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 출신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조상들은 1683년 빈 포위전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활약했다. 10세에 마르부르크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후에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872년 제11후사르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1874부터 1년간 여단장교학교를 수료했고, 이후 대공비 엘리자베트의 궁정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사령관이 된 젊은 오이겐 대공의 교사로 활동했다.
1877년에는 중위, 1885년 기병대위 2등급, 1889년 기병대위 1등급으로 진급했다 1892년부터 1894년까지는 루돌프 황태자의 미망인 스테파니 대공비의 시종무관으로 복무했다. 1896년 기병사관생도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으며, 1900년 대령 진급과 함께 제16후사르연대장이 되었다. 1906년 소장 진급 후 제13기병여단장, 1907년 제4기병여단장을 역임했다. 1910년 중장 진급 후 헝가리 영토군 기병감독관으로 임명되어 헝가리 기병장교들의 교육수준 향상에 힘썼다.
1914년 전쟁 발발 후 빅토어 단클 장군이 지휘하는 제1군 예하 제9기병사단장으로서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코마루프 전투에서는 페터 페르디난트 대공 군단의 철수를 성공적으로 엄호했으며, 비스와강 우안에서 중요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기병대장으로 진급했으며, '하우어기병군단'을 창설해 지휘하게 되었다.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 참가해 비스와강을 도하하고 비아워비에자숲 북쪽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린징겐 군단 예하에서 스티르 강과 스토히드 강 사이 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 시기에는 토볼리 근처와 스토히드 강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 1917년 3월 말에는 토볼리의 러시아군 교두보를 기습 공격으로 탈환하는 데 성공해 레오폴트 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8월 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나,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동부전선이 안정화되면서 그의 기병군단은 해체되었다. 제국이 붕괴된 후 헝가리 국적을 선택했으며, 1933년 5월 3일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했다.
하우어는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자 교육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헝가리 기병대의 현대화와 교육수준 향상에 큰 공헌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동부전선의 주요 전투들에서 기병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으며, 특히 기동전 시기에 그의 지휘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참호전이 본격화되면서 기병의 전술적 가치가 감소함에 따라 그의 역할도 제한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