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일반참모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다니엘은 독일어권 지역이라 독일계 주민들의 대다수가 거주하던 보헤미아 서부 주데텐란트의 드르모울(Drmoul)에서 태어났다. 부모 또한 독일계였고, 그런 가정에서 자란 다니엘은 체코인이 아닌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 이후 다니엘은 하인부르크 안 데어 도나우(Hainburg an der Donau)의 생도학교에서 1879년부터 1882년까지 기초 군사교육을 받았다. 1882년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 1887년 중위로 진급했다. 1889년부터 1891년까지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참모장교가 되었다.
1891년 대위 진급과 함께 테레진(Terezín)의 제58보병여단에서 근무하며 동시에 참모본부 지도제작과에서도 일했다. 다니엘은 1895년에 플젠의 제19보병연대를 거쳐 1897년에 다시 테레진으로 돌아와 제94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이후 1899년 소령이 되어 부다페스트의 제32보병사단 참모장을 지냈고, 1901년에 다시 지도제작과로 복귀했다. 1903년 중령으로 진급, 린츠의 제59보병연대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06년 대령 진급 후 체스케부데요비체의 제28보병연대장이 되었고, 1910년부터는 트렌토로 이동했다.
1912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프라크의 제17보병여단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세르비아 전선으로 파견되어 1914년 10월 제9보병사단장이 되었다. 콜루바라 강 전투에서 라자레바츠(Lazarevac)를 점령하고 2,000명의 세르비아군을 포로로 잡았으며, 드리나강 도하작전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류머티즘이 발병하여 1915년 1월 1일 전선에서 후방으로 전출되었다.
인스브루크 군관구사령관이 되었고 1915년 5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6년 2월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여 제54보병사단장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나, 9월 건강악화로 다시 후방으로 돌아와 부다페스트와 인스브루크 군관구사령관을 지냈다. 1917년 10월부터 종전까지는 라이트메리츠 군관구사령관으로 재직했다. 1918년 5월 10일 포병대장 칭호를 받았다. 1919년 1월 1일부로 퇴역했다. 이후 다니엘은 잠시 그라츠에서 지내다가 북부 보헤미아로 이주했다. 우스티 나트 라벰(Ústí nad Labem)의 스트르제코프(Střekov) 지구에서 사망했으며, 같은 도시에 안장되었다.
[1] 1916년 '폰 드리나뮌데' 귀족 작위를 받음[2] 現 체코 리토메르지체(Litoměř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