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 Paul Puhallo von Brlog | |
이름 | 파울 푸할로 Paul Puhallo ↓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 Paul Puhallo von Brlog[1] ↓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 남작 Paul Freiherr Puhallo von Brlog[2] (독일어) |
파바오 푸할로 Pavao Puhalo ↓ 파바오 푸할로 브를로슈키 Pavao Puhalo Brloški ↓ 파바오 푸할로 브를로슈키 남작 Pavao barun Puhalo Brloški (크로아티아어) | |
출생 | 1856년 2월 21일 오스트리아 제국 크로아티아 왕국 브를로크 |
사망 | 1926년 10월 12일(향년 70세) 오스트리아 공화국 빈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1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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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제3군과 제1군의 사령관을 역임했다.2. 생애
푸할로는 크로아티아 왕국의 군사국경 지역 브를로크(Brlog)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하일라 푸할라(Michael Puhalo/Mihajla Puhala, 1818-1913)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장교였다. 푸할로는 여러 군사교육기관을 거친 후 1877년에 제11야전포병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1886년 대위 진급 후 빈 군사기술학교에서 전술 교관을 지냈다. 1898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897년 안나 회르징거(Anna Hörzinger)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푸할로는 1905년 소장 진급과 함께 빈 제50보병여단장이 되었고, 1906년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의 교장으로 부임했다. 1909년 중장, 1913년 11월 1일에는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빅토어 단클 폰 크라시니크 휘하 제1군 소속 제5군단의 사령관으로 참전하였다. 1914년 8월, 크라시니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915년 5월 제3군 사령관이 되어 프셰미실 요새 탈환 작전에 성공했다. 1916년 5월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고, 1915년 6월 10일 제1군의 사령관으로 전보되어 산도미에시(Sandomierz)와 타를로-요제푸프(Tarlo-Józefów) 교두보를 점령했다. 이후 푸할로는 독일 제국군 소속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의 휘하로 배속되어 렘베르크 탈환 작전에 참전했다.
루츠크-로우노(Rowno) -두브노(Dubno)는 소위 "볼린 요새 삼각지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전략 거점들이었는데, 이 지역 통제권을 놓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러시아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부그 공세(Bug-Offensive)동안 부그강 동쪽에서 블라디미르-볼린스키(Wladimir-Wolynsk) 방향으로 투입되었고, 그곳에는 새로 편성된 러시아 제13군이 집결해 있었다. 러시아 제13군은 완전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고, 제1군은 8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으로 구성하여 북쪽으로 진격하려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1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1915년 8월에는 로우노공세 참여했고, 8월 31일에 푸할로의 제1군이 루츠크를 점령, 9월 초에는 두브노를 점령했다. 그러나 9월 22일,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루츠크를 상실했고,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군 7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콘라트 참모총장은 공세의 추진력을 잃은 것이 제1군이 입은 심각한 손실 때문이라고 보고, 푸할로가 잘 방어된 러시아 제국군의 진지에 대해 불필요한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제2군과 함께 러시아 제11군과 대치중이던 푸할로의 제1군은 북쪽을 지키던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제4군이 루츠크에서 붕괴되어 측면이 위험해졌다.[3] 푸할로는 이크바(Ikwa)강에서 플라셰프카(Plaszewka)강과 하부 리파(Lipa)강으로 후퇴 명령, 6월 15일까지 데미도프카(Demidowka) 지역에 새로운 방어선 구축했지만 러시아군 공세를 막지못하고 중과부적으로 패하면서 옛 국경선까지 후퇴하였다. 결국 그 여파로 방어 임무를 잘 수행한 제2군 사령관 뵘에름몰리와는 달리 푸할로는 7월 25일에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푸할로의 후임으로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가 제1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푸할로는 전선에서 배제되었다.[4]
전후 신생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 국적을 받았으나 연금이 적어 빈으로 이주했다. 이후 푸할로는 옛 전우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다가 1926년 10월 12일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3. 평가
크라시니크 전투 승리 등 초기 전과에도 불구하고,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패배로 그의 경력이 끝장나면서 지휘관으로서의 평가가 저하되었다. 다만 교육자로서는 빈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장 시절 교육과정 현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 1908년 귀족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2] 1917년 남작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 오헝 제국 해체 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에서 신분제를 폐지하고 귀족 접두어를 철폐한 후에는 본명으로 돌아갔거나 von을 이름에서 제외했을 듯 하다.[3] 공세 개시 첫날, 러시아의 제8군이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의 제4군을 공격했는데, 강력하고 지속적인 러시아의 포격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요새화된 진지와 방어 참호체계를 파괴했다. 러시아 보병은 증원 없이도 공격 첫날부터 올리카(Olika)에서 돌파에 성공하여 방어 깊숙이 침투했다. 전사자와 포로가 된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 제4군은 서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진하는 러시아군은 6월 10일 스트리(Stryj) 강도 건넜다. 85km 폭으로, 48km 깊이로 오헝 제국의 전선 후방으로 침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규율이 무너졌고, 슬라브계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들은 거의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단 일주일 만에 제4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어 겨우 27,000명의 전투가능한 군인만이 남은 상태였다.[4] 푸할로는 개인적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전속부관이었던 아르투어 폰 볼프라스 제국상급대장 새로운 임무에 대한 요청을 기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로 푸할로가 경질되는 원인중 하나를 제공했던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은 제국 공군 총감찰관이라는 명예직을 받으며 푸할로와 대조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