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카를 폰 플란처발틴 Karl von Pflanzer-Baltin | |
이름 | Karl Freiherr von Pflanzer-Baltin 카를 폰 플란처발틴 남작 |
출생 | 1855년 6월 1일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페치 |
사망 | 1925년 4월 8일(향년 69세) 오스트리아 공화국 빈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5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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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2. 생애
1855년 6월 1일 헝가리 페치에서 세습귀족이자 군 법무관이었던 빌헬름 플란처(Wilhelm Pflanzer)의 아들로 태어났다.[1] 마르부르크와 아이젠슈타트의 생도학교를 거쳐 1867년부터 1871년까지 비너 노이슈타트에 위치한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다녔고, 1875년에 제1용기병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파르두비츠의 여단장교학교에서 공부했고, 1878년부터 1880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참모장교 교육을 받았다. 1880년에 중위, 1884년에 대위, 1891년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참모부에서 근무하다가 제2울란연대로 전속되었고 1894년에 중령이 되었다. 이후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 교관으로 근무했다. 1897년에는 대령 진급과 함께 제11군단 참모장이 되었다. 1903년에 소장 진급과 함께 제32보병여단장이 되었고, 1905년에는 제31보병여단장이 되었다. 1907년 중장 진급과 함께 브륀의 제4보병사단장이 되었다. 이후 군단장교학교 총감독관이 되어 평범한 군 경력을 쌓다가 퇴역을 앞두게 되었지만,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퇴역이 연기되었다.2.1. 제1차 세계 대전
플란처발틴은 1914년 10월 3일에 기병대장으로 진급했고 드니에스터강에 있던 프란처발틴 집단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대부분 국토방위군 부대로 구성된 증강된 군단으로 당시 최남단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부코비나에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의 군대를 교묘한 작전으로 저지했다. 1915년 2월 공세에서는 독일 제국군의 증원을 받아 체르니프치를 러시아군으로부터 탈환했고 러시아 제8군의 포위 시도를 잘 빠져나갔다. 이 공로로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십자장을 받았으며, 1915년 5월 1일부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7군 사령관이 되었다.1916년 5월 1일에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제7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해야 했고 러시아군은 동부 부코비나와 체르니프치를 다시 점령했다.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916년 7월에 동부전선을 다시 안정화시키기 위해 여러 번의 힘들고 피해가 큰 전투를 치러야 했다. 플란처발틴의 지휘 하에 독일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보다 더 큰 손실을 입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양국 군 수뇌부 간에 심각한 불화가 발생했고, 결국 플란처발틴은 희생양이 되어 1916년 11월에 공식적으로 "건강상의 이유로 자발적" 은퇴를 했다.
하지만 1917년 3월에 카를 1세 황제에 의해 다시 복귀되어 보병감독관이 되었고 1918년 7월 13일에는 알바니아의 모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플란처발틴은 프랑스-이탈리아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까지 감행했으나 말라리아로 인한 큰 손실로 진격이 중단되었다. 1918년 9월 불가리아가 항복하면서 이 전선이 붕괴되자 카타로의 옛 국경선까지 질서정연하게 철수를 지휘했다. 전후 1918년 12월 1일부로 은퇴했고 1925년 4월 8일 빈에서 사망했다.
3. 평가
플란처발틴은 전술적 재능이 뛰어난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동부전선에서 보여준 방어전과 기동전에서의 능력이 돋보였다. 그는 부하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고 병사들의 훈련과 교육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여준 것처럼 대규모 현대전에서는 한계를 보였다. 그럼에도 1918년 알바니아에서 마지막까지 질서있는 철수를 지휘한 능력은 높이 평가받았다. 그의 제국상급대장 진급은 동부전선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전과 부코비나 탈환 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로 볼 수 있다.4. 여담
플란처발틴의 둘째 아들인 에르빈(Erwin von Pflanzer Baltin, 1893-1915)이 동부전선 초기에 전사하면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겪기도 했다. 당시 이 전선에서 플란처발틴 외에도 아들을 잃은 장군들이 여럿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원수, 자무엘 폰 허저이 제국상급대장,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원수가 있었다.[1] 1893년에 귀족 작위를 받은 아버지를 따라 에들러 폰 프란처라는 이름을 쓰다가, 1898년에 자식이 없던 외삼촌 요제프 발틴 남작(Josef Freiherr von Baltin)의 작위를 물려받아 플란처-발틴 남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