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에두아르트 폰 파어는 1837년 12월 5일 빈에서 태어났다. 파어 가문은 북이탈리아 지역 출신으로, 중세 말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황실의 우편 담당관(Postmeister)을 관장하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 파어 가문은 세습적으로 황실 우편업무를 담당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쌓아갔고, 점차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이들은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남작과 후작 작위를 받았고, 보헤미아와 슈타이어마르크 등지에 대규모 영지를 획득하며 오스트리아 귀족 사회의 상층부로 올라섰다. 18세기 후반에는 빈에 파어 궁전을 건립하는 등 명문 귀족 가문의 반열에 올랐고, 19세기 들어서는 에두아르트 폰 파어와 같이 제국의 고위 관직을 맡는 인물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제4대 파어 후작 카를 폰 파어(Karl von Paar, 1806-1881)였고, 모친은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이다 레오폴디네 소피 마리 요제핀 프란치스카 공주(Ida Leopoldine Sophie Marie Josephine Franziska, 1811-1884)였다.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파어는 제1울란연대에 배치되어 기병에서 계속 복무하다가 1866년 4월 15일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보좌관(Ordonnanzoffizier)이 되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8월 18일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전속부관이 되었다. 1869년에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다시 황립 및 왕립 기병 연대 "황제 페르디난트 I" 제4연대로 돌아갔지만, 1884년에 중장으로 진급한 파어는 다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로 돌아갔고, 1887년에는 고급부관이 되었다.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고문 중 한 명인 파어는 조직적, 개인적 및 정치적 측면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군사적 견해와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폰 파어는 1891년 11월에 기병대장(General der Kavallerie)으로 진급했고, 1916년 2월 27일에 신설된 계급인 상급대장에 임명되면서 경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에두아르트 폰 파어는 1916년 11월 21일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사망하자 황제의 고급부관직에서 물러났다. 새로 즉위한 카를 1세 황제는 보다 젊은 측근들을 등용하면서 파어를 대기 인원으로 처리했고, 1918년 그는 공식적으로 퇴역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수립되는 혼란기에 폰 파어는 빈에 머물며 여생을 보내다가 1919년 2월 1일 81세의 나이로 빈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2월 4일 빈 시내 볼차일레 거리에 있는 파어 궁전(Palais Paar)에서 그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다수의 귀족과 군 인사들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이후 관은 보헤미아 남부의 베힌으로 옮겨져 파어 가문 소유의 베힌 성(Schloss Bechyně) 내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말기의 대표적 군 지도자였던 파어는 황제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제국의 군사·정치 분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제국의 몰락과 함께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후 오스트리아 귀족계급은 특권을 상실했고, 파어 궁전(Palais Paar) 역시 가문의 소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