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샨도르 수르머이는 1860년 12월 19일 오스트리아 제국보이보디나 공국의 보크샤바녀(Boksánbány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할리 수르머이(Mihály Szurmay)는 철도 관리였다. 수르머이는 세게드에서 학교를 다녔고, 188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에 입대하여 장교 생활을 시작했다. 수르머이는 1884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1887년부터 1889년까지는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참모장교 교육을 받았고, 1890년 중위로 진급한 후 헝가리 국방부에서 근무했으며, 1892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1898년 소령이 되었고, 1903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905년 대령으로 진급한 수르머이는 헝가리 자위대 제20 보병연대장을 맡았다. 1907년에는 헝가리 국방부에서 다시 일했으며, 1910년 12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1914년 5월 11일 수르머이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에는 왕립 헝가리 국방성 차관을 맡고 있었다.
수르머이는 헝가리 자위대 제38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1914년 말 카르파티아 전선에서 벌어진 우족 산맥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그의 부대는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혹한의 추위를 견디며 러시아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냈다. 이 공로로 수르머이는 후에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5년 5월, 수르머이는 자신의 이름을 딴 "수르머이 군단"을 이끌고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 참전했다. 여기서 수르머이는 독일군과 함께 타르누프 근처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코마루프 전투에서도 수르머이 군단은 돌파구를 열어 전선을 동쪽으로 밀어냈다. 1916년 6월, 러시아군의 대규모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자 수르머이의 군단도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는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신속히 전선을 안정시켰고, 7월 말에는 반격을 개시해 일부 지역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1917년 2월, 수르머이 군단은 제24군단으로 개편되었고, 수르머이는 자무엘 폰 허저이의 후임으로 헝가리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행정가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헝가리군 창설을 주장했고, 헝가리 장병들의 처우 개선과 군 현대화에도 힘썼다. 또한 전쟁 말기 악화일로를 걷던 병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공로로 1917년 8월에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수르머이는 1918년 10월까지 국방장관직을 수행했다.
수르머이 장군[1]이 1917년 8월 17일 슐로스 바르톨츠 궁전[2]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역사상 180번째 수여식에서 쾨베시 장군과 아르츠 장군이 악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수르머이는 1919년 잠시 체포되기도 했다. 1921년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작가로서 여러 저서를 남겼다. 1941년에는 헝가리에서 명예 대장(vezérezredes)으로 임명되었다. 수르머이는 1945년 2월 26일 부다페스트에서 84세로 사망했다. 그는 헝가리 최고의 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