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1855년 독일 라슈타트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소장 페터 폰 레멘(Peter von Rhemen, 1789-1872) 남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0년에는 장크트푈텐의 군사학교에서 기초 군사교육을 받았고, 1872년에는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76년 졸업 후 제14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881년 중위 진급 후 1882년부터 1884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참모본부에서 근무했고, 1894년 소령으로 진급해 빈의 제2군단 참모부에서 근무했다. 1896년 중령으로 진급해 카를로바츠의 제79보병연대로 전보되었고, 1899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아그람의 제13군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1905년 소장 진급 후 아그람의 제36보병사단장, 사라예보의 제9산악여단장을 역임했다. 1907년에는 플레블랴 주둔 오스트리아-헝가리 점령군 여단장이 되어 노비파자르 산작을 관할했다. 1909년 테메시바르의 제34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고, 1910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2년 10월 아그람의 제13군단장 겸 군관구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아그람역에서 참모총장인 콘라트에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소식을 전달하였다.
폰 레멘은 보병대장에 진급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 휘하의 제5군 소속으로 제13군단을 지휘하여 세르비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제13군단은 크로아티아 부대로, 악마의 사단이라 불린 제42향토보병사단(사르코티치 지휘)과 제36보병사단(치불카 지휘), 제13보병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33,000명의 병력과 114문의 포를 보유했다.
1914년 8월 12일부터 시작된 제1차 세르비아 침공에서 드리나강을 건너 발예보 포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9월의 제2차 침공과 11월의 제3차 침공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제3차 침공 시에는 콜루바라강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부대는 세르비아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는데, 레멘은 세르비아인들을 "문화적으로 후진적인 민족"이라며 이를 정당화했다고 한다.
1915년 1월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카를 폰 플란처발틴 집단군 예하에서 카르파티아산맥 전투에 참전했다. 5월에는 제7군 소속으로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 참여했다.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에는 제7군 소속으로 방어전을 수행했으나, 러시아 제국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퇴각해야 했다. 레멘의 군단은 러시아 제9군의 공격을 받아 7,000여 명의 항복자가 발생했고, 결국 카르파티아산맥 기슭으로 철수해야 했다.
1916년 7월 6일 점령지 세르비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전임자 잔 폰 잘리스-제비스가 세르비아인들에게 너무 관대하다는 헝가리총리티서의 건의로 교체되었다. 총독 취임 직후 정치활동 경력이 있는 지식인들을 추방했고, 17세 이상 남성들의 수용소 수감을 명령했다. 도망자들은 군대를 동원해 추적했으며, 도망을 조장한 혐의자들은 약식재판 후 처형했다. 2개월 만에 16,000명, 연말까지 70,000명이 수용되어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발생했다. 1917년 초 발생한 토플리차 봉기 진압 과정에서는 반군 협력 마을의 남성 전원 수감, 무기 소지자 및 반군 협력자 즉결처형, 인질 체포 등을 명령했다. 1917년 5월 1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18년 10월 28일까지 총독직을 수행했다.
군사령관으로서 세르비아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뚜렷한 전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세르비아 총독 시절에는 강경한 점령 정책을 펼쳐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약 7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수용되었으며, 이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초래했다. 크로아티아어에 능통했던 그는 남슬라브 지역 통치를 위한 적임자로 여겨졌으나, 헝가리총리티서는 그의 크로아티아 관련 인맥을 우려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