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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아우구스트 폰 외스터라이히

<colcolor=#191919>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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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Erzherzog Joseph August von Österreich
파일:Joseph_August_of_Austria_(1872-1962)_in_1917.jpg
이름[1] 요제프 아우구스트 빅토어 클레멘스 마리아 (독일어)
Joseph August Viktor Klemens Maria
요제프 아고슈트 빅토르 켈레멘 마리어 (헝가리어)
József Ágost Viktor Kelemen Mária
출생 1872년 8월 9일
성 이슈트반 왕관령 헝가리 왕국 알추트도보즈(Alcsútdoboz)
사망 1962년 7월 6일 (향년 89세)
독일연방공화국 슈트라우빙
최종 계급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제국원수 계급장.svg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1918년)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배우자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공주[2] (1893년 결혼)
자녀 요제프 프란츠, 기젤라, 조피, 라디슬라우스, 마티아스, 마그달레나
아버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카를 대공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클로틸데 공녀[3]
형제 엘리자베트 클레멘티네, 마리아 도로테아, 마르가레테 클레멘티네, 라디슬라우스 필리프, 엘리자베트 헨리에테, 클로틸데 마리아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가문 배경2.2. 교육과 초기 군사경력2.3. 제1차 세계 대전2.4. 왕의 대리인으로서 활동(1918-1919)2.5.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과 섭정직2.6. 섭정에서의 사임과 호르티 시대2.7. MTA 회장 시절2.8. 말년
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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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인, 황족이자 제국원수[4].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자 헝가리의 왕자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야전원수로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상당히 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8년 말 헝가리 왕국의 섭정과 1919년 8월 헝가리 공화국의 섭정을 역임했다. 호르티 미클로시 시대의 주요 정치인이자 문화계 인사로서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Magyar Tudományos Akadémia, 이하 MTA) 회장을 지냈다.

2. 생애

2.1. 출생과 가문 배경

요제프 아우구스트는 1872년 8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알추트(Alcsút, 현재 헝가리의 알추트도보즈) 성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카를 루트비히(1833-1905)의 장남으로 태어났다.[5] 그의 가문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헝가리 계통으로, 헝가리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아버지인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카를은 기병대장이자 헝가리 방위군 최고사령관이었으며, 할아버지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팔라틴(1776-1847)과 삼촌 이슈트반 팔라틴(1817-1867)은 모두 헝가리 왕국의 마지막 팔라틴들이었다. 증조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이었던 레오폴트 2세였다.

어머니 클로틸데 폰 작센코부르크코하리 공작부인(1846-1927)은 프랑스 7월 왕정루이필리프 1세의 손녀였다. 그녀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가의 헝가리 계통 출신으로, 당시 유럽 왕가들과 긴밀한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2.2. 교육과 초기 군사경력

젊은 시절 죄르에 위치한 라브 베네딕트회 김나지움(Győri Bencés Gimnázium)에서 교육을 받은 요제프 아우구스트는 1890년 4월 26일 제1보병연대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891년 3월 24일 황금 양모 기사단 기사로 서임되었다. 그는 1893년 중위로 진급하여 제72보병연대로 이동했고,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아우구스테와 약혼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아우구스테는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오스트리아의 기젤라 여대공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였고, 기젤라가 바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차녀였다. 즉,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황제의 6촌 동생이면서 손녀사위가 되었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아우구스타 공주와 약혼 함으로써 1893년 9월 4일 바이에른 성 후베르트 훈장을 받았다.[6] 이후 1893년 11월 15일, 뮌헨에서 결혼식을 치뤘다. 여담으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프란츠 요제프 1세 말고도 프리드리히 대공, 오이겐 대공과도 6촌 형제이며 카를 대공의 먼 친척이다.[7]

1894년에는 제6용기병연대로 이동했다. 군사 경력을 쌓는 한편,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02년에는 자신의 요청으로 헝가리 방위군(Honvéd)으로 이동하여 제1헝가리 후사르 연대에 배속되었다. 헝가리 귀족 출신임을 자처하며 헝가리 군대에서 복무하기를 원했던 그의 선택은 후일 헝가리인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11년 4월 초에 제31보병사단의 사단장이 되었고, 이 직책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2.3. 제1차 세계 대전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독특한 지휘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는 작전을 결정하기 전 반드시 직접 전선을 시찰했으며, 최전방 참호와 관측소, 전진기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현장 파악은 그의 지휘 철학의 핵심이었다. 부대원들과의 직접 소통을 중시했으며, 특히 헝가리어 구사 능력을 활용해 헝가리 출신 병사들과 깊은 유대를 형성했고, 병사들의 장비, 보급, 위생 상태를 직접 점검하고 개선하려 노력했다. 전투 상황에서도 최전선을 자주 방문하여 실제 상황을 파악했는데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지휘하던 제31보병사단은 처음에는 세르비아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8월에 갈리치아 전선으로 이동되었다. 제31보병사단은 렘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병력 우세로 인한 전반적인 후퇴 시에는 후위를 담당하며 군의 철수를 엄호했다. 1914년 10월 25일, 테메슈바어의 제7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헝가리로 침공하는 러시아군과 치열한 방어전을 벌였다. 같은 해 11월 1일 기병대장으로 승진했으며, 독일 제국의 훈장인 1등급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1915년 5월 이탈리아협상국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자, 그의 제7군단은 카린티아 국경지대로 이동했다가 이손초 군의 남부 전선인 도베르도 고원으로 배치되었다. 이손초 전투에서 그의 지휘 능력이 특히 돋보였다. 제2차 이손초 전투(1915년 7월 18일 - 8월 3일) 당시 그의 군단은 불모의 카르스트 지형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몬테 산 미켈레와 몬테 세이 부시 고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전투 초기 48시간 동안에만 테메슈바어 군단에서 5,500명의 병사가 전사했으며, 바위투성이의 산 미켈레 산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7월 24일까지 군단은 도베르도 고원 방어전에서 25,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제17사단은 한 달간 11,700명(주로 헝가리 출신)의 사상자를 냈으나 고지 방어에 성공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주로 헝가리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지휘하며 큰 희생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했다. 직접 전선을 방문하며 위험을 무릅쓴 지휘 스타일로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또한 두 차례 경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에 러시아 제국군루마니아군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했고, 루마니아군이 점령한 트란실바니아 동부를 수복하였다. 이후 러시아 제국과의 휴전 협상에 주도한 공으로 1916년 11월 1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카를 1세 황제는 그를 동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18년 1월에는 제6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부전선을 지휘했으며, 같은 해 6월, 피아베강 전투에서 그의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이 발휘되었다. 깊이 전진했다가 포위 위험에 처한 부대들을 성공적으로 구출했으며, 적의 맹렬한 포격 속에서도 질서정연한 철수를 지휘해냈다. 이 공로로 그는 후에 1927년 티롤 금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7월에는 콘라트피아베강 전투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 후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티롤 군집단[8]을 이어받아 사령관이 되었다. 1918년 10월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는 군집단 지휘권을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에게 넘기고 쾨베시 군집단을 이어받았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가진 특별한 부분은 12주 이상의 전선에서 연속으로 복무하는 것에 대해 수여되는 카를 군단 십자가를 받은 극소수의 고위 장성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고위 장성들은 후방에서 지휘를 하기 때문에 이 훈장을 받기 어려웠으나, 이는 그가 최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1918년 10월 24일, 제국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게 되자 카를 1세는 그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최후의 원수로 임명했다. 이미 전쟁이 끝난 시점에 원수 진급이 뭔 소용인가 싶겠지만, 이는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한 의도였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헝가리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고, 헝가리 방위군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카를 1세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원수 진급을 명령한 것은 제국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헝가리군의 충성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노력이었다. 또한 이틀 후에 그를 자신의 대리인 이른바 '호모 레기우스(Homo Regius)'로 임명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9]

2.4. 왕의 대리인으로서 활동(1918-1919)

1918년 10월 26일, 카를 1세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을 모든 헝가리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자신의 전권대행자(Homo Regius, '왕의 대리인')로 임명했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즉시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에서 해방될 것을 요청했지만, 전반적인 붕괴 상황에서 새로운 왕실 최고사령관은 헝가리 국경 방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미 10월부터 부다페스트 주둔군 사이에서는 심각한 규율 문제와 함께 폭력 사태와 반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군관구사령관 게저 루카치치 장군에게 병사들의 사기를 물었을 때, 루카치치는 "그들은 신뢰할 수 없다"고 단호히 답했다. 특히 전선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전쟁의 계속을 거부하고 있었고, 장교들에 대한 불신도 극에 달해 있었다. 보스니아 연대가 도시로 진군해 질서를 회복하라는 루카치치의 명령도 병사들의 불복종으로 실패했다.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베케를레 샨도르(Wekerle Sándor)의 사임 후, 시민들은 황제 카를 1세가 카로이 미하이(Károlyi Mihály) 백작을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할 것을 기대했다. 카로이는 전쟁 반대와 민주적 개혁을 주장하며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고, 특히 부다페스트의 노동자들과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의 개혁 프로그램은 보편 선거권 도입, 토지 개혁, 소수민족 자치권 보장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 1세는 이 혁명적인 조치를 주저했고,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보수파의 입장을 반영해 전 국립식량공급청장이었던 허디크 야노시(Hadik János) 백작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했다. 헝가리 보수 귀족들은 카로이의 급진적 개혁 성향을 우려했고, 허디크를 통해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특히 그들은 카로이가 추진하려 한 토지 개혁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10월 28일, 수천 명의 대규모 군중이 부다 성으로 행진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리인인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카로이의 임명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카로이를 수상으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군인들도 이들에게 합류하기 시작했다.

결국 10월 30일에 과꽃 혁명이 발발하여 정부 구성이 무산되었다.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주요 관공서와 전략적 거점들을 장악했고, 부다페스트의 통제권은 사실상 혁명 세력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들은 혁명의 상징으로 국화를 달았는데, 이는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상징했다. 허디크는 31일 새벽 사임했고, 왕의 대리인인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카를 1세의 승인을 받아 급진 야당의 지도자 카로이 미하이를 총리로 임명했다.

11월 1일, 카로이의 새 내각 전원이 왕궁에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대리하는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했다. 그러나 같은 날 前 헝가리 총리 이슈트반 티서가 불만을 품은 군인들에 의해 자택에서 암살당하는 등 사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는 구체제의 붕괴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1월 2일, 국민평의회는 카로이 내각에 헝가리 국민이 더 이상 공화국 이외의 정부를 원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이날 국민평의회 위원 야시에게 공화국 선포 시기를 문의했고, "지연이 여론을 자극하고 새로운 복잡한 상황을 초래하지 않을까?"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결국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아들 요제프 프란츠(Josef Franz/József Ferenc, 1895-1957) 대공과 함께 헝가리 국민평의회에 충성을 서약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성을 합스부르크에서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따서 알추트(Alcsút)로 바꾸겠다고 제안했다. 11월 16일 카로이 미하이 정부는 결국 공화국을 선포했고, 다음날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국민평의회에 대한 충성 서약이 정식으로 수락되었다.

2.5.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과 섭정직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가족과 함께 헝가리의 알추트 성에 머물렀다. 서부 헝가리 지역은 민족주의자들과 반동주의자들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러 쿤의 133일간의 공포 통치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 내무인민위원회의 요원들이 알추트 성을 지속적으로 감시했지만, 헝가리 국민들 사이에서 대공의 인기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특히 농민들과 보수적 중산층 사이에서 그는 안정과 질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는 그가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민중 사이에서 가진 독특한 위치를 보여준다.

벨러 쿤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붕괴한 후인 1919년 8월 7일, 그는 자신을 헝가리의 섭정(Reichsverweser)으로 선언했다. 부다페스트 연합국 위원회 의장이었던 해리 힐 밴드홀츠(Harry Hill Bandholtz) 미군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약 50명의 헌병대가 루마니아군의 묵인 하에 이 쿠데타를 실행했다. 당시 수도는 루마니아군이 점령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반공산주의 세력인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권력 장악을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이는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왕정 복고를 꿈꾸며 다시 한 번 정치적 변신을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6. 섭정에서의 사임과 호르티 시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섭정으로서의 첫 조치로 페이들 줄러(Peidl Gyula)의 노동조합 정부를 전복시킨 프리드리히 이슈트반(Friedrich István)을 총리로 임명했고,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을 군사령관으로 확인했다. 그는 단순한 섭정이 아닌 더 큰 야망을 품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1918년 퇴위한 이전 통치자인 카로이 4세를 헝가리 왕좌로 복귀시키려 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알추트(Alcsút)라는 헝가리 성씨를 가진 인물로서 왕좌에 오르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협상국의 심각한 우려를 자아냈다.

1919년 8월 11일, 그는 루마니아 점령군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았다. 루마니아군합스부르크 가문의 복귀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고, 동시에 부다페스트 점령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존재를 이용했다. 당시 부다페스트루마니아군에 의해 조직적인 약탈이 진행되고 있었고,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8월 20일 헝가리의 일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는 그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으나, 곧바로 21일 루마니아군이 연합군 군사사절단에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같은 날 파리 평화회담 최고위원회는 사절단 지도부에 명확한 입장을 전달했다.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를 헝가리 수반으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협상국 사절단의 장군들은 즉각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과의 회담을 소집했다. 그들은 대공에게 즉시 계엄령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고, 회담에서 그의 정치적 입장이 평화 조약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우려도 전달했다. 특히 프랑스 대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국내외의 강력한 압박으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1919년 8월 23일 섭정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백색 테러 세력들은 이를 "3주간의 휴가"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정치적 야망이 좌절된 것을 의미했다. 사임과 함께 그는 세게드에 있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의 헝가리 국민군 최고사령관 지위를 재확인했는데, 이는 호르티의 권력 기반을 더욱 강화시켰다.

상황의 흐름을 읽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정치적 실용주의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루마니아군이 약탈의 대가로 가득 찬 수도를 떠나고 협상국의 허가를 받은 호르티가 돌아왔을 때,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새로운 '강력한 인물'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1920년 3월 1일 호르티의 섭정 선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이는 호르티 체제의 정통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도모하는 동시에, 헝가리의 새로운 권력 구조 속에서 자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7. MTA 회장 시절

1936년 3월 22일부터 1944년 10월까지 Magyar Tudományos Akadémia(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8대 회장을 역임했다. 이는 그가 정치적 영향력은 상실했지만, 헝가리 학술계에서 여전히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그는 학문과 문화 발전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부다페스트 대학과 콜로주바르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과학 아카데미 회장으로서 그는 헝가리의 학문 발전과 연구 활동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회장 재임 기간 동안 아카데미는 여러 중요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국제 학술 교류도 활발히 진행했다. 이는 양차 대전 사이 헝가리 학계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기였다. 그는 특히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 지원에 관심을 보였고,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도 적극 장려했다.

2.8. 말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 말, 소련군의 진격으로 인해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대부분의 헝가리 거주 합스부르크 가문 구성원들처럼 알추트 성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는 그가 과학 아카데미 회장직을 수행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쟁 중 그는 괴뫼시 귤러(Gömbös Gyula) 총리 시절부터 호르티의 친독 정책을 지지했고, 극우 화살십자당의 활동도 옹호했던 터라 소련군의 진주를 앞두고 망명이 불가피했다.

패전국이 된 헝가리는 소련의 위성국인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되었고, 과거 귀족과 왕족들은 새 체제하에서 재산 몰수, 추방, 구금 등 심각한 박해를 받았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미국에서의 짧은 망명 생활 후 독일로 돌아와 그의 누이 마르가레테 클레멘티네(Margarethe Klementine)[10]가 있는 레겐스부르크에서 머물렀다.

대부분의 합스부르크 가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족들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의 아들 요제프 프란츠 대공은 성품이 단순하고 소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아내 안나 모니카 공주(Princess Anna Monica von Sachsen)는 전쟁 전 부다페스트 사교계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요제프 프란츠는 1957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보다 5년 앞선 것이었다.

망명 시절 동안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여러 권의 회고록과 역사 연구서를 집필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와 독립 헝가리 초기의 중요한 역사적 증언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저서들은 1918년부터 1919년사이의 격동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어, 이 시기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1962년 7월 6일, 89세의 나이로 슈트라우빙 근처 라인(Rain)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마지막 생존 원수였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는 처음에는 바이에른 주의 펠다핑(Feldafing)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2년에 부다 왕궁의 팔라틴 지하묘지(Palatinusgruft)로 이장되었다.

3. 평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일원이면서도 강한 헝가리 정체성을 가진 독특한 인물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의 복잡한 정치적, 민족적 상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중적 위치는, 제국 말기의 정치적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의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은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시기에 잘 드러났다. 군인으로서의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을 보자면 그는 전통적인 귀족 장교들과는 다른 지휘 스타일을 보였다. 직접 전선을 방문하고 병사들과 소통하는 등 현장 중심의 지휘를 펼쳤으며, 이는 그가 고위 장성임에도 12주 이상의 전선 복무가 필요한 카를 군단 십자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특히 이소초 전투에서 도베르도 고원을 사수하고 피아베강 전투에서 보여준 철수 작전은 그의 뛰어난 지휘력을 보여준다. 또한 헝가리어에 능통했던 그는 헝가리 출신 부대원들과 직접 소통하며 높은 전투력을 이끌어냈다. 또한 정치적 행보로도 족적을 남겼는데, 1918과 1919년의 과도기에 그의 역할은 복잡했다. 1918년 10월 의 대리인으로서 헝가리 정부 구성을 주도했고, 1919년 8월에는 공화국의 섭정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의 국가수반 취임을 반대하는 협상국의 압박으로 인해 그의 섭정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4. 기타



[1] 당시 신분제가 폐지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시민권을 취득하여 성 앞에 귀족의 호칭인 von이 사라졌다.[2] 오스트리아의 기젤라 여대공의 차녀다.[3]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큰누나다.[4]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5]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카를은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의 차남이고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가 프란츠 2세의 동생임으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프란츠 요제프 1세6촌 동생이다. 다만 프란츠 요제프 1세와는 나이 차이가 42살이나 나는데, 그 이유가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가 57살이라는 나이에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카를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의 조카 프란츠 카를은 이미 3년전에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낳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카를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5촌 당숙에 해당되지만 나이는 3살 어렸었고, 이 요제프 카를도 40에 가까운 나이에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을 낳았기 때문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과 항렬상 6촌이면서도 나이 차가 많이 날 수밖에 없었다.[6] 당시 이를 두고 험담하는 이들에 따르면 못생기고 비만한 경향이 있는 아우구스타를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실제로 아우구스타 공주의 외모에 대한 이러한 평가가 얼마나 사실이었는지는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은 아우구스타 공주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식을 낳았다. 이를 보아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부부의 금슬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7] 둘다 레오폴트 2세의 후손이며 보리스 3세의 고종사촌 형이다.[8] 제10군과 제11군[9] 번역하면 왕의 대리인으로, 섭정과는 다른 개념이다. 정부를 구성하고 총리를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쥘 수 있는 직책이었다.[10] 투른-탁시스 공작부인(Fürstin von Thurn und Taxis)[11]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외, 프리드리히 대공, 오이겐 대공, 콘라트, 쾨베시, 크로바틴, 뵘에르몰리, 보로예비치, 프란츠 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