 들어서고 전쟁 배상금 문제로 나폴레옹이 등용을 승인한 프로이센 초대 총리인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가 재상이 되어 실권을 갖게 된다. 나폴레옹 황제는 "한심한 국왕, 한심한 군대, 한심한 나라"라며 코앞에서 대놓고 그를 조롱했지만 패망한 처지라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에게 개털린 이후 러시아 원정 전까지는 블뤼허 등의 애국파 및 개혁파 세력은 프랑스의 압력에 일시적으로 내쳤으며 러시아 원정 때는 출정 전야식에서 독일 내 군주들을 대표하여 나폴레옹의 무운을 빌며 건배 선창을 외치는 역할을 맡았다.
반프랑스 동맹을 지지하는 신하들의 주장을 무시하다가[4] 결국 하르덴베르크가 러시아와 칼리시 동맹을 체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여 프로이센은 반프랑스 동맹에 재참가했다. 클라우제비츠를 비롯한 친내각파 군인을 앞세워 왕의 말을 거역하고 나폴레옹과 전투를 벌였고, 이후 러시아 원정을 하고 온 나폴레옹을 역관광시켰다. 전쟁 후 본인이 직접 빈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역시 재상인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가 사실상 모든 실무를 대표했다.
인재를 등용하는데는 편파적이지 않아서, 매우 호전적이고 교양이 없어서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에는 중용을 받지못한 블뤼허가 나폴레옹과의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다. 미하일 쿠투조프가 개고생할 동안 훼방만 열심히 놓은 알렉산드르 1세보다는 나은 정도. 또한 귀족이 아닌 샤른호르스트를 초빙하고, 육군 개혁안을 제출하며 그가 요구한 귀족 신분과 참모총장 직위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요구에도 그걸 받아들였다. 또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에 동행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탈영을 감행 후 러시아로 종군하였으나, 러시아 측 대표로 자국에 협상하러 온 그를 사면하고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삼았다. 블뤼허,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등도 재기용했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꽤나 융통성 있고 유능한 인재들에게 관용을 베푼 편이었으니 본인이 무능하다고 해서 폄하할 만한 군주는 아니다. 결국 이렇게 중용한 인재들이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이후 발전 없이 안주하던 프로이센의 군제를 개편하고 나폴레옹에게 최후를 안겨주는데 일조한 셈.
그 외에 슈타인 남작의 개혁과 베를린 대학교 설립, 샤른호르스트의 군제 개혁 등으로 국운이 다시 일어섰으며 후에 관세동맹을 성공시키고, 이는 훗날 독일 제국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무능은 어쩔 수 없었는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25년 동안 신하들이 열심히 뛰어다녔지 본인이 주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가만히 있었더라면 개혁군주가 될 뻔했지만, 개혁의 주체들이 혁명 사상에 영향 받아 자코뱅주의로 변질될까봐 극히 두려워했고 신하들을 불신했다. 자신의 멘토 알렉산드르 1세가 자유주의 성향이었다가 말년에 전제정치로 복귀한 것과 똑같이 말년에는 반동으로 돌아서 관료들이 열심히 한 개혁조차 모두 말아먹었다.
3. 여담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밀덕이다. 나폴레옹에 쳐발리고 항복한 다음 프랑스과 프로이센 고위층끼리 식사를 하다가 나폴레옹 황제의 옆자리에 앉았는데 대화 중에 군대 장비 얘기가 나왔다. 군국주의 국가의 군주답게 군용장비 스펙에 대해 좔좔 설명을 하면서 나폴레옹보다 더한 지식을 뽐내서 나폴레옹이 깜놀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사학이나 전술에 대한 지식은 커녕 지휘 자체를 해본 적이 평생 없었다.[5]
- 군주 본인이 무능한데다가 당대 대륙의 패권국에게 무참히 털려서 항복하고 황제에게 능욕당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인조와 비슷한 점이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비록 대불동맹과 함께였지만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면서 복수에 성공했으나, 인조는 주변 동맹국들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청나라에게 복수는 하지도 못했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유능한 관료들이라도 있었지만 인조는 그마저도 없었다.
- 과거 폴란드에도 보헤미아 왕국(체코)의 성 바츨라프 왕관, 헝가리 왕국의 성 이슈트반 왕관과 같은 폴란드 국권의 상징인 볼레스와프 왕관(korona Chrobrego)과 레갈리아가 있었으나, 1800년 이것들을 베를린으로 옮긴 뒤 1809년에는 모두 녹여 없애버린 장본인이다.
4. 가족관계
아내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Friedrich Wilhelm IV) | 1795년 10월 15일 | 1861년 1월 2일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6] |
2남 | 빌헬름 1세 (Wilhelm I) |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7] 슬하 1남 1녀[8] |
1녀 |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Alexandra Feodorovna, Empress of Russia) | 1798년 7월 13일 | 1860년 11월 1일 | 니콜라이 1세 슬하 4남 4녀[9] |
2녀 | 프리데리케 공주 (Princess Frederica) | 1799년 10월 14일 | 1800년 3월 30일 | |
3남 | 카를 왕자 (Prince Charles) | 1801년 6월 29일 | 1883년 1월 21일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마리[10] 슬하 1남 2녀[11] |
3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비 알렉산드리네 (Alexandrine, Grand Duchess of Mecklenburg-Schwerin) | 1803년 2월 23일 | 1892년 4월 21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12] 슬하 2남 4녀[13] |
4남 | 페르디난트 왕자 (Prince Ferdinand) | 1804년 12월 13일 | 1806년 4월 1일 | |
4녀 | 네덜란드의 프리디리크 왕자비 루이제 (Louise, Princess Frederick of the Netherlands) | 1808년 2월 1일 | 1870년 12월 6일 | 네덜란드의 프리디리크 왕자 슬하 2남 2녀[14] |
5남 | 알브레히트 왕자 (Prince Albert) | 1809년 10월 4일 | 1872년 10월 14일 | 슬하 1남 3녀 |
로잘리 폰 라우흐[16] 슬하 2남 |
[1]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법령에서 나온 종교로, 개신교의 일종이다. 개혁교회(칼뱅파)와 루터교회의 연합 체제이며, 2003년까지 연합 복음주의 교회로 독립적인 형태를 유지하다가 해산하며 EKD 소속 지역 개신교 연합 조직인 독일 개신교회 개신교 연합(Union of Protestant Churches in the Protestant Church in Germany)에 합류했다.[2]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후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작위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Markgraf von Brandenburg)을 칭했다.[3] 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소베츠크(Советск).[4] 이는 당시 프로이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프랑스군이 건재하고 프로이센군은 궤멸당했는데 애국을 부르짖으며 러시아의 손을 잡고 싸웠다면 프로이센은 사르데냐 왕국의 피에몬테처럼 일개 데파르트망이 되었을 것이다.[5] 마틴 판 크레펠트 <전쟁 본능>에서.[6]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3녀.[7] 파벨 1세의 외손녀(3녀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차녀)다. 사위 니콜라이 1세의 외조카(마리야가 니콜라이의 누나)이기도 하다.[8] 프리드리히 3세, 바덴의 대공비 루이제[9] 알렉산드르 2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비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10] 위에서 나온 빌헬름 1세의 아내 아우구스타의 언니다. 즉, 겹사돈.[11] 프리드리히 카를 등[12] 파벨 1세의 외손자(차녀 옐레나 파블로브나의 아들)다.[13]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등[14]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루이세 등.[15] 1849년 이혼[16] 귀천상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