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1853년 11월 20일 케른텐 공국의 바트 블라이베르크((Bad Bleiberg))에서 황립 광산 감독관 겸 측량사이었던 체코계 가문 출신 파울 포티오레크(Paul Potiorek)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는 장성하여 빈 공과군사학교와 군사기술학교를 졸업했다. 1871년, 소위로 임관하여 제2공병연대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1877년부터 참모부에서 근무했으며, 1879년 대위로 진급했다. 1883년부터 제17보병연대에서 복무했고, 1886년에 다시 참모부로 복귀했다. 1887년에는 소령, 1889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892년 대령 진급과 함께 작전국장이 되었다. 1898년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부다페스트의 제64보병여단 사령관이 되었다. 1902년에 참모총장 대리로 임명되었으나, 1906년 페르디난트 대공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참모총장에 선임 된 콘라트가 임명되면서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1911년 보스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포티오레크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적 운동을 강경하게 탄압했으며, 총독부의 민정과 군정 모두를 장악했다. 1913년, 보스니아에서 열리는 군사훈련을 시찰하도록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초청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방문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차량에 동승했는데,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저격으로 대공 부부가 사망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 프린치프는 나중에 두 번째 총알은 포티오레크를 겨냥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포티오레크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으며,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적 보복을 강력히 주장했다.
포티오레크는 발칸 전선 총사령관이자 제6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포티오레크는 제6군을 이끌고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보병대장의 제5군과 협력하여 1914년 8월부터 12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세르비아 침공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특히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에서 대패했으며, 약 45만의 병력 중 20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7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전략적 실수와 병참선 확보 실패가 주요 패인으로 지목되었다. 콜루바라에서 당한 패배의 여파로 포티오레크는 프랑크보병대장과 함께 1914년 12월 22일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1915년 1월 1일부로 강제 예편되었다.
퇴역 후에는 클라겐푸르트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사라예보 사건 당시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눕혀졌던 소파를 죽을 때까지 보관했다고 한다. 1933년 12월 17일 여러 차례의 뇌졸중 끝에 사망했다. 유해는 클라겐푸르트 안나비흘 묘지에 안치되었다가 1966년 비너노이슈타트 테레지아 군사아카데미 묘지로 이장되었다.
군사 전문가들은 포티오레크를 고위 지휘관으로서 능력이 부족했던 인물로 평가한다. 특히 세르비아 전역에서 보여준 전략적 실수들이 대표적이다. 병참선 확보를 소홀히 하고 부하들을 과도하게 혹사시켰으며, 험준한 지형을 무시한 채 무리한 공세를 감행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치적으로는 보스니아 총독 시절 세르비아계에 대한 강경책을 고수했고, 이는 민족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라예보 사건 당시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그의 실패는 개인의 무능력뿐만 아니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부 내의 분열된 지휘체계와 정치적 갈등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