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보병대장 루카스 슈냐리치 Lukas Šnjarić | |
이름 | Lukas/Luka Šnjarić 루카스/루카 슈냐리치 |
출생 | 1851년 6월 22일 오스트리아 제국 크로아티아 왕국 차나크 |
사망 | 1930년 1월 21일(향년 78세) 루마니아 왕국 클루지나포카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향토방위군 (1870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보병대장 (General der Infanterie) |
주요 지휘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헌병대 슈냐리치 여단 제42향토보병사단 제59보병사단 제13군단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세르비아 전역 - 브루실로프 공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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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군인이자 보병대장. 크로아티아계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여러 사단을 지휘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아그람의 제13군단 사령관을 지냈다.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순간에도 참여했다.2. 생애
루카스 스냐리치는 1851년 6월 22일 차나크(Čanak)의 국경수비대 가정에서 태어났다. 스냐리치는 오토차츠(Otočac)의 연대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1870년 하사관으로 제1보병국경수비연대에 배속되었고, 1874년 소위로 제51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1882년에는 연대 부관으로서 보스니아의 소요 진압에 참가했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제4보병연대에서 복무하며 병력 증강에 기여했다. 1903년에는 중위, 1906년에는 중령이 되었고, 1907년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제2보병연대장이 되었다. 1909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헌병대장이 되었고, 191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2.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9월 제6군 제16군단 예하의 자신의 이름을 딴 여단을 지휘했다. 그의 혼성여단은 9월 3주 동안 드리나강 인근의 보란(Boran) 산맥 남동쪽에서 참호선을 준비했다. 9월 4주차 말에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군사령관은 제15군단과 제16군단을 드리나강과 보스니아의 보급로에 더 가까운 이 새로운 방어선으로 후퇴시켰다. 이후 비셰그라드(Višegrad)에서 보스니아 남동부의 방어를 조율했다.그는 세르비아에 대한 첫 공세에서 냉혹한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의 지원여단은 통솔력이 약하고 무질서했으며, 슈냐리치의 명령 집행력 부족은 매우 일찍부터 드러났으나, 1914년 11월 15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5년 3월 러시아 전선에서 신설된 제59보병사단장이 되었다가 7월에는 사단과 함께 이손초 전선으로 이동했다. 1915년 9월에는 스렘(Srijem) 지역으로 돌아와 베오그라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회복 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점령 작전에 참가했다.
1916년 2월에는 드네스트르강 인근의 제42향토보병사단장이 되었다. 그때까지 무결점이었던 그의 사단은 같은 해 6월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부코비나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량 탈영 사태가 발생하자 슈냐리치는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후퇴해야 했다. 제42사단은 제7군 전체와 함께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밀려났고, 이후 큰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예비병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럼에도 슈냐리치는 1917년 3월 보병부대 총감찰관으로, 1918년 5월 1일에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7월에는 휴가를 떠났으나 10월에 다시 소환되어 제13군단장이 되었다.
2.2. 자그레브에서의 정변
1918년 10월 26일 남슬라브인 민족평의회(Narodno vijeće SHS)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사령관들인 슈냐리치와 미하엘 미할예비치(Mihael Mihaljević)에게 민족평의회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문의했다. 이들은 황제에 대한 맹세에 구속되어 있어 카를 1세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답했고, 카를 1세는 즉시 이들의 맹세를 해제했다. 10월 28일 슈냐리치는 부다페스트의 향토방위군 장관에게 상황이 절망적이고 군사 상황이 재앙적이라고 보고했다. 오시예크 주둔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나시체(Našice)가 불타고 있으며 약탈과 방화가 횡행하고 있다고 전했다.10월 29일 자그레브에서는 크로아티아 의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날 의원들은 첫 회의에서 헝가리 및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단절을 결의할 것이라는 점이 알려져 있었다. 이 크로아티아 역사의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자그레브의 성 마르코 광장(Trg svetog Marka)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전날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모표를 크로아티아 군모표로 교체한 크로아티아 장교들[1]도 광장으로 왔다. 제25향토보병연대와 제53보병연대의 군악대가 군인들, 장교들과 함께 등장하자 큰 환호가 터져나왔다. 이는 공동군 사령관 슈냐리치 보병대장과 향토방위군 사령관 미할예비치 중장이 크로아티아 민족운동에 동참했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모든 병력과 함께 민족평의회의 지휘를 받아들였고, 의사당에 들어가자 의원들과 방청석의 시민들은 박수와 함께 "민족군 만세!"를 외쳤다. 슈냐리치는 의회에서 안툰 미할로비치(antun mihalović) 총독 옆에 앉았다. 그러나 슈냐리치는 민족평의회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10월 30일 해임되어 플리발리치(Plivalić)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그는 루마니아의 클루지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0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1] 대부분은 예비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