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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f4f4f> | |||
출생 | 1811년 3월 20일 | ||
프랑스 제1제국 파리 튈르리 궁전 | |||
사망 | 1832년 7월 22일 (향년 21세) | ||
오스트리아 제국 빈 쇤브룬 궁전 | |||
재위기간 | 프랑스인의 황제 (논란) | ||
1815년 6월 22일 ~ 1815년 7월 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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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나폴레옹 프랑수아 조제프 샤를 보나파르트 (Napoléon François Joseph Charles Bonaparte) | ||
아버지 | 나폴레옹 1세 | ||
어머니 | 파르마 여공작 마리아 루이사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180cm, O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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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왕 나폴레옹 2세 / Napoleon II, Roi de Rome라이히슈타트공 프란츠 / Franz Joseph Karl, der Herzog von Reichstadt
프랑스 제1제국의 로마 왕[1]이자 황태자, 이탈리아 왕국의 왕세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라이히슈타트 공작. 실제 재위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프랑스인의 황제로 간주되었다.[2]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와 그의 두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의 장남이자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적자이며 나폴레옹이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늦둥이이다.[3]
태어난 직후 프랑스 제1제국의 황태자(로마왕)로 봉해졌다. 그러나 그의 나이 세 살 때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여 엘바 섬에 유배됐고, 혼란한 정국 속에 어머니인 마리 루이즈와 함께 프랑스 별궁에서 고립되어 위험에 처했으나, 외할아버지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로 진주하여 나폴레옹 2세 모자를 구출하여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로 데려갔다. 이후 빈 호프부르크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프란츠 2세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지만 당시 오스트리아의 재상 겸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그를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보고 견제했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받으면서 자랐다.
17세인 1828년 티롤 연대 대위가 되어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 생활은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결국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과 폐렴으로 요절했다.
본명은 나폴레옹 프랑수아 샤를 조제프 보나파르트(Napoléon François Charles Joseph Bonaparte)이며, 아버지인 나폴레옹 1세는 이것을 줄여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를 아들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후 네살 때 프란츠 2세가 데려다가 키우면서 본인과 같은 프란츠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보통 민감한 이름인 나폴레옹과 보나파르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미들 네임들을 독일어로 하면서 동시에 순서까지 바꾼 요제프 카를 프란츠(Joseph Karl Franz) 공작이라고 불렀다. Joseph Karl Franz는 공교롭게도 프란츠 2세(풀네임: Franz Joseph Karl von Habsburg-Lothringen)의 이름과 같다. 나폴레옹 1세의 아들이자 프란츠 2세의 외손자인 그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폴레온 프란츠 보나파르테(Napoleon Franz Bonaparte)'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물론 워낙 출신이 고명했기 때문에 당대에는 그의 이름이 불리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가 가진 작위가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세 살 때까지는 로마 왕(Roi de Rome) 겸 프랑스 황태자(princes impériaux de France)로, 제국이 붕괴되어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로 간 이후에는 어머니인 마리 루이즈의 작위[4]에서 따온 파르마 공자(Duca di Parma, Piacenza e Guastalla)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기간 동안은 프랑스 황태자(prince impérial)로[5], 7살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라이히슈타트 공작(Herzog von Reichstadt)으로 불렸다. 로마왕, 라이히슈타트 공작 두 작위 모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부여되지 않은 작위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대신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다.
2. 황제 재위?
결론부터 말하자면 루이 17세와 유사하게 부친인 전임자가 퇴위되고 세워진 과도기 정부에 의해 명목상으로 재위한 어린 허수아비 황제였고, 실질적으로 통치를 한 적이 없지만 후임자인 루이 18세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인정받은 사실상 추존 황제에 가깝다.[6]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직후 승리한 연합국은 나폴레옹 1세를 퇴위시키고 루이 18세를 복위시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패전한 나폴레옹 정부는 혼란에 빠졌고 제국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갈등이 재점화되었다.
6월 21일 라파예트 후작이 주도로 하원에서 나폴레옹 1세의 퇴진을 언급하는 결의안이 통과된다.라파예트 후작이 제안한 결의안, 1815년 6월 21일 이후 내각과 의회 양원은 나폴레옹 1세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한편 나폴레옹 1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진영에서도 나폴레옹 1세만 퇴위시키고 나폴레옹 2세의 섭정을 통해 입헌군주정을 실시하려는 '섭정파'와, 공화국 정부의 재건을 바라는 '공화파',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의 복위를 지지하는 '왕정복고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보나파르트 가문원들은 황실과 제국의 존속을 위해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하라며 나폴레옹 1세를 설득했고, 나폴레옹 1세를 지지하는 군부의 쿠데타를 우려하던 프랑스 의회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연합국은 파리 조약 준수를 요구하며 부르봉 왕조 복고를 요구하며 맹렬히 공격해 오고 있었고 프랑스 의회는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6월 22일, 나폴레옹 1세가 퇴위 및 양위를 선언하고 파리를 떠나 피신했다. 프랑스 의회 양원은 나폴레옹 1세의 퇴위(양위) 칙서를 통과시키고 섭정을 위한 임시정부를 선임할 5인의 정부 위원회를 선출한다.
6월 23일, 5인의 정부 위원회는 조제프 푸셰를 의장으로 선임하고, 라자르 카르노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임시정부를 구성한다.[7]# 임시정부는 7월 8일 루이 18세가 복위할 때까지 2주간 집권하였다. 그동안 임시정부는 나폴레옹 2세 측에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6월 24일, 임시정부는 연합국과의 협상을 위한 전권대사를 파견했다. 아울러 임시정부는 국민들에게 나폴레옹 1세의 퇴위 및 그의 정치 생명의 종말, 그의 아들(his son)의 계승, 새로운 헌법 제정 예정,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1815년 6월 24일 파리 임시정부 선포. 하지만 임시정부는 나폴레옹 2세 측에게 제위와 관련된 어떤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으며, 나폴레옹 1세의 아들의 즉위와 관련된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6월 25일, 전 황제 나폴레옹 1세는 피신처인 말메종에서 군부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6월 26일, 루이 18세가 캉브레(Cambrai)에 도착하여 백일천하 기간 동안 '선동자'를 제외하고 나폴레옹에게 부역한 자들을 박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루이 18세는 진작부터 자신이 복위할 경우 언론, 종교,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전격 실시할 것이라고 천명했기 때문에 왕정복고에 대한 지지 여론도 높아지고 있었다. 한편 의장 조제프 푸셰는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공화국' 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군부의 쿠데타 우려가 낮음을 확인한 푸셰 임시정부는 같은 날 나폴레옹 2세를 부정하고 '프랑스 국민'의 주권을 언급하는 선포를 발표한다. 1815년 6월 26일 파리 임시정부 선포
6월 29일, 프랑스 하원의원 대표 5인이 차기 왕위를 논의하기 위해 엽합국의 웰링턴 사령관을 방문하였다. 웰링턴은 프랑스 의회 대표단에게 루이 18세의 대의를 받들라고 명령(order)했다.
7월 3일, 임시정부는 연합국과 생클루(Saint-Cloud) 협약에 서명했다. 이 협약을 통해 임시정부는 웰링턴이 이끄는 연합국 군대에 공식 항복했으며, 연합국과 프랑스간의 적대관계는 종식되었다. 이때 임시정부 의장 푸셰가 루이 18세 측과 협상을 통해 정권을 약속받았다는 의혹이 있고, 실제로 그는 입각했다.
7월 7일, 연합국이 파리에 입성하였다. 임시정부는 해산되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선언되었다.
7월 8일, 루이 18세가 파리에 입성해 복위하였다.
위 일련의 기간 동안 나폴레옹 2세는 프랑스가 아닌 오스트리아에 있었고 겨우 4살이었다. 따라서 나폴레옹 2세는 살아있던 당대에 그는 프랑스 제1제국 시절에는 로마왕으로, 이후에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로 불렸을 뿐 생전에 (주니어라는 의미의 '2세'가 아닌) '황제 나폴레옹 2세'로 언급된 적은 전혀 없었다.6월 21일 라파예트 후작이 주도로 하원에서 나폴레옹 1세의 퇴진을 언급하는 결의안이 통과된다.라파예트 후작이 제안한 결의안, 1815년 6월 21일 이후 내각과 의회 양원은 나폴레옹 1세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한편 나폴레옹 1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진영에서도 나폴레옹 1세만 퇴위시키고 나폴레옹 2세의 섭정을 통해 입헌군주정을 실시하려는 '섭정파'와, 공화국 정부의 재건을 바라는 '공화파',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의 복위를 지지하는 '왕정복고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보나파르트 가문원들은 황실과 제국의 존속을 위해 나폴레옹 2세에게 양위하라며 나폴레옹 1세를 설득했고, 나폴레옹 1세를 지지하는 군부의 쿠데타를 우려하던 프랑스 의회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연합국은 파리 조약 준수를 요구하며 부르봉 왕조 복고를 요구하며 맹렬히 공격해 오고 있었고 프랑스 의회는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6월 22일, 나폴레옹 1세가 퇴위 및 양위를 선언하고 파리를 떠나 피신했다. 프랑스 의회 양원은 나폴레옹 1세의 퇴위(양위) 칙서를 통과시키고 섭정을 위한 임시정부를 선임할 5인의 정부 위원회를 선출한다.
6월 23일, 5인의 정부 위원회는 조제프 푸셰를 의장으로 선임하고, 라자르 카르노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임시정부를 구성한다.[7]# 임시정부는 7월 8일 루이 18세가 복위할 때까지 2주간 집권하였다. 그동안 임시정부는 나폴레옹 2세 측에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6월 24일, 임시정부는 연합국과의 협상을 위한 전권대사를 파견했다. 아울러 임시정부는 국민들에게 나폴레옹 1세의 퇴위 및 그의 정치 생명의 종말, 그의 아들(his son)의 계승, 새로운 헌법 제정 예정,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1815년 6월 24일 파리 임시정부 선포. 하지만 임시정부는 나폴레옹 2세 측에게 제위와 관련된 어떤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으며, 나폴레옹 1세의 아들의 즉위와 관련된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6월 25일, 전 황제 나폴레옹 1세는 피신처인 말메종에서 군부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6월 26일, 루이 18세가 캉브레(Cambrai)에 도착하여 백일천하 기간 동안 '선동자'를 제외하고 나폴레옹에게 부역한 자들을 박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루이 18세는 진작부터 자신이 복위할 경우 언론, 종교,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전격 실시할 것이라고 천명했기 때문에 왕정복고에 대한 지지 여론도 높아지고 있었다. 한편 의장 조제프 푸셰는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공화국' 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군부의 쿠데타 우려가 낮음을 확인한 푸셰 임시정부는 같은 날 나폴레옹 2세를 부정하고 '프랑스 국민'의 주권을 언급하는 선포를 발표한다. 1815년 6월 26일 파리 임시정부 선포
6월 29일, 프랑스 하원의원 대표 5인이 차기 왕위를 논의하기 위해 엽합국의 웰링턴 사령관을 방문하였다. 웰링턴은 프랑스 의회 대표단에게 루이 18세의 대의를 받들라고 명령(order)했다.
7월 3일, 임시정부는 연합국과 생클루(Saint-Cloud) 협약에 서명했다. 이 협약을 통해 임시정부는 웰링턴이 이끄는 연합국 군대에 공식 항복했으며, 연합국과 프랑스간의 적대관계는 종식되었다. 이때 임시정부 의장 푸셰가 루이 18세 측과 협상을 통해 정권을 약속받았다는 의혹이 있고, 실제로 그는 입각했다.
7월 7일, 연합국이 파리에 입성하였다. 임시정부는 해산되고, 부르봉 왕정복고가 선언되었다.
7월 8일, 루이 18세가 파리에 입성해 복위하였다.
나폴레옹 1세 몰락 후 당대 프랑스에서 그는 주로 샤를 보나파르트(Charles Bonaparte) 혹은 샤를 나폴레옹으로 불렸고 영미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찰스 보나파르트, 찰스 나폴레온으로 불렸다.
황제로서 재위한 적이 없는 그가 나폴레옹 2세로 불리게 된 것은 사촌이자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 3세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의 본명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황제로 즉위하며 나폴레옹 3세라고 칭했는데, 이는 보나파르트 왕조의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정통성이 후사 없이 사망한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거쳐 자신에게 왔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제위에 오른 적이 없는 그를 나폴레옹 2세로 간주하고 자신을 나폴레옹 3세로 칭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로마왕 샤를 보나파르트 또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라 불리던 인물이 1852년 나폴레옹 3세 즉위 이후 나폴레옹 2세라고 불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황제가 된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그를 나폴레옹 2세라 칭하지 않고, 프랑스 황태자 시절이나 오스트리아 시절의 작위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황실을 오가면서 복잡한 이름과 작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복잡함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폴레옹 2세라 부르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게다가 나폴레옹 2세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미국 공화당 출신의 정치인 찰스 조지프 보나파르트(Charles Joseph Bonaparte)[8]가 미국 해군 장관이 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철자만 보면 똑같기 때문에 이후 영미권을 중심으로 미국 정치인과 구별하기 위해 로마왕 및 라이히슈타트 공작이었던 이 인물을 나폴레옹 2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2세라 부르는 경우에도 황제가 아닌 "로마왕(황태자) 나폴레옹 2세"라 부른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빈에서 파리 앵발리드로 이장되었을 때도 "NAPOLEON II, ROI DE ROME(로마 왕 나폴레옹 2세)"이라고 각인했다.
3. 생애
3.1. 출생과 어린 시절
파리의 튈르리 궁에서 1811년에 나폴레옹 1세와 황후 마리 루이즈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레옹 1세가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늦둥이였던 그는 태어나면서 아버지로부터 로마 왕의 작위를 받았는데, 유일한 적자인 나폴레옹 2세의 황위계승 정당성을 갖게 하려는 목적에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제롬 등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제위 계승이 통째로 날아간 것에 이를 갈았다.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 2세의 양육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모성애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 왕족들은 어머니와 떨어져서 유모가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연패하면서 점차 파리로 포위망이 좁혀 오던 시기에 신하들도 점차 나폴레옹을 배신하는 와중에 흔들리는 프랑스 궁정에서 홀로 중심을 바로 잡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것은 마리 루이즈였다. 심지어 그녀는 파리 포위를 대비하여 피신하라는 나폴레옹의 명과 신하들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피신을 거부하고 파리를 사수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파리를 비우는 일은 부르봉 왕조의 부활에 절호의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나는 이대로 파리에 머무르는 것이 황제 부재시의 섭정을 맡은 프랑스 황후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급박한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당차게 행동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들 나폴레옹 2세가 제위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친정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이것이 실현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제국은 붕괴했고, 마리 루이즈는 어린 아들 나폴레옹 2세를 데리고 랑부예 성으로 이동했지만 랑부예가 이미 위험했기에 블루아 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814년 4월 8일,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퐁텐블로 조약으로 퇴위당하고 엘바 섬 유배행이 결정되었다.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눈물어린 호소로 아버지에게 요청했지만 프란츠 1세는 딸의 요청을 거절했다.[9]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에 가겠다고 했으나,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 애정이 없었던 것인지 오스트리아 황녀인 그녀를 의심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초라해진 처지를 스스로 부끄러워한 것인지 끝내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에게 가려고 했으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뒤늦게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의 진심을 알고 자신에게 돌아와달라고 했으나 이미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4월 13일에 랑부예 성에 갇혀있던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2세 모자를 구하기 위해 프란츠 2세가 직접 찾아왔다. 프란츠 2세의 결정으로 모자는 오스트리아 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로 송환된 이후로도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를 탈출하여 엘바 섬으로 가서 나폴레옹을 만날 궁리만 하고 있었고, 이를 우려한 메테르니히는 잘생긴 나이페르크 백작으로 하여금 그녀를 호위하게 했다. 메테르니히는 나이페르크 백작에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명령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곧 나이페르크 백작에게 빠져버린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을 완전히 잊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한 후 백일천하가 시작되었고, 나폴레옹은 아들이 보고 싶어 "이제 그만 돌아와 주오."라고 편지를 썼지만 그녀는 이미 나이페르크 백작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고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나폴레옹은 아들이라도 어떻게든 제위에 앉혀보자는 심정으로 6월 22일 퇴위를 선언하고 나폴레옹 2세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린 후 도피했다. 나폴레옹의 퇴위 선언 직후 프랑스 정부 위원회가 구성되어 정권을 인수했다. 위원회는 루이 18세가 복위할 때까지 2주간 프랑스를 임시로 통치했다. 위원회는 곧바로 피신해 있던 루이 18세에게 연락하여 복귀를 요청했고 루이 18세는 곧바로 나폴레옹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프랑스 여론 또한 오스트리아 황실의 어린아이가 새로 황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위원회는 나폴레옹 2세를 인정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2세가 머물고 있는 오스트리아 황실 측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2세의 보호자였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 또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루이 18세의 복위를 천명하고 있는 연합국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궁에 머물고 있던 4살의 나폴레옹 2세는 이러한 사태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연합군은 계속해서 파리를 향해 진격했고 마침내 7월 7일 파리에 입성했다. 7월 8일 마침내 연합국의 추대를 받아 루이 18세가 정식으로 복위했다.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이후에는 퍼스트 네임인 나폴레옹 대신 풀 네임인 나폴레옹 프랑수아 조제프 샤를에서 프랑수아를 독일어로 읽은 프란츠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 측과 독일, 오스트리아 쪽에서는 그의 이름을 '나폴레온 프란츠 보나파르테'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1816년 3월 7일 마리 루이즈가 파르마 공국의 통치권을 일임받게 되었다. 이로서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2세는 완전히 떨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5세.
1818년 프란츠 2세는 7세가 된 외손자 나폴레옹 프란츠에게 '라이히슈타트 공작' 작위를 내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이지만 외손인 관계로 대공(Erzherzog) 작위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후 그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로 불리게 된다.
1821년 그의 나이 10세 때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5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메테르니히가 이 소식을 전했을 때 나폴레옹 2세는 눈물을 쏟으며 들었다고 한다. 비록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였지만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10]
3.2. 소년 시절과 청년기
세살 때인 1814년 봄에 나폴레옹 1세가 엘바섬에 유배될 당시 외할아버지인 프란츠 2세가 빈 황궁에 데려오면서 이후로 쭉 호프부르크에서 자랐다. 특히 외조부 프란츠 2세는
하지만 빈에서 보낸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아이가 크면 훗날 나폴레옹 제국 부흥의 단초를 제공할지 모른다고 우려해 그의 생활을 궁정으로 제한하려 했고 이런 생활은 어린 시절 내내 계속되었다. 또한 메테르니히는 그가 독일어를 사용하고 독일어 책을 읽을 것을 권유하며 프랑스어나 프랑스어 책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 자신이 로마왕, 나폴레옹 2세라고 불린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는 "프란츠"라고 부를 때만 대답하기를 강요하는 메테르니히의 조치로 우울증에 걸렸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상황이 그의 우울증을 심화시켰다. 1817년에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 2세를 만나러 오기로 약속을 했지만, 나이페르크 백작의 사생아 알베르티나를 출산하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시 6살이었던 나폴레옹 2세는 그 말을 듣자 매우 슬피 울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18년 7월, 어머니가 파르마에서 빈에 올 것이라는 말에 나폴레옹 2세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때 만난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1819년 8월 9일 나이페르크 백작의 둘째 아이 굴리엘모를 출산하면서 모자의 만남은 연기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메테르니히의 프랑스어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와 아버지 나폴레옹 1세에 대해 깊은 애정을 품고 탐구했다. 프랑스어를 밤낮으로 공부했던 그는 궁정 도서관에서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라스 카즈가 쓴 "세인트헬레나의 기록"과 몽트랑 백작이 썼던 "회상록"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자기 아버지가 어떠한 인물인지 다시 확인한 그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과 전우들을 만나 부친의 무용담과 추억을 듣느라 밤을 샜다.
이 무렵 결핵에 걸렸다. 거기다 아버지 나폴레옹 1세를 닮고 싶다는 욕심에 무리하게 강행한 여러 군사 훈련들이 오히려 그의 몸을 망치는데 더욱 기여했다.(…)
1828년에는 아버지처럼 티롤 연대의 대위로 입대했지만 이듬해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은 후, 그의 유서를 통해 까발려진 진실을[12] 알게 된 나폴레옹 2세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13] 어머니가 남편이 살아있을 때부터 나이페르크 백작과 간통해 사생아까지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폴레옹 2세는 가장 친한 친구 프로케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조제핀 황후가 내 어머니셨으면, 우리 아버지는 세인트헬레나에서 묻힐 일도 없었을 테고, 나도 이곳 빈에 있지 않았을 거야. 우리 어머니는 매우 상냥하신 분이시지만, 너무 주변 인물들에게 휘둘려.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해. 그 여자는 내 아버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어."
나폴레옹 2세는 어머니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 커다란 증오를 품었으나 차마 그녀에게 악담을 할 수는 없었고 저런 팩트 폭력으로 신랄하게 때리는 쪽을 택했다.
3.3. 친구 프로케쉬, 그리고 죽음
1830년에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터진 후 일부에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나폴레옹 2세를 옹립하자는 목소리가 약간은 있었으나,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그를 오스트리아 공작으로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나이가 어려 정치경력이 없던지라 이는 불발되었다.오스트리아에서 유일한 친구였던 프로케쉬는 언제인가 『워털루 전기』라는 책에서 나폴레옹을 옹호했던 적이 있었고 이에 감동한 나폴레옹 2세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프로케쉬는 1832년 7월 21일 로마에 살고 있는 나폴레옹 2세의 친할머니 레티치아를 만나서 그의 근황을 전하고 "나폴레옹은 매우 훌륭한 청년이고,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레티치아는 매우 기뻐하며 "그 아이라면 아버지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지요. 머지않아 그 아이의 시대가 오고, 다시 프랑스의 왕좌에 오르게 될 것이라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케쉬가 레티치아를 만난 그날, 나폴레옹 2세는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날인 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2세는 쇤브룬 궁전에서 요절했다. 이 때 나이는 불과 21살. 이종사촌 동생 페드루의 브라질 황제 즉위와 6촌 동생 비토리오의 피에몬테 공 서임이 있은 지 1년 후의 일이었다. 위독해진 아들이 급하게 어머니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 루이즈가 빨리 달려와 아들의 최후를 지켰다.
나폴레옹 2세의 죽음.
나폴레옹 2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은 외조부 프란츠 1세뿐이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기억하는 궁정과 황실 친척들 사이에서 눈칫밥으로 연명하던 나폴레옹 2세는 장래의 위협적인 인물이었고, 그 아이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고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슬프지 않을 거라고 한탄했다. 그의 친구도 나폴레옹이 어릴 때부터 위축되어 크지 않았다면 훨씬 상태가 나았을 거라고 안타까워했다.
나폴레옹 2세의 석관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묘지인 카푸친 교회에 안장되었다. 합스부르크 전통에 따라 심장을 비롯한 장기들은 분리되어 안치되었다.[14] 그래서 그의 시신이 훗날 프랑스 파리의 앵발리드로 옮겨진 후에도 그의 심장과 창자는 빈에 안치되어 있다.
4. 기타
- 그가 사망한지 108년의 시간이 흐른 1940년 12월 15일, 아돌프 히틀러[15]의 지시로 아버지 나폴레옹이 매장된 파리의 앵발리드로 이장되었다. 히틀러에 의해 행해진 일이지만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폴레옹 2세가 옮겨진 곳에 아버지인 나폴레옹이 매장된 곳이라 그런지 전후에도 옮겨지지 않았다. 저 묘소에서 보면 NAPOLEON Ⅱ ROI DE ROME이라고 쓰여진 바닥이 보이는데 그게 나폴레옹 2세의 관을 안장하고 석판을 덮은 것이다.
- 나폴레옹 2세의 관을 옮기는 독일 국방군.
- 앵발리드에서 나폴레옹 1세의 관을 바라보는 히틀러. 히틀러가 총통 취임 이후 파리를 방문한 것은 평생 단 한 번, 그것도 3시간에 불과했는데 이 때의 필수코스에 앵발리드가 포함되었다. 다만 히틀러는 젊은 시절에는 파리에 산 적이 있다.
- 3살 때부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성장했으며, 그가 사용했던 유물들이 빈 황실보물관(Kaiserliche Schatzkammer)에 전시되어 있다.
- 외삼촌 프란츠 카를 대공[16]의 아내인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17]와 염문이 있었다고 한다. 조피는 원래 매우 총명하고 당찬 성격이었는데, 정신박약아로 소문이 자자하던 프란츠 카를과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다. 모자란 남편과의 애정없는 결혼으로 불행해하던 조피는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불행하게 살던 나폴레옹 2세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염문이 사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저러한 사유로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2세는 조피의 장남인 프란츠 대공을 귀여워하며 프란츠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초상화도 그렸다. 그 프란츠 대공이 훗날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란츠 요제프의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이 나폴레옹의 외삼촌이기 때문에 둘은 사촌 지간이다.[18]
- 나폴레옹 2세가 병에 걸렸을 때 조피는 둘째 아들을 임신한 몸으로 병간호를 해줬지만, 결국 그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조피는 완고하고 냉정하게 변했는데 이것이 훗날 고부갈등(...)으로 이어진다. 이때 조피에게 고통받은 며느리가 바로 미인 황후로 유명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둘째 아들인 막시밀리안 대공을 편애한 것도 나폴레옹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소문이 도는데 일조했다. 여담으로 조피의 형부가 바로 나폴레옹 2세의 의붓형제인 외젠 드 보아르네이다. 외젠의 아내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공주가 조피의 언니.
- 나폴레옹 3세로 알려진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나폴레옹 2세의 숙부 루이 보나파르트와 의붓딸인 오르탕스[19]의 아들로, 나폴레옹 2세의 사촌형이다. 나폴레옹 3세가 3살 연상. 나폴레옹 2세는 결혼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없었다.
- 본인은 생전에 실질적으로든 명목상으로든 황제였던 적이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촌들 중에는 실제로 황제였던 인물이 4명이나 있다. 첫 번째 인물은 상기한 친사촌 나폴레옹 3세이고, 두번째 인물은 외사촌인 프란츠 요제프 1세, 세번째 인물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이자 역시 외사촌인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아노 1세, 마지막 인물은 이종사촌인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다.
- 영국의 신스팝 그룹 Pet Shop Boys의 King of Rome가 바로 나폴레옹 2세에 대한 노래이다.
5.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보나파르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1] 프랑스 제1제국의 황태자와 로마왕은 사실상 동일시되고 있지만 일단 형식적으로는 별개로 존재하는 작위이며, 로마왕이 황태자에 우선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로마왕이라는 작위만 사용되었다. 참고로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도 로마왕의 작위를 가졌다.[2] 동양과 달리 추존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유럽에서 보기 드문 추존 비슷한 사례이다.[3] 어머니 마리 루이즈가 프란츠 2세의 딸로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주요 국왕 및 황제들과 친척관계로 이어진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외삼촌 프란츠 카를의 아들들)는 외사촌이며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이모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자녀들)는 이종사촌이다. 한편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어머니 마리 루이즈의 이종사촌 루이즈 도를레앙의 차남), 불가리아의 초대 차르 페르디난트 1세(어머니 마리 루이즈의 이종사촌 클레망틴 도를레앙의 삼남), 이탈리아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어머니 마리 루이즈의 친사촌 마리아 테레사의 장남)와는 6촌 간이다.[4] 나폴레옹 2세의 어머니인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이 다스리던 파르마 공국을 영지로 받아 파르마 여공작(Duchessa di Parma, Piacenza e Guastalla)이 되었다. 여담으로 그녀 사후 파르마 공국은 다시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이 통치하게 된다.[5] 로마왕 직위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갈 때 함께 포기되었으며, 백일천하 기간에도 로마왕 지위는 회복되지 못했다. 황태자 직위만이 회복되었을 뿐이다.[6] 다만 유럽에서 군주로 추존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추존 비슷한 사례이다.[7] 내각은 5명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중 3명은 정부위원회에서, 2명은 의회에서 임명했다.[8] 나폴레옹 1세의 막내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손자로 FBI의 설립자다.[9] 물론 코르시카 촌놈인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딸을 빼앗긴 프란츠 1세 입장에서 나폴레옹을 구해줄 리가 만무했다. 반대로 나폴레옹 역시 프란츠 1세를 싫어하긴 마찬가지였다.[10] 워낙 아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애정이 지극했기 때문인지 나폴레옹 2세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좋았던 것 같다. 나폴레옹의 비서였던 멘느발과 만났을 때 그에게 "멘느발 아저씨, 아빠한테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줘."라고 속삭였다고 한다.[11] 나폴레옹을 좋지 않게 보는 인물들조차 나폴레옹의 외모만큼은 잘생겼다고 말했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다만 황제가 된 이후에는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했고 탈모도 오는 바람에 말년에는 펭귄이 따로 없었다고(...).[12] 마리 루이즈가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중 알베르티나와 굴리엘모는 나폴레옹이 생존해있을 당시에 태어난 사생아들로, 마리 루이즈와는 별거를 강요당했고 어머니로 부르지도 못하게 하고 매일 타인과 같이 부를 것을 의무로 했다. 본부인의 자녀가 아니면 왕의 자식이라도 웬만한 귀족 대접도 받기 힘들었을 만큼 적서차별이 심했던 유럽에서, 그것도 유럽 왕실 가운데에서도 최고위격이라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녀가 사생아를 낳은 건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13] 심지어 마리 루이즈의 아버지인 프란츠 2세도 자기딸이 사생아를 낳고 그 아이들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래도 끝내 "하느님 앞에서 저지르면 안될 죄를 저지르고 슬퍼하고 있지만, 나는 너의 아버지다. 부모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용서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딸을 용서했다.[14] 레오폴트 1세의 형인 페르디난트 4세 이래 19세기까지 유지되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15] 나폴레옹 숭배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우상과 같은 병크를 터트렸다. 흥미롭게도 바로 며칠 후에 히틀러는 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할 것을 명령했는데 바로 바르바로사 작전이다.[16] 외할아버지 프란츠 2세의 3남으로 어머니 마리 루이즈의 친동생.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17] 1805년생으로, 나폴레옹 2세보다 6세 연상이다.[18] 함께 그려진 여자아이는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1822~1869)로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의 5남 살레르노 공 레오폴도와 프란츠 2세의 6녀 클레멘티나 여대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훗날 루이필리프 1세의 5남인 오말 공작 앙리와 당시에는 흔치 않던 연애 결혼을 하였다.[19] 외젠 드 보아르네의 친누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