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방군 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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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Luftwaffe | 1940 헤르만 괴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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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Kriegsmarine | 1939 에리히 레더1943 카를 되니츠 | |||
공군 Luftwaffe | 1940 알베르트 케셀링 | 에르하르트 밀히 | 후고 슈페를레1942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1945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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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남작[1] Eduard Freiherr von Böhm-Ermolli | |||
이름 | Eduard Böhm 에두아르트 뵘 ↓ Eduard von Böhm-Ermolli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2] ↓ Eduard Freiherr von Böhm-Ermolli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남작[3] ↓ Eduard Böhm-Ermolli 에두아르트 뵘에르몰리[4] | ||
출생 | 1856년 2월 12일 | ||
교황령 안코나 (現 이탈리아 마르케주 안코나) | |||
사망 | 1941년 12월 9일 (향년 85세) | ||
독일국 주데텐란트 대관구 트로파우 (現 체코 모라바슬레스코주 오파바) | |||
묘소 | 오파바 시립묘지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 ||
1875년 ~ 1918년 | |||
독일 국방군 | |||
1938년 ~ 194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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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백엽 푸르 르 메리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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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원수[6]. 1940년 10월 30일, 명예 독일 국방군 원수가 되었다.2. 생애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Eduard von Böhm-Ermolli)는 원래 에두아르트 뵘(Eduard Böhm)이라는 이름으로 1856년 2월 12일 이탈리아 중부 교황령 안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 뵘(Georg Böhm, 1813~1893)은 당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인이었다. 게오르크 뵘은 1849년 노바라 전투의 참전용사였으며, 1885년 은퇴 후 귀족 작위를 받았다. 작위를 받으면서 부인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의 혼전 성씨인 '에르몰리(Ermolli)'를 합쳐 "폰 뵘에르몰리(von Böhm-Ermolli)" 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이후 뵘에르몰리는 장크트푈텐의 사관학교에서 기초 군사교육을 받았고, 비너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훈련을 받았다. 1875년 9월 1일 소위로 임관하여 제4용기병연대에 배속되었고, 이후 참모장교로 근무하였다. 1897년 5월 대령으로 진급한 뒤 1901년 4월까지 제3울란연대장을 역임하였다. 1903년 5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6기병여단을 지휘하였고, 1907년 11월 중장이 되었다. 1912년 5월 1일 기병대장으로 진급한 그는 크라쿠프에 주둔한 제1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7월,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제2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세르비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제2군은 동부전선으로 급히 이동해 독일 제국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갈리치아 전투가 벌어졌는데, 제1군, 제3군, 제4군이 러시아 제국군에게 패퇴하는 동안 뵘에르몰리의 제2군만은 선전했다. 그러나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렘베르크 전투에서 패배하여 제2군도 산(San)강 너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에서 동맹군이 승리를 거두자, 뵘에르몰리의 제2군도 반격에 나섰다. 6월 그로데크 전투에서 승리한 후 렘베르크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1915년 9월부터는 자신의 이름을 딴 '뵘에르몰리 군집단'도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 부대에는 독일 남부군도 배속되어 있었다.
1916년 5월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고, 한달 후인 6월 4일에 발발한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동부전선 남부를 책임졌던 뵘에르몰리 군집단은 러시아군의 공세를 가까스로 저지해내며 선전했다. 이듬해 7월 케렌스키 공세 때도 독일 제국군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8월에는 체르노비치를 탈환하기도 했다.
1918년 1월 31일 마침내 제국원수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그의 부대는 1918년 3월 우크라이나 점령에 투입되어 키예프와 오데사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뵘에르몰리는 독일군 장교들과 마찰을 빚는 바람에, 같은 해 5월 16일, 카를 1세 황제에 의해 해임되었고, 지휘하던 부대도 오데사에서 해체되었다.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었는데, 그는 고향인 체코슬로바키아의 트로파우에 은거하였다. 비록 체코슬로바키아군에는 복무하지 않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예비역 장군으로 우대하는 등 각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1928년에는 명예직으로 체코슬로바키아군 원수(Armádní generál) 계급을 받기도 하였다. 1938년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 지역이 나치 독일에 병합되면서, 뵘에르몰리는 독일 국적을 갖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82세였다.
원수 정복을 입은 말년의 모습
1938년 나치 독일이 그가 살던 수데텐란트를 점령하자 독일 시민이 되었고, 1940년 10월 31일 독일군 원수로 명예진급하였다.[7]
1941년 3월, 히틀러 사열을 준비중인[8] 뵘에르몰리, 우측에 선 인물들은 에리히 레더, 발터 폰 브라우히치, 빌헬름 카이텔, 에르하르트 밀히,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힘러.
1941년 사망하자 그의 장례는 빈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뵘에르몰리'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가문이 귀족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3] 1917년 남작 작위를 받은 후의 이름.[4] 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귀족 접두어가 철폐되면서 개명한 이름.[5] 복무 이력 없이 명예계급만 부여됐다.[6]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7] 임명 후 28 보병 명예연대장을 맡았다.[8] 1941년 12월 사망전까지, 일정에 이상이 없으면 보통 사열식 및 행사에는 보통 참석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