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일반참모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안톤 리포슈차크는 1863년 4월 9일 오스트리아 제국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세케이우드바르헤이(Székelyudvarhely)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전사한 오스트리아 제국군소령 요한 리포슈차크(Johan Lipošćak)였다. 리포슈차크는 쾨세그와 흐라니체(Hranice)의 사관학교를 거쳐 1880년부터 1883년까지 비너노이슈타트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다녔고, 1883년 소위로 아그람의 제53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빈의 전쟁학교에서 수학했고, 이후 참모중위가 되었다. 테레진(Terezín)의 제58보병여단에서 근무했고 1891년부터는 빈의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1892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1895년에는 모스타르의 제18보병사단으로 전출되었고, 1897년에는 제82보병연대로 옮겼다. 1898년에는 소령이 되어 다시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1901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해 잠시 아그람에서 근무했고, 1903년부터는 황립 및 왕립 전쟁성 의전과에서 근무했다. 1905년에는 대령이 되어 사라예보의 제15군단 참모장이 되었다. 1909년 가을에는 사임한 보스니아 총독 마리안 바레샤닌(Marijan Varešanin von Vareš, 1847-1917)의 업무를 대행했고, 보스니아와 달마티아에 주둔한 제15, 16군단의 감찰관을 맡았다.
1910년 소장으로 진급해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자그레브의 제72보병여단장을 지냈다. 1913년 10월부터는 야로스와프(Jarosław )의 제2보병사단장이 되었고, 1914년에는 중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동부전선에 배치되었고, 갈리치아 전투와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 참전했다. 1915년 여름부터는 제42향토보병사단을 지휘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1916년 2월 잠시 현역에서 물러났다가 1917년 3월 다시 복귀해 루마니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1917년 8월 1일 육군 보병대장이 되었고, 1917년 말부터 1918년 초까지는 제9군단장을 지냈다.
1918년 2월부터 11월까지는 루블린 총독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후 자그레브로 돌아가 새로 수립된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벤 왕국의 국민평의회에 자신의 능력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1918년 11월 22일 체포되어 내란 선동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른바 '리포슈차크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태는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스베토자르 프리비체비치(Svetozar Pribićević, 1875-1936)의 사주로 조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1919년 1월 1일부로 정식 퇴역했고 며칠 뒤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저축은행 사무원으로 일했으며, 1924년 7월 22일 자그레브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