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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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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필리프 고틀리프 폰 클라우제비츠
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1780년 6월 1일 ~ 1831년 11월 16일 (향년 51세)

1. 개요2. 생애3. 그 외4. 관련 문서

1. 개요

프로이센 왕국군인이자 군사학자. 《전쟁론》의 저자[1]이며 나폴레옹 시대의 탁월한 전략가 중 한 명이자 서양 최초의 군사 사상가이자 철학자라 불리는 인물.

2. 생애

프로이센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조부와 증조부 모두 목사였고, 할아버지 역시 목사였으며 유명한 신학 교수였다고 한다. 삼촌들 중에 한 명도 목사였다고 한다. 훗날《전쟁론》집필 때 철학적 사유와 서술 방식엔 신학 교수였던 할아버지의 학문적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목사 집안이었지만 클라우제비츠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하급장교 중위를 지냈는데 전쟁이 끝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명에 따라 군대에서 쫓겨난다.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은 부르주아들을 경멸해서 장교단에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전쟁 시엔 귀족수가 크게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가 전쟁이 끝나자 귀족 출신이 아닌 자들을 모두 쫓아낸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전역 하고 나서도 장교 출신임을 들어 von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고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신분상승 욕구와 군복무를 갈망했고 그의 형제 중 3명이 같이 입대 했다.

당시 12세에 참전하여[2] 15세에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며,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에게 군사학을 배웠다. 그의 능력이 출중하여, 프로이센 왕실의 아우구스트 왕자 직속 부관이 되어 왕자에게 전쟁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 훗날 아우구스트 왕자와의 연줄 덕으로 국왕이 되는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둘째 왕자 빌헬름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았던 시기가 프랑스 혁명 시기인지라, 인생의 상당부분을 나폴레옹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후위대를 맡아 나폴레옹군을 저지하다가 사로잡혀, 파리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귀국하여 샤른호르스트를 도와 군 개혁에 몸담았으나 1812년 패전한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요구에 의해 동맹을 맺고[3] 러시아 원정에 꼬붕으로 끌려가 참전하자 탈영을 감행, 프로이센 출신 탈영병 2만 명을 모아 러시아군에 종군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군대와 대적하여 이긴 세력이 없으니, 나폴레옹의 군대보단 나폴레옹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상대해야 한다."게릴라전이나 물자 보급을 약화시키는 지연전을 주장하고, 이것이 먹혀들어 1812년 보로디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에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813년 러시아군 소속 장교 신분으로써 프로이센군과 접촉하여 프로이센이 대불동맹에 가담하는 계기가 된 프로이센 - 러시아 협력을 구축하였다.

이후 탈영과 적군에 대한 종군혐의로 찍혀있던 그는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귀양을 떠난 1815년이 되어서야 프로이센 왕에게 귀국을 허락 받고 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육군대학 교장과 포병감 등을 지내고, 이 시기부터 《전쟁론》을 저술하기 시작해 6~7장을 제외한 장의 초고를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한다.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 장군 휘하의 참모장을 역임하다가 유럽 콜레라에 걸려 51세의 비교적 젋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4] 사후에 그의 부인이 전쟁론을 출판하였다.

2.1. 전쟁론

그의 저서 《전쟁론》은 아시아의 《손자병법》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한 군사전략서로 꼽힌다.[5]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라는 내용은 전쟁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적인 언급으로, 전쟁론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아는 말 중 하나다.

사실 꽤 많은 이들이 이 문장 하나만 보고 전쟁론을 접어버린다. 전쟁론은 유명세에 비해 제대로 읽은 사람은 전문가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책이다. 민간인들이야 군사 부문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다 쳐도, 군인들조차 클라우제비츠의 철학적 사유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제대로 읽기 쉽지 않다. 거기다 책 자체도 난해하게 쓰였는데, 직접적인 서술보다는 문학적, 철학적 표현들을 많이 사용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책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내용 정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전쟁론을 끝까지 읽은 사람도 드물뿐더러, 그 중에는 오독하고 주화입마한 사람도 흔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아예 국가 단위로 전쟁론을 오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3. 그 외

4. 관련 문서


[1] 정확히는 미완성 유고 묶음집으로 발간됐다.[2] 지금이라면 소년병이니 뭐니해서 욕 먹고 비난 받을 일이고 동시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흔했다. 일단 지금과 달리 당시는 최상류층마저도 평균 수명이 47세를 넘기지 못했던 시절이니 현재의 어린이와는 좀 다르기도 하거니와 미국에서도 남북 전쟁이나 미국-필리핀 전쟁까지 10대 초반의 어린아이들이 당번병으로 잡일을 하던 건 흔한 일이었다. 영화 워털루에서도 프랑스군에서 북치는 아이들이 등장한다.[3] 틸지트 조약의 결과.[4] 같은 해 그나이제나우 역시 콜레라로 사망했다.[5] 20세기 이후 명장이라 불리는 군인들의 공통점은 이 두 저서를 모두 읽고 제대로 파악하여 전장에 적용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오쩌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