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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3:31:59

클레망틴 도를레앙

<colbgcolor=#E3E0D8><colcolor=#000000>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비
클레망틴 도를레앙
Clémentine d'Orléans
파일:Princess_Clémentine_of_Orléans.jpg
이름 프랑스어 마리 클레망틴 레오폴딘 카롤린 클로틸드
(Marie Clémentine Léopoldine Caroline Clotilde)
독일어 마리 클레멘티네 레오폴디네 카롤리네 클로틸데
(Marie Clementine Leopoldine Caroline Clotilde)
출생 1817년 6월 3일
프랑스 왕국 뇌이쉬르센 뇌이 성
사망 1907년 2월 16일 (향년 89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배우자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
(1843년 결혼 / 1881년 사망)
자녀 필리프,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클로틸데[1], 아말리, 페르디난트 1세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
어머니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
형제 페르디낭 필리프, 루이즈, 마리, 루이, 프랑수아즈, 프랑수아, 샤를, 앙리, 앙투안
종교 가톨릭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결혼3.3. 망명3.4. 불가리아에서3.5.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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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루이필리프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의 4녀.[2] 벨기에의 왕비 루이즈 도를레앙의 동생이며, 불가리아 왕국의 초대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어머니이다.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1817년 6월 3일에 루이필리프의 여섯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클레망틴은 매우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했다. 어린 그녀를 본 샤를 10세는 루이필리프에게 내가 40살만 더 젊었어도 자네 딸을 프랑스의 왕비로 만들어 줬을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1830년 8월, 아버지 루이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랑스의 공주가 되었다.

3.2. 결혼

클레망틴이 결혼 적령기에 들어서자 유럽 왕실과 혼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똑똑한 클레망틴은 대단히 야심찬 소녀였고, 자신이 왕비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당시 전 유럽이 그녀의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를 찬탈자라며 비난하는 상황이었기에[3] 만족스러운 혼담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형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의 주선으로 클레망틴은 1843년 4월 20일 프랑스 생클루에서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아우구스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유럽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로, 아우구스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작 에른스트 1세와 벨기에의 레오폴드 1세의 조카이면서 영국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남편 앨버트 공 둘 다와 사촌지간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트의 형은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페르난두 2세였다. 클레망틴은 자신과 남편이 왕족이나 다름없으며, 언젠가 왕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부는 결혼 후 프랑스에서 거주했다. 강한 성격의 클레망틴은 남편을 휘어잡고 아이들을 자신의 혈통에 자부심을 가지도록 키웠다.

3.3. 망명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루이필리프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클레망틴은 가족들과 프랑스를 떠나 오스트리아 제국 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클레망틴은 늦둥이 막내 페르디난트를 낳았다. 클레망틴은 자식들을 키우고 유럽의 왕실 가문과 통혼시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맘때쯤 클레망틴은 왕비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대신 가장 아끼는 자식인 페르디난트를 군주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862년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광대한 토지를 남편 아우구스트에게 물려줬다. 아우구스트는 오스트리아에서 손꼽히는 토지 부자가 되었다. 1881년, 아우구스트가 숨을 거두면서 클레망틴은 부유한 과부가 되었다.

3.4. 불가리아에서

1886년 불가리아 공 알렉산더르 1세쿠데타로 인해 불가리아에서 쫓겨났다. 기회를 느낀 클레망틴은 적극적으로 로비 활동에 들어갔다. 정치적 센스와 외교 감각이 뛰어난 클레망틴의 노력으로 페르디난트는 불가리아 공국의 공위에 올랐다.

부유한 클레망틴은 불가리아의 철도 건설을 위해 큰 돈을 기부하는 등 국가 공공사업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자선 활동에 힘써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다만 워낙 거만한 성격에 왕족이 아닌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해 좋지 않은 소문이 나기도 했다.
파일:Clémentine_of_Orléans_1890.jpg
오를레앙의 클레망틴, 1890년대
1899년에 며느리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가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면서 손자들의 양육을 도맡게 되었다. 클레망틴은 나이가 들면서 귀가 멀었지만 여든이 넘어서도 해외 여행을 갈 정도로 정정했다고 한다.

3.5. 사망

1907년 2월 16일, 8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클레망틴은 남편이 건립하고 안장된 성 아우구스틴 교회당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비문에는 '왕의 딸, 왕비는 아니지만, 왕의 어머니'라고 적혔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08년에 페르디난트는 불가리아 왕국의 초대 차르 페르디난트 1세로 즉위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오를레앙의 클레망틴
(Clémentine of Orléans)
<colbgcolor=#fff3e4,#331c00> 루이필리프 1세
(Louis Philippe I)
<colbgcolor=#ffffe4,#323300>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
(Louis Philippe II, Duke of Orléans)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
(Louis Philippe I, Duke of Orléans)
루이즈 앙리에트 드 부르봉
(Louise Henriette de Bourbon)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Louise Marie Adélaïde de Bourbon)
팡티에브르 공작 루이 장 마리
(Louis Jean Marie, Duke of Penthièvre)[4]
마리아 테레사 데스테
(Maria Teresa Felicitas d'Este)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
(Maria Amalia of Naples and Sicily)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 I)
카를로스 3세
(Charles III)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5]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Maria Carolina of Austria)
프란츠 1세
(Francis I)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필리프 공자
(Prince Philipp of Saxe-Coburg and Gotha)
1844년 3월 28일 1921년 7월 3일 벨기에의 루이즈 공주
슬하 1남 1녀
2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공자
(Prince Ludwig August of Saxe-Coburg and Gotha)
1845년 8월 8일 1907년 9월 14일 브라질의 레오폴지나 공주[6]
슬하 4남
1녀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클로틸데
(Clotilde, Archduchess of Austria)
1846년 7월 8일 1927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카를
슬하 2남 5녀[7]
2녀 바이에른 공작부인 아말리
(Amalie, Duchess in Bavaria)
1848년 10월 23일 1894년 5월 6일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에마누엘[8]
슬하 3남
3남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1861년 2월 26일 1948년 9월 10일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9]
슬하 2남 2녀[10]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엘레오노레

[1]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어머니다.[2] 바로 위의 언니 프랑수아즈가 유아기에 요절해 사실상 3녀였다.[3] 클레망틴의 할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프랑스 혁명 당시 왕위에 욕심을 내며 친척인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을 찬성해서 프랑스 전역을 충격에 빠뜨리고, 정작 본인도 오를레앙 왕조를 옹립하려는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해 그의 아들이자 클레망틴의 아버지인 루이필리프까지 부르봉 왕조 친척들에게 왕따당한 전적이 있다. 루이필리프 역시 당시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직계 남성이자 명백히 계승 서열이 앞서는 샹보르 백작 앙리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워낙 정통성이 없어서 재위 기간 내내 전 유럽의 왕실에게 폭동왕이라 불리며 비난받았다. 루이필리프의 아내이자 클레망틴의 어머니인 마리 아멜리 왕비마저 남편의 즉위를 재앙(catastrophe)이라고 표현하며 반대했을 정도. 이런 관계 때문에 부르봉 왕조는 현재까지도 오를레앙 왕조를 종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4] 루이 14세의 손자이다.[5] 아우구스트 3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이다.[6] 페드루 2세의 차녀.[7]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남동생.[9]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장녀.[10] 보리스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