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도나우 슈바벤계 농부의 아들로 바나트 지방의 프란츠펠트(Franzfeld)[2]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1790년 바덴 변경백국의 랑엔슈타인바흐[現]에서 이주해왔다. 1867년부터 1874년까지 군사실과학교와 판체보의 부대준비학교를 다녔고, 1874년부터 1878년까지는 빈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
1878년 보스니아 점령 작전에 참여해 "최고의 공로 표창"을 받았다. 1882-1883년에는 헤르체고비나 남부의 봉기 진압작전에 참여했고, 특히 1882년 5월 9-10일 야스트레비차와 부치 주브[4]에서의 전투에서는 전장에서의 특별한 용맹을 인정받아 전공십자훈장 3등급을 받고 중위로 진급했다.
1914년 7월 말, 그의 제92란트베어보병여단은 제46보병사단의 일부로 갈리치아 전선에 배치되어 산도미에시 지역에서 전개했다. 8월 22일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단클기병대장 예하 제1군의 키르히바흐기병대장이 이끌고 있는 제1군단의 일부로서 루블린 방향으로 진격하여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우세한 병력을 북쪽으로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전략적 재능을 인정받아 9월 17일 제46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9월 30일에는 레오폴트 훈장 기사십자를 받았으며, 곧이어 군공로십자장 2등급도 수여받았다. 또한 독일군 인접 전선의 대대를 지원한 공로로 독일로부터 철십자 2등급과 1등급을 받았다.
1914년 10월 말 비스와강 전투에서는 그의 사단이 강 서안의 이반고로드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제2군과 제3군의 산 강에서의 공세가 실패하고 제1군의 후방 연락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1월 초 크라쿠프-노비송치-카르파티아 고개 선으로 후퇴해야 했다. 12월 초 리마노바-와파누프 지역에서의 공세로 흔들리는 전선이 안정되었고, 독일 서부전선처럼 참호전으로 변화했다.
1915년 2월에는 부상으로 전선을 떠나야 했고, 회복 후에는 동부전선 보충병 훈련 총감찰관이 되었다. 5월 21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남서부전선 사단장으로 예정되었으나, 가을에 크라쿠프 군구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크라쿠프는 당시 동부의 가장 크고 중요한 군관구로, 전체 동부전선에 대한 모든 병력과 물자 보급의 중심지였다.
[1] 1906년 귀족 작위를 받아 '폰 볼프스찬' 칭호를 사용[2] 現 세르비아의 카차레보(Kačarevo)[現]독일카를스루에 시의 일부[4] "늑대 이빨"이란 뜻으로, 후일 그의 귀족 칭호의 유래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