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191919>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8da9c5> 원수 Generalfieldmarschall / Großadmiral독일어 Tábornagy / Főtengernagy헝가리어 | |
육군 제국원수 | <colcolor=#000,#fff> 빌헬름 2세 | 에드워드 7세 | 프리드리히 대공ok, s | 오이겐 대공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c |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m |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ok | 프란츠 로어 폰 덴타 |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폰 보이나 | 메흐메트 5세 |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 |
상급대장 Generaloberst독일어 Vezérezredes헝가리어 | ||
육군 상급대장 |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c |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 | 에두아르트 폰 파어 | 아르투어 폰 볼프라스 | 프리드리히 폰 게오르기 | 카를 폰 플란처발틴 | 비크토어 단클 폰 크라시니크 |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 | 파울 푸할로 폰 브를로크 | 카를 크르지테크 | 레오폴트 잘바토어 대공 | 카를 대공ok | 카를 폰 키르히바흐 | 아돌프 폰 레멘 추 바렌슈펠트 | 카를 게오르크 후인 | 헤르만 쿠스마네크 폰 부르크노이슈테텐 | 벤젤 폰 부름 | 자무엘 폰 허저이 | 레오폴트 폰 하우어 | 비크토어 폰 쇼이헨슈투엘 | 슈테판 사르코티치 폰 로프첸 | 요제프 로트 폰 리마노바와파누프 |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s, c | 후고 마르티니 폰 마와스투프 | 루돌프 슈퇴거슈타이너 폰 슈타인슈테텐m | 알로이스 쇤부르크하르텐슈타인 | |
해군 대제독 | 빌헬름 2세* |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 카를 1세ok | 안톤 하우스† | |
병과대장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독일어 Gyalogsági tábornok, Lovassági tábornok, Táborszernagy / Tengernagy헝가리어 | ||
육군 병과대장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기병, s, † | 페터 페르디난트 대공보병 | 블라지우스 폰 셰무아보병, c |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보병 | 오스카르 포티오레크포병 | 알프레트 크라우스보병 | 게오르크 폰 레만기병 | 루돌프 폰 브루더만기병 | 아돌프 폰 브루더만기병 | 모리츠 아우펜베르크 폰 코마루프보병, m |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보병 | 카를 쿠크포병 | 샨도르 수르머이보병 | 하인리히 쿠머 폰 팔켄펠트기병 | 카를 스코티보병 | 페르디난트 골리아 폰 즐로타 리파포병 | |
해군 제독 | 카를 슈테판 대공 | 메사로시 카롤리 | |
중장 Feldmarschallleutnant / Vizeadmiral독일어 Altábornagy / Altengernagy헝가리어 | ||
육군 중장 | 요제프 메츠거 | 알베르트 아벨레 폰 운트 추 릴리엔베르크 | |
해군 부제독 | 호르티 미클로시 | |
소장 Generalmajor / Rear Admiral독일어 Vezérőrnagy / Ellentengernagy헝가리어 | ||
육군 소장 | 게오르크 도마슈니안 | 율리우시 비야크 | 니콜라우스 로고샨 폰 카란제베슈 | 에두아르트 피셔 | 알프레트 폰 발트슈테텐 | |
해군 소제독 | - |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일반참모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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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보병대장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 Maximilian Csicserics von Bacsány | |
이름 | Maximilian Csicserics von Bacsány 막시밀리안 치체리치 폰 버차니[1] |
출생 | 1865년 3월 3일 |
오스트리아 제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아라드 | |
사망 | 1948년 11월 8일 (향년 83세) |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자그레브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984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보병대장 (General der Infanterie)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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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보병대장. 이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오스트리아 대표로 참석한다.2. 생애
막시밀리안은 1865년 3월 3일, 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그나츠 치체리치(Ignaz Csicserics)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대령이였고, 어머니 아우구스테(Auguste)도 군인 집안의 딸이였다. 이그나츠 치체리치는 막시밀리안이 12살이였을적에 헝가리에서 귀족이 되었고 폰 버차니 성을 하사받아서 이름을 치체리치 폰 버차니로 바꿨다.막시밀리안은 1884년,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Theresianische Militärakademie)을 졸업하였고 제38보병연대 소위로 임관한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다가 중령 시절에 러일전쟁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관단 자격으로 만주에 있는 알렉세이 쿠로팟킨 대장의 본부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치체리치는 이 러일전쟁을 주목했다. 실제로 러일전쟁은 보어 전쟁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왜냐하면 이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은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일본 제국에게 패배를 했고, 이로 인해 유럽 전역의 육군 및 해군 지도자들은 전술, 작전 원칙, 무기 체계를 재검토하게 되었다. 이후 치체리치는 콘라트의 전술 철학에 대한 주요 비판자로 떠오르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기반으로 한 전술 비전보다는 만주 전쟁에서 경험한 전장의 현실적인 상황을 기반으로 한 전술 비전이 미래 전쟁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러일전쟁은 장기전으로 치러진 첫 번째 전쟁으로, 기존의 측면 공격은 불가능했다. 이에 치체리치는 미래의 전쟁이 보병의 정면 공격이 지배적일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군은 높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와 같은 공격을 시도했고 승리를 거뒀다. 최첨단 무기를 사용하고 전례 없는 화력을 발휘했지만, 러시아군의 참호를 마지막으로 공격할 때는 총검을 썼는데, 이로 인한 사상자 비율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보다 두 배 높았다. 새로운 무기인 기관총 때문에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져서, 치체리치는 공격 시에는 적은 인원으로 구성된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구성 형태가 얼마나 얇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서만 의견 차이가 있었다. 치체리치는 또한 보병 공격에 대한 포병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치체리치는 최신 무기인 경기관총을 비롯하여 참호전, 야간 공격과 같은 전술적 혁신을 포함한 전장의 모습을 상상했다.
치체리치는 만주에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공격적인 정신과 첫 전투의 중요성을 믿었다. 그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실패한 이유를 분석한 콘라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한 이유는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초기 방어 자세가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초반 방어 자세가 공격적 파워를 약화시키고 적의 지휘관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경고를 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한 번 상실되면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공격이 동기부여에 좋다는 주장이 현대화된 화력과는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전쟁 후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군의 증언으로, 만주에서 러시아군의 주요 거점을 공격했을 때 이미 기관총의 압도적인 화력 아래에서 한 번 진격한 병사들은 두 번째로 진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콘라트 역시 기관총 시대 이전부터 이와 유사한 현상을 주목하였으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베테랑 프러시아 부대조차도 막강한 화력앞에서 큰 손실을 견딜 용의가 없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치체리치가 1908년에 선전목적으로 발간한 책자에서 이러한 아이디어가 등장한 후, 그가 연구한 작품을 발표한 이후 1890년대 초반의 콘라트와 같은 방식으로 어린 장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흥미롭게도 콘라트는 일반참모장으로서 치체리치의 책자 출간을 막거나 치체리치를 압박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견해라도 군 내 토론을 위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치체리치의 주장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콘라트는 치체리치가 만주에서 관찰한 바가 자신의 지론을 오히려 입증해준다고 생각했다. 가령 일본군의 대규모 정면공격과 돌격 과정에서의 백병전 활용 등은 콘라트가 그간 역설해온 정신력과 공세 정신의 중요성을 방증한다고 본 것이다.
나중에 그는 만주에서 얻은 경험을 콘라트 일반참모장과 함께 기동전에서 요새의 역할과 중포병 사용에 통해서 구현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콘라트가 일반참모장에서 물러난 뒤 후임으로 거론되었던 인물들 중에는 치체리치의 이름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오스트리아 군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참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17년 12월 14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열린 소비에트 러시아[2]와의 평화 협상에서 오스트리아 군 대표로 나섰다. 그러나 이후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