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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2:57:39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나폴레옹의 몰락에서 넘어옴
나폴레옹 전쟁 전개
러시아 원정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백일천하
이베리아 반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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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전투

나폴레옹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 이르는 길
나폴레옹 1813년: 국가들의 전투
나폴레옹의 엔드게임: 1814년 프랑스 전역

1. 개요2. 위대한 군대의 몰락3. 1813년 초기전역
3.1. 1812년 원정의 파멸과 프로이센의 참전3.2. 나폴레옹의 반격, 뤼첸 전투와 바우첸 전투3.3. 졸전의 원인
4. 휴전
4.1. 드레스덴 회담4.2. 라이헨바흐 조약과 프라하 회담
5. 1813년 후반기 독일 전역 - 독일해방전쟁
5.1. 드레스덴 전투5.2. 라이프치히 전투5.3. 자연국경 휴전 논의
6. 1814년 전역 (프랑스 침공)
6.1. 6일 전역6.2. 쇼몽 회담과 라옹 전투6.3. 아르시쉬르오브 전투와 파리 진군
7. 몰락8. 백일천하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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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ar of the Sixth Coalition (1813-1814)

나폴레옹 전쟁의 아홉 번째 국면. '나폴레옹의 몰락'이라고도 불리며, 독일에서는 해방전쟁(Befreiungskriege, Wars of Liberation)이라 칭한다.

나폴레옹 전쟁 최초로 영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등 4대 열강이 모두 대프랑스 동맹으로 참전한 전쟁이다. 이미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린 라인 동맹 소속 옛 영방 국가들 등 거의 전 유럽이 나폴레옹을 상대했다.

2. 위대한 군대의 몰락

1790년대 혁명전쟁 당시의 프랑스 보병들은 많은 장교들이 해외로 도피해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자원병들이 대다수였으나 이들은 교련 교본대로 움직이지는 않아도, 척후병이 사격으로 적을 동요시키고 종대가 총을 장전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전진하는 데에 천부적이라 할 만한 재능을 발휘했다. 나중에는 부대 일부는 횡대로, 일부는 종대로 세우는 여러 종류의 혼합 대형도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1811년에 이르자, 나폴레옹은 1년도 복무하지 않은 하사관과 2년도 채 안 된 상등병들을 봤다고 불평하면서 "3년 이상 복무하지 않으면 부사관이 될 수 없다고 명령을 반복하라."라고 말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경험을 갖춘 사관이 되기 전에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1812년 러시아로 보내진 프랑스 보병들은 '기계적으로 이동하는 대신 지형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활용하여' 척후를 하라는 명령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이제 대육군의 장군들은 제어하기 쉬운 큰 종대 형태로만 부대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서 베르됭 전투 이전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프랑스 병사들을 잃고 돌아온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소년병들을 긁어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소년병들은 "폐하, 저희들을 근위병들만큼 믿으셔도 됩니다."라고 나폴레옹에게 말했다는 일화를 남겼을 만큼 충성스러웠지만 나폴레옹과 함께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 라페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 아이들은 나폴레옹의 전설에 함께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쌍한 어린애들을 전 유럽의 군대와 싸우게 만든다는 건 그 자체로 범죄다."

1814년, 프랑스 본토가 무너져내릴 때 어느 장군은 "이제 내 부대원들을 한 무리로 움직이는 방법은 장교들과 서류용 철끈으로 그들을 줄줄이 묶어놓는 것뿐이다."라는 절망어린 농담을 남겼다.
리처드 홈즈 "나폴레옹의 영광" 중[1]

프랑스러시아 원정에서 입은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장교진도 쓸려나가다시피 했고, 부사관은 아예 입대 1년차 신병이 임명당할 수도 있는 자리가 되었다. 일반병은 말할 나위도 없었는데, 러시아에서 추위, 전사, 질병으로만 최소 37만 명을 잃었고, 포로로 잡히거나 낙오되었다가 고문, 살해당한 인원도 20만이나 되었다. 그나마 외국인들은 아깝지 않다 쳐도 근위대의 8할이 죽어 나가는 등 경험 많은 고참병이 남아나질 않았다. 말도 20만 마리나 죽었는데, 프로이센 등지에서는 이미 말을 징발한지 오래였고, 새로 말을 키울 사육지는 러시아 제국군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추가로 말을 조달하는 것도 극히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러시아 원정의 패배는 대불동맹에겐 그동안에 유럽의 깡패인 나폴레옹에게 당해왔던 복수의 기회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1812년 12월 부랴부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엉망진창이 되어가던 이베리아 반도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프랑스군은 쉬셰, 마르몽, 술트 등의 원수들이 군벌화되어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는 추태를 보이고 있었고, 이를 포착한 웰링턴은 먼저 마르몽을 공격하여 시우다드로드리고와 바다호스를 점령한 다음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박살내 버렸다. 비록 부르고스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하긴 했으나 안달루시아에서 술트를 완전히 축출해 버림으로써 이베리아 전쟁의 판도가 달라졌다. 이 골치 아픈 상태에서 교황까지 말을 안듣고 정교협약 무효를 외치고 있었다. 정말 엄청나게 열받은 나폴레옹은 사제와 신학생들까지 모조리 징집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반발하는 외삼촌 페슈 추기경을 감금했다.

이런 복잡한 정세 속에서 결국 나폴레옹이 의지할 구석은 그랑다르메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1813년 중반까지 65만 6천 명을 추가로 징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1798년 장바티스트 주르당 장군이 제정한 20~25세 사이+미혼+자녀 없는 남자 중에서도 군수산업체 직원, 공무원, 일부 학과의 대학생, 성직자들은 면제하는 수준의 느슨한 징병제로는 달성될 수 없는 목표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있는 동안 이미 1813년도 징집 대상자들이 황후의 명의로 포고된 징집령에 의해 소집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고작 13만 7천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종 무리수가 남발되었다.

우선 징집대상 연령을 위로 4년까지 늘려 10만 명을 추가로 징집했다. 그리고 기혼자까지 일부 포함되어 있는 국민방위대를 정규군으로 포함시켜 다시 8만 명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망하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서도 병력을 집중적으로 차출하고, 본국에서도 기마경찰대를 기병대로 전환시켜 4월 초까지 20만 명 이상을 추가했다. 4월 3일 올해의 첫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도 징병은 계속되어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할 일이 없어진 해군에서 2만 명을 데려오고, 징집대상 연령을 아래로 2년 늘려 16만 명을 추가하는 끝에 1813년 신규 동원된 프랑스군은 장부상으로는 50만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리한 징병은 당연히 프랑스 각지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기존에는 징집대상 연령이라도 대리인을 고용해서 입대시키면 본인은 군대를 가지 않을 수 있었는데, 1813년 4월 3일 원로원 결의로 이를 무시하고 본인을 다시 징집하게 되면서 부자와 귀족의 반발을 샀고, 군부 역시 부르주아 나부랭이들이 장교단에 기어들어오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징집관의 봐주기를 금지하기 위해 징병 업무를 지역 당국에서 중앙 정부 관할로 빼앗아버렸다. 결국 빠져나갈 길이 완전히 막힌 프랑스 전역에서 징병 기피와 탈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자해하거나 17세 청년이 90세 노인과 결혼하여 징병을 피하려 시도하고 이를 생으로 뽑거나 산을 머금고 방향을 씹어 이를 끝장내서 탈영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참고로 징병 기피를 위해 이를 망가트리는건 당시 주무기인 머스킷에 쓰는 탄약과 화약을 포장한 봉투를 이로 뜯었기 때문. 심지어 몸을 불로 지지고 상처에 물과 비소를 뿌리고 일부러 탈장하거나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빠져나간 징병 기피자들과 탈영자들은 사제와 농민들의 지지, 지식인들의 협조까지 받으며 사실상의 반란 세력이 되었다. 이미 1811년에만 14만 명이 달아났고 이들을 찾기 위해서도 엄청난 숫자의 병력을 할당해야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 상황에서도 오히려 징병 기피자들의 가족을 체포하거나 그들에게 강제로 병사들을 숙식시키는 벌을 내렸고 이는 당연히 국민들의 증오를 받게 된다.

징병으로 병력을 확보한 나폴레옹은 엘베-오데르 전선을 유지하고 다시 폴란드로 진군하여 거기에 고립된 15만의 프랑스군을 구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는 최소 30만 이상의 숙련병이 필요했지만 문제는 그가 가진 병력이 30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숙련병과 숫적으로는 30만이 넘지만 경험은 전혀 없는 신병들 뿐이었다.

3. 1813년 초기전역

독일 전역에서 패전 원인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60만 혹은 70만을 통째로 잃어서 병력이 부족해 동맹국의 인해전술(?) 때문에 졌다는 속설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오히려 실제로는 초기 전역에는 프랑스군이 동맹군을 병력으로 압도했다.

프랑스가 러시아 원정에서 큰 피해를 본건 맞지만 러시아 국경을 넘은 건 42만~45만 명, 그 중에서도 모스크바 공략을 맡은 나폴레옹의 주력은 35만이었으며 이중에도 절반은 프랑스 군대가 아니었다.[2] 미덥지 못한 동맹국 프로이센의 주요 요새와 항구는 프랑스군이 벌써 5년 이상 점령하고 있었다.

한편 대불동맹에서 1813년 초기전역을 맡은 러시아 제국프로이센 왕국도 딱히 형편이 낫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25만의 병력 손실을 아직 메우지 못해 선발대는 겨우 5만, 전체 투입 병력도 12만에 그쳤고, 프로이센은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상비군을 4만 2천을 넘기지 못하는 제약이 걸리는 바람에 빨리 제대시켜 예비역을 불리는 꼼수를 써도 8만까지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 란트베어(지역방위군)를 포함[3]하면 14만까지 동원할 수 있었으나, 란트베어까지 무장시킬 장비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동원한 병력은 총 11만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전역 초기에는 독일-폴란드의 기존 주둔군 9만여 명에 본국에서 12만을 투입시킨 프랑스가 더 유리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 시점부터 군대 규모에 비해 숙련된 병력과 기병 및 포병이 부족해지는 단점을 감추지 못한다.

3.1. 1812년 원정의 파멸과 프로이센의 참전

1812년 12월 5일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간 후 그랑다르메는 모랄빵 상태에 빠져 근위대원들까지도 탈영하기 시작했다. 12월 6일의 기온은 영하 38도에 달했는데 스모르곤[4]에서 빌나로 퇴각하는 와중에만 그랑다르메는 2만 명을 잃었고 12월 8일 빌나에 들어서서는 빌나를 철저히 약탈했다. 당시 빌나에는 10만 명이 40일간 먹을 식량이 준비된 상태였으나 이미 굶주리다 못해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 구워먹고 피를 뽑아 마시며 후퇴하던 프랑스 군대에게 질서 따윈 없었다. 지휘관 조아킴 뮈라도 마음이 저 멀리 간 채 루이니콜라 다부에게 자신들이 섬기고 있던 건 한낱 괴물이었다고 황제를 비난하기까지 했고[5] 미친듯이 약탈하고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자느라 또 죽어가던 프랑스 군대는 카자크 기병대가 도시 밖에 나타나자 빌나를 최소한 8일간 지키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무시하고 24시간 만에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뮈라는 2만 명이나 되는 부상병을 카자크 기병대의 장난감으로 던져줬고 카자크 기병대는 당연히 포로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분노해 날뛰었다.

12월 10일 시점에서 뮈라의 수중엔 겨우 1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달아나면서 대포와 돈궤까지 버렸으며 뮈라만이 마지못해 독수리 깃봉을 챙겼다. 코브노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군대 중 싸울 수 있는 사람은 7천 명에 불과했다. 12월 13일에서 14일에 걸쳐 뮈라는 후위대와 합류하여 추격하는 러시아군과 싸웠고 마지막으로 네 원수가 지휘하는 병력이 네만강을 도하한 후 교량을 불태웠다. 이것으로 1812년 전역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살아남은 프랑스 군대는 독일 전역에 흩어졌다. 슈바르첸베르크와 레니에르가 지휘하는 9만 명의 독일 생존자들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돌아갔다.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고 추격하던 러시아군은 일단 국경에서 추격을 멈추고 프로이센과 1812년 12월 31일 타우로겐 회의의 결과에 따라 프랑스군 10군단 마크도날에게서 이탈한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병력을 포섭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사후 추인을 전제로 하여 강화를 맺고 반 프랑스 전선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사실 이 와중에 미하일 쿠투조프와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확전에 대한 의견차로 불화가 심했는데 쿠투조프의 의견에 따르면 국경 밖에서 싸우는 것은 확률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지쳤으니 우선 쉬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친 것. 그래서 쿠투조프의 의견을 늙은이의 헛소리로 치부한 황제는 격노하여 쿠투조프를 경질시키려 했으나 마침 건강이 악화된 쿠투조프가 진짜 은퇴했고, 황제는 기뻐하며 후임자로 비트겐슈타인을 임명한다.

어쨌거나 타우로겐 회의의 결과에 독일 전역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브란덴부르크에서 전쟁을 외치기 시작했고 주저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1813년 2월 28일 차르와 동맹을 결정, 타우로겐 회의의 결과에 비준하여 프랑스에 대한 성전을 선포했다. 3월 13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 했다. 프로이센은 러시아에게 1806년 이전의 영토를 수복할 것을 보장하고[6] 유럽의 평화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8만 명의 프로이센 군대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3.2. 나폴레옹의 반격, 뤼첸 전투와 바우첸 전투

한편 러시아 군대는 1813년 1월 국경을 넘어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 뮈라는 포젠으로 후퇴하여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군대를 맡기고 자신은 나폴리 왕국으로 달아났다. 외젠은 최선을 다해 러시아 군대를 저지하려 했지만 1월 중순 러시아 군대는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 비스와강을 도하했고 2월 7일에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엄청난 숫자의 러시아 군대를 이길 수 없었던 외젠은 오데르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엘베강으로 후퇴했다. 이에 11만 러시아 군대가 독일로 입성하였고 전술한 것과 같이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했다. 3월에 러시아 군대는 베를린에 입성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베를린 탈환 이후 토르가우-비텐부르크-마그데부르크-함부르크를 축으로 하여 러시아와 맞서며 프로이센을 이탈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외젠은 쿠투조프의 공격에 자꾸 밀렸다. 첫 전투인 4월 2일 함부르크 동남쪽 50킬로미터 떨어진 뤼네부르크 전투에서 외젠이 패했는데 소규모이긴 했지만 나폴레옹군이 엘베강을 넘어 도망간 후의 동맹군의 첫 승리였고 전략상으론 기여한 바는 없었으나 독일 전역에 소식이 전해졌으며 나폴레옹의 불패는 독일에서도 깨졌다는 식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외젠이 함부르크를 버리고 드레스덴으로 철수하자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함부르크를 사수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를 위해 외젠이 마그데부르크로 이동하자 블뤼허가 드레스덴을 점령해버렸다. 드레스덴은 친불국가인 작센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4월 5일 작센의 뫼케른 전투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과 요르크 폰 바르텐베르크의 프로이센군이 외젠의 병력을 요격했는데 동맹군 2만 3천명, 대포 130문 병력으로 프랑스군 5만 300명, 대포 122문의 병력을 격파했다. 패배한 외젠은 베를린 침공을 포기하고 엘베강을 넘어 철수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계획을 수정, 5월에 공세를 개시하여 단치히를 탈환하고 러시아 군대를 비스와강으로 몰아내기로 하였다. 그를 위해 외젠과 합류한 다음에 단치히에 갇힌 15만 프랑스 군대를 구출하여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을 점령하고 엘베강을 차단할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은 3월 내내 전쟁을 준비했고 원수들을 독전했으며 미셸 네 원수에게 모스크바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 1813년 4월 15일 나폴레옹은 생클루를 떠나 4월 17일 마인츠에 도착, 일주일 동안 전쟁을 준비했다. 나폴레옹은 네의 3군단 소속 4만 5천 병력, 마르몽의 6군단 소속 2만 5천, 베르트랑의 4군단과 우디노의 12군단을 합쳐 3만 6천, 근위대 1만 5천이 있었으며 세바스티아니 기병대 1만 4천과 5,8,11군단에서 차출된 병력을 모두 합쳐 20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비록 기병의 부족을 알고 걱정하긴 했으나 야전을 유도하여 동맹군을 섬멸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4월 25일 나폴레옹은 에어푸르트에 도착하여 5월 1일 바이센펠트 전투를 벌였고 프랑스가 승리했으나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원수가 전사하여 나폴레옹에게 충격을 주었다. 바로 다음날인 5월 2일의 뤼첸(괴로스괴르센)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네가 수색을 까먹는 통에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대가 네를 완벽에 가깝게 기습한 것이다. 오전 11시 45분부터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네는 기습을 허용한 것 치고는 잘 버텼으나 오후 2시 30분에 나폴레옹이 나타날 때에는 전황이 불리한 상태였다. 이에 나폴레옹이 직접 3군단으로 달려가 병사들을 독려했고 6군단을 증원해주었다. 그리고 마크도날에게 러시아군의 우익을, 베르트랑에게 좌익을 공격하게 했다. 비트겐슈타인과 부상당한 블뤼허를 대행하던 요르크는 나폴레옹에게 낚여버렸고 오후 4시에 예비대까지 투입하며 버텼지만 5시 30분에 마크도날과 마르몽이 도착하고 청년근위대, 선임근위대, 포병의 협공으로 동맹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하지만 네의 실수로 초반 피해가 커서 동맹군 8만 8천 5백과 프랑스군 14만 4천의 전투 결과로 동맹군이 각각 2만 명을 잃었다.[7] 이 중에 초반에 삽질한 네의 병력이 15,000명이나 되었다. 이때 러시아에서 막료로 활약하던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가 전투 중 슬개골에 입은 총상으로 나중에 사망하고 만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마크도날과 베르트랑의 병력을 이용해 패주한 동맹군을 포위해 놓고도 러시아에서 기병대를 다 날려먹었기 때문에 추격을 할 수 없는데다가 날이 저물어서 동맹군의 섬멸에 실패했다. 나폴레옹은 뫼케른에서 패배하고 나서 정치적으로 승리가 필요한 차원에 때마침 뤼첸에서 승리를 얻었으나 신병들의 한심한 전투력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엄청나게 강력해진 프로이센 군대를 보고 "저 짐승들이 뭔가를 배웠다." 라고 평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바우첸으로 퇴각한 동맹군은 바클라이 드 톨리의 러시아 병사 1만 3천명을 지원받았다. 5월 4일 나폴레옹은 병력을 둘로 쪼개 8만 5천명을 네에게 주어 빅토르, 레니에르, 세바스티아니와 함께 베를린으로 진격하게 했고 자신은 드레스덴을 공격하기로 하여 프로이센 이탈을 시도했다. 거기에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우려하여 외젠을 이탈리아로 돌려보내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게 했다. 작센이 프랑스에 증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5월 5일 콜디츠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가 프로이센 군대를 격파하면서 나폴레옹은 크게 고무되었다. 나폴레옹은 나뉜 부대를 합쳐 동맹군을 완전히 분쇄하기로 했다.

5월 20일 바우첸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계획만큼은 잘 짰으나 무능하기 그지없는 원수들의 삽질로 나폴레옹의 명령들이 제대로 이행도 되지 않았다. 우디노도 네도 엉뚱한 곳을 공격하고 교착 상태에 빠져 나폴레옹을 실망시켰고 결국 나폴레옹이 근위대까지 투입하고 나서야 동맹군은 철수했으나 원수들의 삽질로 대포까지 다 건져서 질서정연하게 퇴각할 수 있었다. 이날 전투에서도 프랑스군과 동맹군은 각각 2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병력 충원이 불가능한 나폴레옹의 타격이 더 큰 셈이었다. 나폴레옹은 원수들의 무능, 근위대의 미숙한 솜씨, 기병의 부족함에 크나큰 실망에 빠졌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두 차례나 연속으로 이기자 동맹군 군주와 지휘관들도 기병 없이 신병만 가진 나폴레옹에게 패배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저 괴물이 아직도 싸울 힘이 있다." 며 경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폴레옹은 알지 못했다.

5월 22일 프랑스 군대는 추격에 나섰다가 라이헨바흐에서 동맹군과 충돌했는데 이때 나폴레옹은 뒤로크 장군을 포격으로 잃어 멘붕에 빠졌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추격을 그만두어 살아남은 동맹군은 슐레지엔으로 퇴각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세 차례의 큰 전투에서 질은 좋지 않지만 어쨌거나 이기고 다부가 함부르크를 탈환하는 등 승리하자 프랑스 쪽으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좋지 않은 질 때문에 입은 피해를 정비하고 보급선도 추스를 필요가 생겼고, 마리 루이즈와 혼인을 했으니 오스트리아와는 싸울 일이 없다고 생각해 오스트리아의 중재 제안을 받아들여서 6월 4일 포이슈비츠 협정으로 두 달간 휴전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3.3. 졸전의 원인

1813년 초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입은 피해로 저하된 프랑스군의 질은 나폴레옹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모든 원인은 나폴레옹 본인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빠들은 온갖 if 떡밥으로 나폴레옹 실패와 불운을 아쉬워하지만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이베리아에서 25만, 1812년 러시아에서 40~50만씩 꼴아박았는데도 다시 병력을 보충할 여력이 있는 유럽 국가는 프랑스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러시아 제국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인구(약 2700만)[8]과 경제력을 지닌 프랑스를 쥐어짜서 유럽을 정복했고, 정복하고 나서는 라인 동맹, 이탈리아, 바르샤바 공국 등에서 역시 수 십만씩 징집하며 병력을 펑펑 쓰고 다닌 것.

병사들의 수준 문제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어서, 1809년 바그람 전투부터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에 비해 병력 수준이 떨어진다 하여 실망했었고 1813년에는 16~17세의 청소년들까지 징집하여 머릿수를 맞춘 것이라, 가뜩이나 체력이 성인에 못 미치는 청소년들은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면역력이 쉽게 떨어져 전염병도 더 심각하게 번졌다.[9] 무엇보다 1810년까지는 탈영률이 3% 이하로 매우 적었는데 이후에는 마구잡이로 징집하는 바람에[10] 낙오와 탈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군기가 개판이 된 것이 패인 중 하나로 꼽힌다.

기병의 경우 오히려 1806년 이후 수준이 상승했다는 평을 받는데 1806~1809년 사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점령지의 말을 포획하고 징발하여 양질의 기병 전력을 갖추었지만 러시아 전역에서 말을 20만 마리나 잃는 바람에[11] 이후로는 기병의 병력수가 동맹군과 비슷하거나 많은 경우에는 정찰과 추격섬멸에서 기병의 부족으로 기병 활용이 어려워서 승리를 놓치는 경우가 계속 나왔다.

포병의 경우도 러시아에서 1,000여 문의 대포를 꼴아박았는데 본국에서 대포를 찍어내는 건 아쉬운대로 보충할 수 있었지만 기병과 포병 모두 숙련도가 중요하고 경험 많은 병사와 하사관, 장교를 거의 잃었으며, 두 병과 모두 보병보다 교육훈련 기간이 길어서 나폴레옹이 동맹국이 제의한 여러 번의 강화를 스스로 걷어차고 발끈해서 전투를 벌일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는 결론이 대세다.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의 회고록>을 비롯한 나폴레옹 입장에서 이렇게 변명하기도 한다.
나폴레옹이 본인의 능력을 과신하여 강화를 여러차례 거절하고 전 유럽이 담합한 연합군에게 무리한 싸움을 건 것은 명백한 사실로, 결국 수적 우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배한 것은 맞으나 언뜻 보면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이 판단에도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혈통에 집착해서 자신의 무능한 가족들을 다른 나라의 왕위에 앉히는 실책을 저질러 헤어나올수 없는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발을 들이고 수도가 불타도 전혀 항복할 의사가 없을 수준의 광적인 의지를 불태웠던 러시아를 과소평가하는 등 대전략 차원에서의 명백한 실수가 있긴하나 나폴레옹의 실패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원인은 왕정을 뒤집은 혁명으로부터 태어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퍼뜨리던 혁명의 사상들은 유럽 왕실들의 권력 체제를 크게 위협했으며 역사도 없는 코르시카의 시골 가문에서 태어난 찬탈자가 고귀한 가문의 자신들을 계속해서 전쟁에서 패배시켜 명예과 위신에 큰 상처를 입혔기에 반드시 그를 끌어내리고자 했던 각국 유럽 왕실들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나폴레옹은 진심으로 화평을 원한 시기도 있었고 그렇기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황녀를 자신의 아내로 들이려는 외교를 통해 동맹을 돈독히 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외교로 해결하기에는 프랑스와 기존 구체제의 유럽 왕실들은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건을 개인적, 우연적 요소로만 취급하려는 나폴레옹 시대 전후의 영웅사관에 불과한 해석이다. 유럽 왕실들이 찬탈자에 불과한 나폴레옹을 제거하려는 이유는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말아먹고 오기전엔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유럽 군주들은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으며 스페인 왕실도 나폴레옹에 쫓겨나기 전에도 우호적으로 대했으나 나폴레옹이 뒤통수를 치고 왕위를 뺏어다 친형에게 선물한 것이고,[12]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도 군사적으로 굴복하자 대체로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 체제를 인정했다. 독일의 군주들은 나폴레옹 체제에 일부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득을 보고, 대부분은 방관 했으며 프랑스 지배하의 혁명 사상이 오히려 유럽 민중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군주들이 민심에 손을 들고 태세를 전환했다. 이는 나폴레옹 몰락 이전의 스페인에서도 볼수 있고 1813년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국제 관계는 힘의 논리로 결정되며 나폴레옹에 줄서서 이득을 본 국가들은 찬탈자를 적극 지지 했다가 자원과 인력의 수탈에 지쳐 나가 떨어진것이 가깝다.

나폴레옹의 숭배자들은 1812년 전역부터의 계속된 패전에서도 나폴레옹 신화를 찾아내지만 이미 나폴레옹 전쟁의 규모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초반의 규모보다 수십배 팽창되어 전 유럽을 전장으로하고 여러 국가 총력전 형태로 바뀌어서 한사람의 유능 무능으로 결정될 사안이 아니었다. 마치 영화에서 나폴레옹 같은 전술 먼치킨이 망원경을 보면서 저곳을 차지하는자가 이번 전투의 승리자다 이런식의 천재성은 국력을 모두 결집한 총력적인 형태에서는 그다지 유의미한 결정요인이 될수가 없었다. 역설적으로 불세출의 군사 천재로 불린 나폴레옹 조차 나폴레옹 전쟁의 성격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는 단순히 나폴레옹까 개인이 아니라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등 후대 나폴레옹 전쟁사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파리시장이 뒤통수를 쳐서, 무능한 친인척들이 뒤통수를 쳐서, 장군들이 뒤통수를 쳐서, 오스트리아가 뒤통수를 쳐서 프로이센이 뒤통수를 쳐서 영국이 돈을 무제한으로 풀어서 차르 알렉산드르의 야만적인 복수심 등 나폴레옹의 무수한 if 떡밥내지 나폴레옹 중심의 대의명분론과 우연과 감정적 요소는 흥미는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지지자들이 전쟁과 시대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4. 휴전

4.1. 드레스덴 회담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1813년 일시 휴전을 받아들인 것을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매우 후회하는데 자신의 군대를 교육, 훈련하고 보충, 재편성할 동안 동맹국의 군대는 더 강화되었다는 것. 실제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의도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가 동맹에 참여할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으므로 나폴레옹의 주장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도 피해가 크게 누적되어서(2만 5천 명의 사상자와 9천 명의 부상자) 휴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엔 나폴레옹과 동맹군이 모두 오스트리아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40만 이상의 예비병력이 있던 오스트리아가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 전략의 추가 확 기울어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를 섭정으로 임명한 상태에선 오스트리아가 개전하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며 나폴레옹에 대한 메테르니히와 프란츠 2세의 원한이 매우 깊었다. 이 때문에 작센드레스덴 마르콜리니 저택 중국실에서 정오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나폴레옹과 비밀 회동을 가졌던 메테르니히는 진지한 협상보단 냉소와 조롱으로 일관했다. 이때 메테르니히는 프로이센의 영토 회복, 라인 동맹 해체, 프랑스 영토를 자연국경 내부로 제한, 오스트리아에 일리리아를 반환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미 프랑스 내부의 명사들은 자연국경 수준에서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탈레랑을 통해 이를 들어서 프랑스의 사정이 얼마나 나쁜지를 알고 있던 메테르니히는 강경하게 나갈 수 있었다. 특히 메테르니히는 8월 10일까지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서 제시한 강화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오스트리아는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선포하며 당장 수용해줄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폴레옹이 흥분하여 외쳤다.
"나의 치세는 내가 더는 강력하지 못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를 멈추는 날 끝날 것이다.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 뼘의 땅도 넘겨주지 않겠다. 왕좌에 앉을 운명을 타고난 그대의 군주들은 큰 마음 먹고 스무 번 패해도 되고 언제나 수도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출세한 군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백년단위로 집권하며 정통성을 쌓은 여러 왕가들과 달리 나폴레옹은 자수성가한 군사독재자였고, 그 지지율은 전쟁의 승리와 약탈품 덕이 컸던지라 틀린말은 아니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배신자로 비난하며 메테르니히의 어줍잖은 개입만 없었으면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했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나폴레옹은 일리리아의 오스트리아 귀속 정도는 동의했지만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의 반환, 바르샤바 공국라인 동맹의 해체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를 무조건 항복 요구로 받아들여 끝까지 거부했다. 특히 나폴레옹은 자신이 바우첸과 라이헨바흐에서 갓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런 바보같은 조건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하자 화가 난 메테르니히는 그를 싸늘하게 비웃었다.
"폐하의 병사들을 보았습니다. 모두 어린아이에 불과하더군요."

이때 나폴레옹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삼각모자 사건이 벌어졌다.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이 모자를 구석으로 집어던지며 벌컥 화를 냈다고 했고 나폴레옹은 자신이 실수로 모자를 떨어뜨렸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보다 지위가 낮은 메테르니히가 나폴레옹에게 화가 나서 나폴레옹의 모자를 주워주지 않았다는 것. 이에 나폴레옹의 분노가 결정적으로 폭발하였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모자를 걷어차면서 다시 메테르니히에게 외쳤다.
"그대는 군인의 정신이 어떤지 전혀 모르오. 나는 전장에서 성장했소. 나 같은 사람은 백만 명의 목숨도 개의치 않소."

이에 메테르니히는 어이없어하며 전 유럽이 이 말을 듣도록 모든 방문과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비웃었다. 그 다음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개인의 야망을 위해 프랑스인의 생명을 러시아에서 희생시키지 않았느냐고 그를 비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자신은 겨우 30만명만 잃었으며 프랑스인은 그중 십분의 일 미만이고 폴란드인과 독일인이 더 많이 죽어 줬다고 맞받아치며 그를 모욕했다. 이 말을 들은 메테르니히는 화가 치밀어 결국엔 냉정을 잃고 소리쳤다.
"폐하께서는 지금 독일인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입니다!"

이성은 잃은 양자는 서로에게 미친듯이 비난과 저주를 퍼부어댔다(비밀회담으로 시작했던 것이 악을 써대는 통에 사람들이 회담을 알게 되어 버리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제위를 잃으면 온 세상이 폐허에 묻힐 것이라고 소리쳤고 메테르니히도 지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그를 타락한 인간이라고 욕했다. 나폴레옹은 메테르니히에게 가롯 유다 역할을 하는 대가로 영국이 얼마를 줬느냐고 조롱했는데 영국에서 300만 파운드 이상을 전쟁 비용으로 받은 터라 메테르니히는 이때만큼은 뭐라 말을 못하고 침묵했다. 결국 9시간 동안 으르렁거린 끝에 나폴레옹은 일리리아 외엔 어떤 영토도 내놓을 수 없다고 못박으며 협상을 거부했고 메테르니히도 협상이 파토난 것을 알고는 더 할 말이 없음을 선언했다.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쏘아붙였다.
"오, 고집을 꺾지 않는군. 여전히 내게 지시할 생각이야. 그렇다면 좋소. 전쟁이오! 빈에서 다시 봅시다!"

회의가 끝난 8시 반, 메테르니히는 "폐하, 당신은 이미 몰락했습니다. 여기에 오면서 나는 그러리라 예감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라고 쏘아붙였다.[13] 그리고 회의의 경과를 묻던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에게 "황제는 모든 것을 충분히 분명하게 밝혔소. 모든 게 황제에게 달렸소." 라고 말했다.

4.2. 라이헨바흐 조약과 프라하 회담

대불동맹군은 6월 27일 라이헨바흐 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이 메테르니히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스트리아가 참전하겠단 것을 확정하였다. 나폴레옹은 드레스덴 회담에서 실수했다 여겨 프라하에서 회담을 열어 휴전을 8월 10일까지 연장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프랑스군은 이베리아 전선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를 알게 된 영국도 즉각 증원군을 이베리아로 파견했고 웰링턴은 1812년 11월 '훈타 슈프레마 센트랄(최고 중앙 위원회)'에서 스페인군 총사령관으로 선출, 1813년에 8만 7천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고 봄에 10만명으로 증강되었다. 웰링턴이 더욱 많은 병력으로 위협하고 있는데 나폴레옹은 스페인 주둔군을 1만 5천이나 빼내 독일로 보냈다.[14] 그 상황에서 원수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고 결국 6월 19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조제프의 스페인군이 개발살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승리에 도취된 영국군이 민간인들을 약탈하며 날뛰기 시작하여 웰링턴이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카탈루냐 진공을 연기했다는 것이었다. 7월 1일에 비토리아 전투 소식을 전해들은 오스트리아는 동맹군 합류에 뜻을 굳혔다. 만약 이 시점에서 나폴레옹이 라인 동맹을 포기하였다면 러시아의 서유럽 진출을 우려하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이탈을 부추길 수 있었을 것이나 문제는 나폴레옹이 지나치게 막무가내로 자신의 요구만을 주장했던 것이다.

프라하 회담에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의 지연 전술에 학을 떼면서도 바르샤바 공국 해체, 프로이센의 엘베 방면 영토 회복, 라인 동맹의 해체에 대해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였다. 아르망 드 콜랭쿠르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자고 했으나 나폴레옹은 라인 동맹은 자연국경 수호를 위한 보루라면서 거부하고 바르샤바 공국을 분할하는 대신 함부르크와 트리에스테를 요구하며 작센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영토를 할양하라고 했다. 이에 콜랭쿠르는 시의적절한 양보가 없어서 파멸하게 생겼다고 한탄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이 대화가 안 통한다는 것을 알고는 약속대로 8월 11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여기에 스웨덴의 베르나도트가 참전하면서 85만에 달하는 동맹군이 나폴레옹을 회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동맹군은 새로운 합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트라헨베르크 계획(Trachenberg Plan)이다.나폴레옹의 웬수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요한 슈트라우스 1세라데츠키 행진곡의 주인공)에 의해 계획되었으며 슐레지엔의 트라헨베르크 성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알렉산드르 1세, 베르나도트가 모여서 채택되었다.

트라헨베르크 성에서 합의의 핵심은 동맹군의 지휘체계를 세워 담당 권역을 배분하고, 협동작전 즉 1개군이 공격받을 경우 아군의 측면을 보호하며 나폴레옹의 측후면을 공격한다는 합의를 한 것.[15] 구체적으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최소한 15만, 프로이센은 8만 이상의 병력을 유지할 것과 구체적으로 3개 군(Army)를 두어

전체 동맹군 총사령관은 주력 1군을 맡은 슈바르첸베르크 원수가 맡았고 러시아군은 비트겐슈타인의 삽질에 열받은 알렉산드르 1세가 또 개입하여 경질하고 러시아 원정 때 욕먹고 경질당한 바클라이 드 톨리를 기용했다. 특히 동맹은 각 군이 서로 잘났다고 먼저 적을 공격하거나 하며 간격이 벌어지는 걸 금지했다. 물론 적 주력군 상대는 자제하고, 공격받을 경우 상호 협조로 적의 측면과 후면을 노리고 적군이 퇴각시 퇴로를 열어주는 것도 합의했다. 나폴레옹을 상대로 숫적 우위를 유지하며 각개격파를 노리는, 나폴레옹 입장에선 환장할 만한 작전.

5. 1813년 후반기 독일 전역 - 독일해방전쟁

5.1. 드레스덴 전투

동맹군이 나폴레옹을 회치려 하는 동안 나폴레옹은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가뜩이나 러시아와 이베리아에서 그 많은 병력을 고갈시켜 버렸음에도 원래도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병도 없는 병력 68만 명을 분산시켰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우디노에게 12만을 주어 베를린으로 보내 베르나도트랑 대결하게 했고 다부에게 엘베강 상류와 함부르크 방어를 명령했으며 자신은 25만 병력으로 드레스덴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원수들은 병력을 분산시키면 위험하다고 비판했고 마르몽은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두어도 최소한 두군데에서 패배 소식이 들어올 것이라고 깠다. 그리고 스스로가 프랑스 수도에서 그것을 증명했다.

거기에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기민하게 움직이는 동안 8월 17일부터 21일 동안 드레스덴에서 나와 러시아군을 타격할 것을 고려하다가 번복하고 다시 블뤼허를 치러 나갔다가 슈바르첸베르크가 드레스덴을 위협한단 소식에 돌아와버렸다. 그 사이에 8월 23일 웬수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그로스베어렌에서 베를린 방면으로 향하던 우디노의 군대를 격파했고(그로스베어렌 전투), 9월 6일에는 뷜로와 합세하여 우디노와 교체된 네의 군단도 격파해 버렸다(데네비츠 전투). 동쪽에선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8월 26일 카츠바흐에서 마크도날의 군단을 격파했다(카츠바흐 전투). 나폴레옹은 3만이 넘는 병력을 잃고 있었고 마르몽의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드레스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8월 25일 동맹군은 나폴레옹보다 먼저 드레스덴에 도착하였다. 드레스덴의 프랑스군은 16일 급파된 구비옹 생시르 장군의 3개 사단밖에 없었고 도시의 방어태세를 확인한 장 빅토르 모로와 알렉산드르 1세는 즉시 도시를 공격하려 했지만 슈바르첸베르크 원수는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블뤼허 타격을 그만둔 나폴레옹은 8월 26일 오전 10시 드레스덴 북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폴레옹의 주력을 포착한 동맹군은 이날 오후 3시 좌우익과 중앙 3면에서 2.5:1의 숫적 우위(8만 vs 19만)를 누리며 드레스덴에 맹공을 가했으나, 나폴레옹은 자기가 괜히 전쟁의 신이 아니란 것을 여기서도 증명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위급한 지역에 병력을 증원하며 동맹군의 총공격을 방어하다 오후 5시 30분 반격을 감행하여 동맹군을 모조리 축출했고 5만 지원군으로 숫적 열세를 조금이나마 만회, 다음날인 27일 다시 붙었다(13만 vs 21만).[17] 이날 동맹군의 계획은 중앙에 주력을 배치하여 프랑스군의 중앙을 분쇄함으로써 둘로 나누어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중앙은 방어, 좌우익 공격은 각각 빅토르와 청년근위대에게 맡겨 동맹군을 패퇴시킬 예정이었다. 나폴레옹의 우익은 전날 폭우로 불어난 강으로 본대와 고립된 적 좌익을 철저히 공격해 박살내버렸고, 좌익도 우익이 거둔 성과만큼 인상적이진 않지만 적 우익을 밀어붙여 3면 포위를 역으로 시전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중앙의 전투는 워낙 숫적으로 열세한데다 동맹군이 진지를 끼고 결사항전을 벌여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군의 포병대가 동맹국 황제들이 전황을 관찰하는 언덕을 때리는 사태가 발생하여 동맹국 진영이 단체로 모랄빵에 빠지고 만다.

나폴레옹은 28일에 끝장을 보고자 했으나 포로 2만 4천을 포함 총 4만 명을 잃은 동맹군 내부에서 오스트리아가 강력하게 철수를 주장하면서 동맹군이 철수하여 전투는 끝났다. 만일 나폴레옹이 곧바로 추격했다면 동맹군 주력을 섬멸하여 제2의 아우스터리츠를 실현할 수도 있었으나 그에게는 불행히도 27일 전투에서 비를 흠뻑 맞는 바람에 감기에 걸려 실려갔다. 나폴레옹 집권 초기 경쟁자였던 모로 장군이 여기서 치명상을 입고 9월 2일 죽었다.

드레스덴에서 작살난 동맹군은 에르츠 산맥(현 체코-독일 국경)을 넘어 후퇴했고, 험한 산맥을 넘기엔 철수가 어려워서 후위에 반담의 프랑스군이 공격해왔는데 러시아군의 오스테르만 장군이 몸빵으로 막아 14,700명 중 6,000명의 희생자를 감수하며 대군의 철수를 돕는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지시도 받지 않고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무리하게 추격하던 반담의 프랑스군 3만 병력이 되려 연합군에게 역습을 당해 반담을 포함한 7천여 병력이 포로로 사로잡혀서 나폴레옹이 전략적으로 드레스덴의 우세를 이용할 여지는 없어졌다.

일주일 후 차나에서 벌어진 전투는 프로이센이 선전했으나 우디노 원수와 미셸 네의 선전으로 승전하며 다시 베를린 공격을 노렸고 동맹군 북군(2군)의 타우엔친 장군이 비텐베르크에서 프랑스 군단을 차단하며 덴네비츠에서 뷜로의 군단과 베르나도트의 본대와 합류하여 프랑스군의 베르트랑, 레니에, 우디노의 전력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2만 2천 명 전사에 포로 1만 3천 명이 잡히고 동맹군 손실은 1만 명 남짓. (덴네비츠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뷜로 장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폰 데네비츠 백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5.2. 라이프치히 전투

한편 9월 9일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외상, 프로이센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수상, 러시아의 카를 로베르트 폰 네슬로데 외상, 이 3국 합의를 통해 프랑스와의 평화조약은 공동합의에서만 가능하다 확인하며 상호군사지원 용도로 최소 15만 병력을 유지할 의무를 공유했다. 3차 대프랑스 동맹전쟁 이전 (1805년)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국경 회복과 하노버 포르투갈 스페인 시칠리아의 왕조 회복을 보장할 것까지 합의했고 추가로 한달 후 영국도 참여하여 100만 파운드를 전비로 동맹국에 지원하고 다른 국가들의 참가의 여지까지 열어 두었다. 바이에른 왕국이 처음으로 동맹국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뒷통수 포문을 열었고[18]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프랑스의 기존 동맹국 20여개 국가들이 이탈한다.

몸을 추스른 나폴레옹은 프라하와 베를린을 고민하다가 베를린 공략을 결정했으나 슈바르첸베르크와 블뤼허가 잇달아 드레스덴을 찔러대는 통에 전진할 수 없었다. 거기에 나폴레옹은 네가 저지른 북방의 개삽질에 겉으로는 냉담한 척 했지만 속으론 분노하여 날뛰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블뤼허, 슈바르첸베르크, 베르나도트 중 한 사람을 상대하려 하면 나머지 두 사람이 후방을 찔러대고 다른 원수들을 두들겨 팼는데 이러한 결과 나폴레옹은 더 이상 나아가지도 못했고 그의 병력은 자꾸 소모되었다. 특히 8월 중순부터 나폴레옹은 300문의 대포와 15만의 병력을 잃었고 부상병도 5만에 달했다. 이미 작센을 제외한 전 독일이 동맹으로 돌아섰고 베르나도트가 뮈라, 베르티에, 우디노, 마크도날을 매수하려고 시도한 사실이 드러나 나폴레옹은 그들을 불러서 크게 화를 내며 미친듯이 날뛰었다. 이 때문에 뮈라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을 지키려고 칼자루까지 쥐었고, 베르티에도 나폴레옹을 진정시키기 위해 황제로써의 의무를 설명하였으나 나폴레옹은 베르티에를 향해 천치같은 늙은이는 닥치라고 고함쳤다.

이 난장판 속에서 해방전쟁의 진행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꾼 10월 3일 바르텐부르크 전투가 벌어졌다. 3개 군 중 슐레지엔 방면군 블뤼허가 처음으로 엘베강을 도하하여 진격한 것. 작전의 특성상 피해는 많았지만 작센 지방을 벗어나지 못한 나폴레옹의 군대에겐 전략상으로 매우 위중한 처지에 몰렸다... 나폴레옹은 포위를 풀어보려 9월 말부터 여러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전군을 엘베강 서쪽으로 철수시키기에 이른다. 병력은 이미 고갈되어 총 병력이 25만 수준으로 떨어졌다. 10월부터 전군을 엘베강 좌안 작센지방에 집결시켰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과감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군사적으로 의미없는 드레스덴에 집착하여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나폴레옹의 드레스덴 집착은 라이프치히 전투 때까지 이어졌다.

10월 5일 블뤼허와 베르나도트가 합류했고 블뤼허의 강력한 주장으로 이들은 라이프치히로 이동해 슈바르첸베르크와 합류했다. 라이프치히에서 3개군이 모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우울증에 빠져 낙서나 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16일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최대의 전투였다는 러시아 전역의 보로디노 전투의 기록을 13개월만에 깨버린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졌고 동맹군과 나폴레옹 간의 건곤일척 승부가 열렸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조아킴 뮈라와 슈바르첸베르크군의 기병 전초전으로 시작하여 동맹국들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나폴레옹이 가운데서 버티는 구조로 진행되었다. 이미 프랑스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음에도 나폴레옹은 과감하게 역습을 시도했는데 4만 3천 병력을 뮈라에게 주며 남쪽 측면을 보호하고 자신은 드레스덴 방향으로 진군한 것.[19] 이 시기에 동맹군은 1군의 슈바르첸베르크의 병력만 나폴레옹 전군에 필적하는 24만에 달할 정도로 유지 보충되어 있었고 13일 나폴레옹은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과 조우하자 불리함을 깨닫고 서쪽으로 후퇴하여 주력군을 라이프치히로 집결시켰다. 동맹군이 이에 맞서 라이프치히로 진격해 10월 16~19일에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 전쟁 사상 가장 거대하고 치열했던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졌다.

19만의 나폴레옹군을 36만의 동맹군이 포위한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더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10월 18일에는 동맹국 뷔르템베르크와 작센군 포대가 프랑스군에 포격을 시작하고 뷔르템베르크군 기병대가 편을 바꿔 프랑스군을 공격하며 급속도로 무너졌다. 10월 19일 결국 나폴레옹은 철수를 결정하지만 철수 중에 엘스터강 교각을 수비하던 프랑스군 병력이 프로이센군이 나타난 것만으로 겁을 먹어 일찍 폭파하는 바람에 3개 군단 3만 7천명의 병력이 다리가 끊겨 고립되어 프로이센군의 공격으로 모든 야포를 잃고 부상병 2만, 장군급 장교 30명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고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익사했으며 마크도날은 간신히 도주에 성공, 니콜라 우디노는 항복한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4일 동안 3만 8천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엘스터강 도하 작전의 실패로 3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대포도 325문이나 잃었으며 작센군 5천명이 이탈했다.

결국 이로 인해 고립된 단치히와 드레스덴의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10만명을 추가로 잃었다. 1813년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무려 46만 대군을 상실함으로 사실상 전력이 붕괴되었다. 동맹군도 1813년 전역에서 36만 병력을 잃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만 5만 4천이 사상하는 등 피해는 참혹하기 그지없었으나 이미 프랑스의 인력은 고갈된 반면 동맹군은 이 정도 피해를 아직 보충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만하임-프랑크프르트 방면으로 철수한다.

5.3. 자연국경 휴전 논의

10월 30일 바이에른의 카를 필리프 요제프 폰 브라데 장군이 동맹군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아나우에서 프랑스군의 퇴각을 저지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은 바이에른군을 개발살내고 철수에 성공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전력 손실은 복구가능한 수준을 진작에 넘어섰고 천하의 나폴레옹이라도 초라한 군세로 동맹군에 대적할 기적을 만들진 못했다. 한편, 동맹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데다가 티푸스의 유행과 폭우 때문에 진격이 어려워져 11월엔 프랑스군 보급기지창이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동맹국이 모여 휴식을 할지경이 되었다. 웰링턴은 벌써 10월 7일 프랑스 국경을 돌파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맹군은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극명한 의견차를 보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영국은 러시아의 서유럽 진출을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워했고,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하면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너무 강해질 것을 의식해서 자연국경 휴전 안을 제기했다. 영국은 앤트워프와 스헬더강만 제외시킨단 조건으로 이에 동의했다. 프랑스의 차기 황제를 노리던 베르나도트도 프랑스 침공을 반대했다. 결국 동맹군은 자기들끼리의 의견 조율을 위해 나폴레옹에게 자연국경 휴전을 제안했는데, 자존심 강한 나폴레옹이 당연히 거절할 것이니 이를 빌미로 공격하면 된다는 계산으로 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대등한 조건의 국제회의를 제안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승낙하여 동맹군을 놀라게 했다. 물론 나폴레옹은 자신이 자연국경 휴전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프랑스에 보도되지 못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영국이 프랑스의 벨기에 점령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오스트리아도 러시아 견제를 위해 영국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자연국경 휴전은 물건너갔다. 그래서 동맹군은 나폴레옹에게 1792년 국경을 강요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동맹군을 탐욕스러운 늑대라고 욕하며 길길이 날뛰면서 거부했다.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를 복위시켜 이베리아 방면이라도 정리하려 했으나 영국의 방해로 실패했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선 외젠이 오스트리아에게 탈탈 털리고 있었고 스페인에선 술트가 웰링턴에게 처맞고 있었다. 홀란트와 벨기에는 반란 직전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전쟁으로 재정이 바닥나자 술, 담배, 소금에 간접세를 도입하고 영업세를 두배로 인상했으며 정상 과세액도 30상팀 인상하면서 국민들을 쥐어짰다. 이에 부르주아들도 불만이 폭발하여 나폴레옹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특히 1813년 2월 19일 입법부 전체회의에서 원로원은 황제를 지지했으나 입법원은 나폴레옹의 전쟁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나폴레옹을 분노케 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입법원 해산으로 대응하며 그들을 탄압했다.
"그대들은 국민의 대표가 아니다. 국민의 진정한 대표는 바로 나다. 내가 프랑스를 필요로 하는 것보다 프랑스가 나를 필요로 한다."

나폴레옹은 1815년 입대 예정자들, 퇴역 예비군, 세관원, 경찰, 산림경비대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12만명을 더 모았지만 그게 전부였고 더이상의 병력을 모을 수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무려 6500만 프랑이나 되는 개인재산까지 전쟁비용으로 퍼부었다. 하지만 전세는 불리했다. 빅토르가 낭시와 스트라스부르를 포기하고 퇴각했고 1814년 1월엔 나폴리 왕국의 뮈라 부부마저 동맹군에 붙어 외젠 때리기에 동참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나폴레옹은 카롤린을 창녀라고 비난했다.
"나폴리 왕과 왕비의 행태는 입에 담기조차 거북하다. 기필코 오래 살아 나 자신과 프랑스를 위해 그와 같은 능욕과 지독한 배은망덕에 복수하겠다."

반대로 외젠은 항복하면 이탈리아 왕을 시켜주겠다는 동맹군의 제안을 거부하고 리옹으로 철수하여 나폴레옹 곁에 남았다.
12월 21일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 본토로 진격했다.

6. 1814년 전역 (프랑스 침공)

6.1. 6일 전역

나폴레옹은 파리의 요새화를 지시하는 한편 파리 총독으로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임명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한편 동맹군은 다시 4개군으로 개편되었다. 뷜로와 토머스 그레이엄이 지휘하는 스웨덴과 영국군이 벨기에와 홀란트를 공략한 후에 프랑스로 진격했고 베르나도트와 베니히센의 스웨덴군이 함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를 쳤다. 블뤼허는 10만의 슐레지엔 병력으로 나폴레옹을 요격했고 슈바르첸베르크와 황제들이 있는 20만 대군이 웰링턴과 합류하기 위해 전진했다. 동맹군은 2월까지 40만 대군을 프랑스에 진입하기로 하였다.

새해 첫날부터 슈바르첸베르크의 20만 병력이 이탈리아 방면 동맹군과 합류하기 위해 라인 강 상류 지방으로 진격했고 베르나도트의 2군은 다부가 이끈 10만 명의 잔당 소탕과 함부르크 방면과 네덜란드 탈환을 위해 북쪽으로 진군해서 프랑스에선 멀어졌지만 블뤼허의 3군은 베르됭과 낭시 방향에서 10만 병력으로 역시 진군 중이었고, 나폴레옹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6만 7천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특히 예비병력이라고 해봐야 훈련조차 마치지 못한 민병대 3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1814년 1월 19일에는 슈바르첸베르크의 동맹군 1군에 부르고뉴의 디종이 함락되었다. 남쪽에서는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포르투갈-스페인 연합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로 진격하고 있었다. 1월 22일엔 블뤼허가 마른강까지 진격했다. 슈바르첸베르크는 나폴레옹과의 협상이 시작되었단 소식에 1월 23일까지 진격을 멈췄다. 나폴레옹은 이 상황에서까지 국가총동원령의 선포를 거부했다.
"내가 쓰러진들 혁명가들에게 프랑스를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내가 프랑스를 구해내지 않았는가!"

1월 24일 모르티에와 블뤼허가 바르쉬르오브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무승부로 끝났다. 나폴레옹은 1월 29일 블뤼허를 브리엔 전투에서 격파하고 5만 4천 명의 병력으로 계속 추격했으나, 눈보라 때문에 블뤼허가 슈바르첸베르크와 합류한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블뤼허는 11만까지 늘어난 병력으로 라로티에르에서 반전하여 추격에 전념하던 나폴레옹을 먼저 후려쳤다. 2배가 넘는 적군에게 얻어 맞고도 피해는 쌍방 6천명 수준이었으니 전투 하나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결과였으나, 한 명 한 명이 귀중한 프랑스군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피해였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병사들이 집단으로 탈영하여 4천 명을 추가로 잃었다. 나폴레옹은 2월 3일 겨우 트루아로 달아났다.

나폴레옹은 샤티용쉬르센 회담에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적이 분산되었다는 소식에 다시 요격에 나서기로 했다. 나폴레옹은 마르몽과 우디노가 블뤼허를 저지하는 동안 보헤미아 군대를 타격하기로 했다. 마르몽이 아르시쉬르오브에서 바이에른 군대를 격파했고 그루시가 트루아에서 러시아 군대를 물리쳤으며 비트리와 상스에서도 프랑스군이 이겼다. 하지만 이 때문에 동맹군은 파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블뤼허는 파리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와 있었다.

나폴레옹과 동맹군 사절이 샤티용쉬르센 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동맹군은 1792년 국경선을 제안했고 나폴레옹은 또 거부하면서 협상은 파토난다. 이후 나폴레옹은 경험이 부족한 젊은 신병들을 이끌고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2월 10-14일에 벌어진 6일 전역은 나폴레옹이 부족한 전력으로 거둔 나폴레옹 사상 최고의 작전이라고 평가받는데, 4번의 전투에서 대프랑스 동맹을 전투에서 이겼다. 2월 10일 나폴레옹은 샹포베르의 프로이센군 선봉 4천명을 섬멸하면서 고작 200명의 피해만 입었고 2월 11일 몽미라유에서 프로이센의 자켄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 군대를 저지, 모르티에와 함께 망치와 모루 전술을 이용하여 끝장냈고 4천명의 사상자와 3천명의 포로를 얻어냈으며 피해는 고작 2천명밖에 입지 않았다. 2월 12일의 샤토티에리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요르크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도 습격하여 13일까지 6천명이나 되는 프로이센과 러시아 군대를 섬멸했지만 나폴레옹이 잃은 병력은 6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2월 14일 보샹 전투에서도 나폴레옹은 승리했으며, 600명의 피해만 입고 7천명이나 되는 프로이센 군대를 박살내버렸다. 이어 벌어진 모르망-발주앙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6만명의 병력으로 슈바르첸베르크의 프로이센 군대를 습격하여 6천명의 피해를 안겼다. 이때 나폴레옹의 피해는 2000명이었다. 이어 2월 21일에 메리쉬르센에서도 나폴레옹이 이겼다. 통틀어 나폴레옹은 3400을 잃고, 동맹은 17,000 병력을 잃었다.

이러한 연전연승 때문에 나폴레옹이 조금만 잘했어도 동맹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 거란 일부 의견도 있지만, 이미 대세가 너무 기울어진 상태였다. 특히 파리가 위협당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2월 13일엔 블뤼허를 직접 격파할 기회까지도 있었으나 이미 사방이 동맹군인지라 그 기회를 버려야만 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러시아 제국은 즉각 블뤼허에게 그가 잃은 것보다 훨씬 많은 3만명의 증원군을 보내주어 나폴레옹의 승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의 승리는 과거 나폴레옹이 스페인, 러시아에서 고전한 이유와 동일하게 내선과 보급의 이점과 지형 민심등의 요소로 방어자가 극히 유리할수밖에 없는 요인을 간과 함이다. 6일전역의 첫 승리는 낯선 지형에서 행군중인 적을 기습해서 이뤄낸 성과고 나머지 전투는 소소한 성과로 큰 영향을 주기 어려웠다. 이전의 러시아아와 독일 전역에서 하루에 몇만씩을 잃어도 전쟁이 지속되었고 결국엔 전술적으로 이긴 프랑스가 전역에서 졌는데 고작 14,000정도 더 전투피해 줬다고 이길리가? 그리고 속된말로 똥개도 자기 구역에선 50%로는 먹고 들어가는데, 하물며 나폴레옹이면 당연히 더 잘 싸울수 밖에.

6.2. 쇼몽 회담과 라옹 전투

하지만 동맹군이라고 사정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동맹군 수뇌부는 또 내부적인 문제에 시달렸는데 러시아군은 1812년부터 전역에 참전하여 매우 지친 상황에다가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도 라인강을 넘으면서 보급 문제와 사기 문제로 매우 지쳤기 때문에 전투 열의가 매우 떨어진 것. 더욱이 프랑스에서의 낯선 지형과 민심 그리고 나폴레옹의 격렬한 저항에 일부 동맹국에서는 강화를 고려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이 8일 동안 7번의 대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는 것을 본 동맹군 수뇌부는 나폴레옹에게 1792년 국경을 수용한다면 전쟁을 끝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그간의 승리에 매우 고무된 상태였던데다가 조금만 있으면 슈바르첸베르크를 트루아에서 격파할 수 있으리라 믿어 거절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블뤼허와 슈바르첸베르크가 합류하여 10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단 소식에 거절을 철회하고 1792년 국경선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며, 다른 한편으론 장인어른을 구워삶아서 강화 떡밥을 뿌렸지만, 이미 나폴레옹에 대한 불신이 깊은 동맹국의 영국 대표 캐슬레이 자작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강력한 반발로 동맹군은 1792년 국경선조차도 철회해 버렸다.

2월 22일 슈바르첸베르크와 블뤼허가 트루아에서 철수하여 랑그르로 철수하는 사이에 숨을 고른 나폴레옹은 직접 트루아로 입성하여 7만 4천의 병력을 긁어 모았다. 그 사이에 동맹군은 다시 전의를 다졌다. 2월 25일 바르쉬르오브 회담과 3월 1일 쇼몽 회담의 결과, 영국은 동맹군이 20년간 전쟁할 비용인 500만 파운드를 제공하겠다고 결정했다.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와의 단독 강화 떡밥 등은 모두 물건너간 것이 되었다. 그 사이에 블뤼허는 2월 마지막 주에 파리로 진군하기 시작했고 파리의 민심은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마르몽과 모르티에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블뤼허를 저지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우디노, 마크도날, 켈레르만, 제라르에겐 슈바르첸베르크를 상대하게 했다. 하지만 2월 27일 바르쉬르오브 전투에서 우디노는 슈바르첸베르크에게 패배했고 블뤼허를 저지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블뤼허는 나폴레옹의 추격을 벗어나 뷜로가 이끄는 증원군과 합류해서, 10만 대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마크도날은 트루아를 잃고 퇴각했고 빡친 나폴레옹은 3월 7일 크라온에서 고작 4만의 병력으로 블뤼허를 공격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네 원수가 대포가 도착하기도 전에 돌격하는 등의 개삽질 때문에 블뤼허를 격파하는데 실패했다. 양측 모두 5천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고 동맹군은 일단 라옹으로 퇴각했다. 나폴레옹은 정보 부족으로 동맹군의 퇴각을 블뤼허의 후위대 격파로 해석하여 3월 9일 라옹으로 가 다시 한번 블뤼허와 싸웠다. 나폴레옹은 마르몽에게 합류할 것을 명령했지만 마르몽의 6군단은 무방비 상태로 전진하다가 요르크의 습격에 개발살났고 나폴레옹은 피같은 병력 4천명을 잃고 마르몽의 합류는 저지되었다.

3월 10일 라옹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병력 열세로 큰 위기에 처했으나 아파서 누워버린 블뤼허의 대리인 그나이제나우가 나폴레옹을 두려워하여 나폴레옹의 병력을 섬멸하는데는 실패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병력 열세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아송으로 퇴각했는데 그는 이미 6천명의 피해를 입은 후였다. 동맹군의 피해는 2천명에 불과했다. 수적열세도 뼈아팠지만 모든 전선을 나폴레옹이 관리할 수 없다는 문제가 컸다. 그밖에 전선에서도 프랑스 북부전선은 저지대 지역은 몽땅 탈환당해 전선은 릴(Lille)지역까지 밀려났고, 프랑스 동부 국경 수비대는 대불동맹 병력에 관통당해 고립무원 처지에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은 이탈리아에서 고전 중이었으며 남서부에선 술트가 웰링턴에 털리고 있었다.

이쯤되면 이미 프랑스 민심은 나폴레옹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나폴레옹의 끊임없는 증세와 징병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삶은 파탄날 지경이었고 나폴레옹을 지지하던 명사들의 아들들까지 그간 대리인을 사서 보낸 것도 아무 보람 없이 닥치는 대로 전쟁에 끌려가고 있었다. 이미 프랑스의 누적 징병 기피자들은 100만명을 돌파했고 1814년 탈영자만 18만에 달했다. 루이 18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혁명과 제국에서 처분된 국유재산에 관여하지 않음으로 신질서를 인정하겠다고 선포하여,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확보했고 부르봉 왕정복고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더군나 보르도에선 이미 왕당파들이 도시를 탈환하여 부르봉 왕조의 백합 깃발이 걸리고, 툴루즈도 부르봉 왕조를 지지했다. 심지어 파리에서도 보나파르트 지지파들조차 왕정복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지경이었다.

사실 나폴레옹이 잘 나가던 1807년 경부터 국사는 내팽겨치고 전쟁광질에만 미쳐서 나라를 파멸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탈레랑과 푸셰가 쿠데타로 뮈라를 황제로 옹립할 음모까지 꾸몄는데 앞서서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경제는 파탄이 나고, 병력을 수십만이나 갈아먹고 기혼자에 나이제한까지 없애가며 무차별 징집과 높은 세금으로 민심은 진작에 떠난 상황이었다. 프랑스 전국에 과부나 아들잃은 부모가 셀 수 없을 지경인데 황제 만세 소리가 나올 리가 있나..... 결국 참다못한 입법원은 나폴레옹의 전쟁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나폴레옹은 격분하여 만약 까불면 프랑스를 자코뱅들에게 넘겨주겠다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대불동맹보다 자코뱅을 더 혐오했으므로 당연히 실제로 그러진 않았다.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가 그랬던 것처럼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아주 막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지방에 남은 자코뱅 세력들의 부활의 단초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무력을 바탕으로 판세를 되돌리려 했다. 그래서 일어난 일이 위의 6일 전역과 블뤼허 추격전.

6.3. 아르시쉬르오브 전투와 파리 진군

라옹 전투 직후 콜랭쿠르는 3월 17일까지 나폴레옹이 강화에 응한다면 1792년 국경을 보장해주겠다는 동맹군의 제안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나폴레옹은 오주로에게 독전을 요구하며 제발 카스틸리오네의 위대한 며칠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오주로는 끝내 오지 않았다. 이 와중에 국가참사원과 국민방위대가 황제에게 평화를 촉구한단 소식을 마리 루이즈로부터 접한 나폴레옹은 분노로 날뛰며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자신을 배신하려 한다고 형을 저주했다.

나폴레옹은 생프리스트 장군이 지휘하는 동맹군의 랭스 점령을 저지하면서 6천명의 피해를 안겨주며 700명만 잃는 기염을 토하면서 자신의 능력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입증했다. 하지만 블뤼허와 슈바르첸베르크의 파리 공략을 결정적으로 격퇴하진 못하였고 나폴레옹은 트루아를 점령하여 슈바르첸베르크를 저지하는 한편 블뤼허의 병참선을 끊어 그를 저지한 다음에 베르됭과 메스의 프랑스군과 합세한단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슈바르첸베르크는 퇴각하는 척 하다가 갑자기 공세로 전환했고 3월 20일의 아르시쉬르오브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마르몽이 또 깨지면서 다시 나폴레옹은 중과부적에 처했고 나폴레옹은 바이에른 병력을 격퇴하는 와중에 대포를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결국 8만명의 보헤미아 병력이 블뤼허를 지원하기 위해 나타나자 나폴레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여겨 우디노에게 2만 8천명의 병력을 주고 퇴각길에 올랐다. 전투는 21일까지 이어졌고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고 간신히 다리를 폭파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3천명의 병력을 잃었고 동맹군 피해는 4천이었다. 나폴레옹은 아르시쉬르오브에서 죽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근성은 어디 가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또 다시 동맹군 병참선을 끊기 위하여 생디지에로 진군했다. 이에 동맹군은 파리로 진군하던 병력을 물려 나폴레옹의 의도에 부합하는 듯 했으나 나폴레옹이 마리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하면서 전략을 바꾸었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프랑스 안에 있는 강력한 부르봉 왕당파의 존재를 인정하였으며 또한 자신의 전략에 대해서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이 때문에 동맹군은 프랑스 안의 부르봉 지지가 강하다는 탈레랑의 주장이 거짓부렁이가 아니란 것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알렉산드르 1세가 파리 진격을 주장, 18만명의 동맹군이 파리로 진군하였다. 마르몽과 모르티에의 저지 시도는 3월 25일 라페르샹프누아즈에서 실패했다. 나폴레옹은 국가총동원령을 4일간 고민하며 시간을 낭비했고 3월 27일에야 파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7. 몰락

나를 쓰러뜨릴 총알은 아직 오지 않았다.<1814년 나폴레옹>

대불동맹국이 승리를 확신하게 된건 3월 하순 파리에서 내무대신이 나폴레옹에게 보낸 문서를 가로채고 나서였다. 문서 내용은..
금고도 무기고도 탄약고도 텅 비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은 자원이 없습니다. 국민들은 낙담과 불만에 차 있습니다. 그들은 뭐가 어찌되었건 평화만을 바랍니다. 황권의 적대 세력들은 대중의 동요를 부추기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잠재적이지만 황제께서 연합군을 파리로부터 멀리 밀어내지 못한다면, 이들을 진압할 기회도 사라질 것입니다.

한편 문서가 동맹국에 들어갔는지 여부도 모르는 나폴레옹은 내무대신과의 바람과 거리가 멀게 적을 격퇴하지 못하고 파리로 돌아오고 있었고, 적군은 파리와 불과 40킬로 근방까지 진격한 상황이었다. 3월 29일에는 황후인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의 유일한 적자 로마왕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했고, 다음날엔 병력을 모으라던 나폴레옹의 명령을 무시하고 탈레랑과 항복 조건에 대해서만 협상하던 조제프와 정부관료들도 탈출했다. 3월 30일 동맹군을 저지하기 위한 몽마르트르 발치 전투에서 마르몽과 모르티에는 패배했고 몽세도 포르트드클리시에서 패하고, 벨빌과 샤론의 국민방위대도 패배했다. 동맹군은 3만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긴 했으나 3월 30일 마르몽의 항복을 받아내고 유유히 파리로 무혈입성했다.[20]

퐁텐블로까지 쫓아와 파리를 구하려던 나폴레옹은 파리가 함락되었단 소식에 30만 파리 시민이 어떻게 석달도 버티지 못했느냐며 망연자실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앙리 우세는 파리가 24시간만 동맹군에 저항했으면 나폴레옹이 동맹군의 병참을 끊어 동맹군의 파리 포위를 풀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으나 대부분의 사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배신을 해서 포기를 해서 말을 안들어서 if를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세는 이미 심각하게 기울었다. 전국의 민심은 하루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라는 것이었고, 파리는 단 한순간의 저항도 없이 동맹군의 손에 떨어졌다.

3월 31일 센 지사 질베르 샤브롤과 파리 경찰국장 에티엔드니 파스키에가 파리로 입성한 차르와 프로이센 국왕을 영접했다. 센 도의회는 부르봉 왕조 복고를 호소했고 탈레랑은 주도권 상실을 우려하여 그들의 주장이 모니퇴르 지에 실리지 못하도록 막는 한편 4월 1일에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4월 3일 프랑스 원로원은 탈레랑 주도로 나폴레옹을 폐위시켰다. 그리고 마리 루이즈와 로마왕의 권력 승계도 막았다. 이 와중에도 프랑스 곳곳이 무너졌다. 3월 12일 보르도의 항복에 이어 3월 21일 리옹이 함락되었고 3월 24일 술트는 툴루즈로 퇴각했으나 3월 27일 웰링턴에게 포위되었다. 술트는 4월 10일 툴루즈를 버리고 퇴각했다. 4월 12일에 툴루즈로 입성한 웰링턴은 파리가 함락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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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동맹군은 더 이상 나폴레옹을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건설한 스페인에서 독일에 이르는 제국은 커녕, 자연국경조차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퐁텐블로로 내려가 6만명의 병력을 결집, 다시 일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근성쟁이 나폴레옹과는 달리 원수들은 더이상 승산이 없고 이미 다 끝났음을 알고는 4월 4일 네, 몽셰, 마크도날, 르페브르가 이끄는 원수 대표단이 나폴레옹을 찾아왔다. 그들은 나폴레옹에게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말했다. 마크도날이 "파리가 모스크바 꼴이 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했고 네가 "군대는 파리로 진군하지 않을 것 입니다." 라고 했다. 격분한 나폴레옹은 "군대는 내 명령에만 복종할 것이다."라고 외쳤으나 네가 "폐하. 군대는 지휘관들의 말을 따를 것입니다." 라고 맞받아치며 동맹군과 협상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당일로 로마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시켜 달라는 조건으로 하야할 뜻을 내비쳤다. 콜랭쿠르, 네, 마르몽, 마크도날로 구성된 대표단이 이 제안을 대불동맹군 수뇌부에게 전달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이 마지막까지 발악할 가능성을 염려하여 나폴레옹 2세의 옹립을 찬성했으나 탈레랑이 마르몽과 결탁하여 이미 군대가 황제에게 등돌렸다고 전달하게 했고 콜랭쿠르의 최후의 협상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동맹군 대표단은 나폴레옹의 무조건 하야만이 답이라는 것을 황제에게 전달했고 나폴레옹은 4월 6일 퇴위했다. 같은날 프랑스 원로원은 부르봉 왕조를 복고했다. 4월 11일에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됨으로 나폴레옹은 전직 황제이며 엘바의 영주가 되었고 200만 프랑의 연금을 보장받았다. 마리 루이즈는 파르마 여공작이 되었고 계승권은 로마왕에게 주어졌다. 보나파르트 왕조의 끝이었다. 협상이 끝나자 동맹군은 각자의 나라로 철수한다.

8. 백일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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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참고문헌


[1] Richard Holmes , The Napoleonic Wars Experience (2006)[2] 나폴레옹은 협약을 맺기 위해 온 메테르니히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한답시고 "프랑스인은 별로 죽지 않았다. 폴란드인과 독일인이 더 많이 죽었지."라고 호기롭게 말했는데, 하필 독일계 국가인 오스트리아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폐하! 그 말을 지금 독일 사람한테 하시는 겁니까?"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회고록에서도 자신은 러시아에서 15만을 잃었으나 그중 4만 명만 프랑스인이었다며 정신승리했다. 현대 역사학계의 추산으론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잃은 병력은 15만보단 일단 훨씬 많고 총병력 손실은 35~40만 정도로 추산한다.[3] 이후에도 현역에서 제대하면 4년간의 예비군 5년간의 란트베어로 편성한다.[4]벨라루스 스마르혼(Смаргонь).[5] 이에 다부는 뮈라에게 당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괴물 덕 아니냐고 말했다.[6] 대신 라인강 좌안 대토보상으로 영국의 동군연합 하노버를 프랑스에게서 받는 건 포기하고 러시아에게 바르샤바 등 폴란드를 양보한다는 조건. 이 때문에 빈 회의에서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지지했다.[7] 프랭크 매들린의 나폴레옹 평전 887페이지.[8] 물론 당시 러시아는 4280만의 인구를 가져 그 당시도 현재의 중국 취급받는 물량으로 인정받았지만 행정력이 모든 국민에게 미치지 못했고 프랑스와는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에 유럽에서 인구와 영토를 논의할 때 항상 러시아는 제외하는 게 보통이다. 프랑스의 최대 적국인 영국의 인구도 1100만에 불과했다.[9] 현재 추산으로는 1806년 프랑스 군의 징집 평균 연령은 21세였으나 1813년에는 18세에 불과했다.[10] 그러다보니 이 시기엔 프랑스의 농가에서 아들을 숨기느라 헛간에서 먹고 자는 거나 가짜 결혼으로 기혼자 특혜로 징집을 피하는게 대유행했고 막장 테크를 탄 1814년엔 왕당파 지지가 강한 시골 지역에선 모병관들이 징병을 막으려는 농민들에게 얻어맞고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 징집할 정도였다. 결국은 기혼자 혜택도 박탈하고 연령 상한선까지 올려버리면서 40만을 또 징집한다. 이때 나폴레옹에 대한 프랑스의 민심은 안 봐도 비디오[11] 특히 러시아 원정에서 며칠 만에 말이 무려 3만 마리나 얼어죽어 기병들이 걸어다녀야 하고 포병과 수송대는 대포와 짐을 이끌 말이 없어 사람이 직접 끌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12] 정작 형인 조제프 본인은 나폴리 왕 자리에 만족하고 있었고 스페인으로 떠나기 싫어했지만 나폴레옹이 반강제로 스페인 왕위를 떠넘긴 것이었고, 왕노릇 하고 싶어했던 조아킴 뮈라에게 나폴리 왕위를 주려는 목적이 컸다. 스페인을 떠맡은 조제프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 웰링턴에게 탈탈 털렸고 뮈라는 러시아에서 삽질하다가 나중에 나폴레옹을 통수치는 등 나폴레옹의 이 선택은 모든 측면에서 실패했다.[13] 출처: A. S. Britt, "The Wars of Napoleon", p. 127.[14] 하지만 간과하면 안되는 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에 있는 프랑스군은 연합군을 크게 웃도는 숫자인 무려 20만명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웰링턴의 북부 전선을 상대로 투입된 숫자이다.[15] 오늘날에는 '연합 작전이라면 당연한 내용 아닌가?' 싶은 사항들이지만 당시에는 따로 합의를 해두어야 할 만큼 생소한 일이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영국 모두 꿍꿍이와 잇속이 다른데다가, 특히 러시아 장군들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에 하도 작살이 나서 독일인을 '겁쟁이 소시지들'이라 경멸한데다가 이 시절까지 이런 환경에서의 연합작전은 생소한 거라 군은 오직 자국 군주에게만 충성하고 다른 명령권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16] 슈바르첸베르크 원수는 프란츠 2세에게 편지에서 엑스맨 알렉산드르 1세는 사령부에서 할 일 없이 놀고 먹는 러시안 똥별들의 중상모략과 지휘간섭을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항의했다.[17] 동맹군도 2만이 증원되었다.[18] 실은 메테르니히가 1813년 3월부터 구워 삶았다가 이제서야 효과를 본것.[19] 나폴레옹이 이렇게 드레스덴에 집착한 이유는 당시 드레스덴은 작센 왕국의 수도로 포기하는 즉시 라인 동맹의 양대축 중 하나인 작센 왕국이 무너지며 동군연합바르샤바 공국을 포기하는 셈이다. 즉 나폴레옹의 모든 동맹국이 등을 돌리는 셈이 된다. 실제로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그렇게 되었다. 즉 전술적 가치가 없다 해도 나폴레옹에건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지점이었다.[20] 참고로 이 때 파리에는 수많은 나라에서 온 다국적 대불동맹군이 진주했다. 그중 러시아군들은 파리 곳곳에 널린 카페식당으로 착각하고 들어가서 요리를 내오라며 진상을 부렸는데, 이걸 계기로 간단한 식사와 술을 판매하는 노천식당 비스트로가 탄생했다는 설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