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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폰 브라우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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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제3대 독일 국방군 육군최고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FM Walther von Brauchitsch
파일:Bundesarchiv_Bild_183-E00780,_Walther_von_Brauchitsch.jpg
이름 Walther Heinrich Alfred Hermann von Brauchitsch
발터 하인리히 알프레드 헤르만 폰 브라우히치[1]
출생 1881년 10월 4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948년 10월 18일 (향년 67세)
독일국 함부르크
복무 독일 제국군(프로이센군) (1900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 (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유고슬라비아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공방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훈일등욱일대수장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진급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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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deutschelobby.files.wordpress.com/magical-snap-2013-03-05-23-32-001.png 파일:external/media-2.web.britannica.com/134765-004-8D43525D.jpg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소전쟁 초기에 활약한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전임 육군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이 추문에 연루되어 해임된 후 육군총사령관이 된 뒤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실력 있는 장교를 대거 발탁하여 2차 대전 초기 독일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모스크바 전투의 패전 이후 해임된 이후에 다시는 군적에 복귀하지 못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 제1차 세계 대전

1881년 10월 4일 실레시아 출신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 베른하르트 폰 브라우히치는 프로이센 왕국기병대장이었고 아들인 발터 역시 군인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1895년 포츠담 소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1900년 포병소위로 임관하였다. 9년 뒤인 1909년에는 중위로 진급하였고 1910년에는 엘리자베트 폰 카르슈테트(Elizabeth von Karstedt)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1913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대위였던 브라우히치는 육군 제16군단의 참모장교로 배속되었다. 이후 베르됭 전투 등 치열한 전투를 겪으며 실전 경험을 쌓아 나갔고 전공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1918년에는 소령으로 진급,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2.2. 전간기

독일 제국이 패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강제로 군축이 시행되었으나 브라우히치는 군에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종전 직후에는 전쟁성의 포병부에서 근무하였다. 이때 자신의 전공 분야인 포병 교리를 발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25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였고, 1927년에는 대령이 되어 육군 훈련부로 배속되었다. 라팔로 조약 체결 이후 병무국 교육과장으로서 소련에 6주간 머물며 소련군의 기갑 부대를 접하고 이를 활용한 기동전 교리를 적극 도입하게 된다. 이때 그를 수행한 주요 인물이 일반참모로 병무국에 근무 중이었던 발터 모델. 4년 뒤인 193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제3제국을 수립할 때 당시 중장이던 브라우히치는 동프로이센 지방을 관할하는 사령관이었다. 이때 그는 동프로이센에서 활동하는 나치당원인 에리히 코흐(Erich Koch)[2]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브라우히치는 처음부터 나치당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도 있던 데다가 그는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유화 정책을 펼쳐 주민들에게 인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인종 정책을 펼치는 나치당이 활개치게 방조해서는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것도 있었다. 코흐와 브라우히치의 갈등은 계속 이어지는데 결국 브라우히치는 하인리히 힘러와도 마찰을 겪게 되었다. 힘러가 동프로이센 지방에 있는 군대를 해산시키고 그 자리를 무장친위대 인원들로 채우려 했는데[3] 브라우히치가 그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무장친위대가 진주하는 것은 무산되지만 힘러는 앙심을 품고 이를 히틀러에게 일러바쳤다. 그러나 별다른 일은 없었고 1936년에는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런데 이때 히틀러와 브라우히치의 관계를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브라우히치는 1910년에 결혼해 자녀까지 두고 있었는데 나치당에 반대했던 그가 출세를 위해 아내를 버리고 나치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젊은 여성과 결혼하려고 한 것이다. 히틀러는 타인이 이혼하는 것을 굉장히 좋지 않게 보았지만[4] 브라우히치가 이혼하려 드는 것은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재혼 비용으로 8만 마르크를 빌려주었다. 결국 브라우히치는 아내를 버리고 재혼에 성공하며 자신과 알고 지내던 독일군 장성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원래 그는 나치당 자체는 혐오했으나 재군비 정책에는 찬성하던 인물이었고,[5] 히틀러의 연설 능력에 반해 히틀러도 개인적으로 지지하던 상황이었다. .
파일:external/www.nndb.com/brauch-sm.jp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e742f29896e009affd931dbb89cdc00.jpg
▲(좌)컬러로 복원한 사진. 1939년 카셀에서 열렸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행사때의 경례모습이다.](우) 1939년 9월 25일타임지 표지로 선정된 브라우히치.

1938년에는 육군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이 동성애자라는 일명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터졌고, 독일 국방군 내에서 고위직에 있던 프리취 장군,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장군이 쫒겨나고 내부 인원이 물갈이되며 국방군은 그 전보단 확연히 히틀러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브라우히치는 프리취 장군의 뒤를 이어 육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6] 동시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나치당에 반대했던 루트비히 베크처럼 그도 안슐루스뮌헨 협정에 반대했으나 뮌헨 협정이 성공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에게 합병된 후에는 국방군 내 분위기가 대외적으로 매우 호전적인 모습을 띠게 되고 브라우히치도 이에 동조하게 되었다. 루트비히 베크는 브라우히치에게 '만약 히틀러가 계속 체코슬로바키아를 넘본다면 육군총사령관으로서 모든 육군 일반참모들을 사퇴시킬 것'을 계속해서 촉구했지만 결단력이 없던 데다 히틀러에게 빚까지 지고 있던 상황인지라 브라우히치는 결국 체코 합병을 묵인해 버렸다.

2.3. 제2차 세계 대전

2.3.1. 폴란드 침공 ~ 유고슬라비아 침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2001-0706-501,_Warschau,_Walther_v._Brauchitsch,_Adolf_Hitler.jpg
1939년 바르샤바에서 아돌프 히틀러(右)와 함께.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 브라우히치는 육군 총사령관이란 직위의 특성상 일선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침공 작전의 수립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고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때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에서 잡힌 포로들을 사형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폴란드 침공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 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하자 브라우히치와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는 패닉에 빠졌다. 당시 서유럽에서 최강의 육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를, 폴란드 침공이 끝난 지 1년도 안 된 데다가, 기갑 전력도 빈약했고 재정비가 크게 필요했던 독일군을 가지고 침공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 결국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를 암살해야겠다는 계획마저 세울 정도였다. 브라우히치는 히틀러를 만나 프랑스 침공 날짜를 미뤄 줄 것을 간청하지만 당연히 히틀러는 격노했고 브라우히치를 휘하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맹비난했다. 히틀러에개 크게 질책당하고 물러난 브라우히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슬프게도 현재 독일군 보병의 사기는 1차 세계대전 때보다도 떨어져 있다. 1917-1918년과 비슷한 불복종의 증상이 있어 왔다.
The aggressive spirit of the German infantry is sadly below the standard of the First World War ... [there has been] certain symptoms of insubordination similar to those of 1917–18."

그러나 웬일인지 히틀러가 침공 날짜를 뒤로 미루면서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 암살 작전을 일으키킬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결국 이 두 사람은 다시 침공 작전 수립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인 1940년에는 베저위붕 작전을 성공시켜 노르웨이, 덴마크를 정복했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 침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A집단군의 참모장으로 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기갑 부대를 주공 삼아 아르덴 숲을 돌파하자는 낫질 작전(Sichelschnitt)을 제출했다. 만슈타인의 상관이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동의하고 이것을 다시 육군 참모본부에 올렸으나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낫질 작전 자체가 실효성이 없고 지나치게 도박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만슈타인을 야전의 군단장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버려질 뻔한 낫질 작전이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면서 결국 채택되었고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낫질 작전을 적극 수용해야 했다. 낫질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프랑스 침공은 독일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침공 후 브라우히치는 원수로 진급했다.[7]

프랑스 침공 후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대영제국) 침공 계획을 수립했고[8] 브라우히치는 "영국놈들은 필패할 거임"이라 자신했지만 공군 루프트바페영국 공군보다 전력이 약해 제공권을 확실히 휘어잡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결국 바다사자 작전은 취소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도 독일 공군의 패배로 끝나 버렸다. 체면이 구겨진 브라우히치는 1941년에 개시된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성공시키며 이미지 회복에 성공하는 듯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군이 워낙 약체여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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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의 유적을 둘러보는 브라우히치(왼쪽에서 두 번째).

2.3.2. 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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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4월 빌헬름 카이텔(左), 브라우히치(中), 아돌프 히틀러(右).

한편 브라우히치는 군사 작전의 시행에 일일이 간섭하는 히틀러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브라우히치를 위시한 독일군 장성들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우크라이나키예프 일대에 경제적 가치가 높은 지하 자원이 많은 데 대해 눈독을 들이고 모스크바에 전략적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당연히 브라우히치는 격렬히 반대했으나 히틀러는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고 모스크바에 가해지는 공세는 불안정했다.

결국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고 페도어 폰 보크, 하인츠 구데리안의 후퇴를 허가한 책임을 물어 브라우히치는 육군 총사령관에서 경질되고 히틀러가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지병으로 심장병을 앓고 있던 브라우히치는 독소전쟁 기간 중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잦았고 육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된 이후에는 다시 히틀러를 만날 수 없었다. 히틀러는 브라우히치를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병자 같은 놈"이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고 다녔지만 정작 브라우히치는 와병 중에서 총사령관 업무를 수행했을 만큼 성실한 인물이었다.

이후에는 프라하에서 요양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9] 이후 히틀러에게 현역 복귀를 희망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45년에 종전을 맞이했다.

2.3.3. 나치즘 교육 및 학살 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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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브라우히치는 해군의 에리히 레더 및 공군의 괴링과 함께 나치즘 이론을 장병들에게 교육할 것을 합의했다. 이 결정은 곧바로 국방군 선전국에 수용되어 정훈교육 교재로 만들어졌으며 국방군 장병들에 대한 나치즘 사상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1941년 3월 브라우히치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를 약 3달 정도 앞두고 이런 연설을 했다.
모든 병력은 이 투쟁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것이며, 따라서 잔인함이 반드시 동반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출처
또다른 독일군 원수인 게오르크 폰 퀴힐러가 "이 전쟁에서 우리는 소련의 국경을 몇백 km 뒤로 후퇴시키는 정도로 끝내는 게 아니라, 아예 소련을 절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비슷하다. 국방군의 범죄는 상부의 이러한 묵인과 방조, 그리고 극단주의 조장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41년 6월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로 독소전쟁이 개막했고, 브라우히치는 여기서도 독일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며 소련군을 초기 대승에 공헌한다. 브라우히치는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독일의 괴뢰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여기서 폴란드 일대에서 벌어지는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학살 행위를 조장하거나 묵인했다. 반대하는 장교들에게는 따를 것을 강요했다. 특히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이 친위대 및 질서경찰들과[10] 모길료프 회의를 열어 민간인 학살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마련하자 브라우히치는 이를 크게 치하하며 다른 부대들에 배포하도록 독려했다.

2.4.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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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1월 25일 뉘른베르크에서의 브라우히치.

1945년 영국군에 체포된 브라우히치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브라우히치는 다른 4명의 장군과 연대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에 각서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독일 국방군은 히틀러에게 멋대로 휘둘렸던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고, 깨끗하게 전쟁만 수행했던 군대이며 유대인 학살 등을 저지른 것은 무장친위대였다"는 변명이다. 즉 지금까지도 많은 일반인들에게 퍼져있는 국방군 무죄론, 소위 깨끗한 국방군이란 거짓을 본격적으로 시전한 사람이다. 물론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뿐만 아니라 본인은 폴란드 단치히 우체국 전투 포로 총살 명령을 주체적으로 내렸으며 독소전쟁의 절멸 성격을 지지했던 자이니 어처구니 없는 개소리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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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의 브라우히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에 대한 예심이 진행되던 중 폐렴으로 인해 1948년 함부르크 소재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독일 잘츠기터(Salzgitter) 묘지에 묻혔다.

3. 평가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 이후 육군총사령관을 맡았던 국방군의 초기 주요 인물이며 전간기에는 포병 교리와 기갑 교리의 발전, 육군총사령관이 된 후에는 독일군의 기갑 전력 확충에 노력했고, 신분에 상관 없이 능력 있는 젊은 장교들을 대거 등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독일군이 연전연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발터 폰 라이헤나우, 빌헬름 카이텔 같이 과도하게 나치당을 추종하는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 따르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영국에서 브라우히치가 육군 총사령관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여론이 높았다고 한다. 그만큼 대전 중에 이미 영미연합군에도 잘 알려진 지휘관이고, 연합군 측에서도 브라우히치라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게다가 같은 참모장교 출신이던 프란츠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둘 다 히틀러가 작전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할더보다 브라우히치가 히틀러와 더 사이가 가까웠으므로, 작전에 관해서는 총참모장인 할더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관리자로서 히틀러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독일 육군 참모본부가 전략적 식견이 없다시피한 히틀러의 작전 개입을 브라우히치가 상대하고, 할더는 최대한 효율적인 방향으로 작전을 수립한 덕분에, 작전 독립성도 나름 확보하고 프랑스 침공에서부터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까지의 연전연승에 공헌했다. 명실상부 독일군 기갑전 신화의 일등 공신.

이렇듯 선진적인 교리를 일찌감치 받아들였고, 독단적인 할더와 달리[11] 총사령관으로서 장성들의 역할 배치도 잘 했고[12],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육군 총사령관에서 경질된 후에도 입원 중인 병상에서 총사령관 업무를 수행했을 만큼 독일군 장성들의 신망도 있었다. 구데리안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브라우히치의 해임을 진심으로 아쉬워 했다.

그러나 이혼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치게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공공연히 드러냈고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의 지위,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프랑스 침공독소전쟁 초반까지도 히틀러의 작전 개입에 경악하며 여러 번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고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패전 이후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중부집단군 지휘관들의 퇴각도 승인하는 결단력을 보였으나, 결국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에게 빚을 진 입장이었고 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1941년 12월의 패전 이후 해임된 브라우히치는 육군 원수로서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만다.

전후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국방군의 전쟁범죄를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책임 지는 대신, 이를 전면 부정하면서 국방군 무오설이라는 잘못된 전후 신화를 만들어내는 등 끝끝내 총사령관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결국 대전 초기에 보여줬던 뛰어난 지휘력과 행정력, 관리 능력까지 자신의 오명으로 가려지게 만들었다.

4. 기타

5. 진급 내역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브라우히치'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잔혹한 탄압 정책을 펼쳤던 전범[3] 당연히 유대인 등 나치당의 인종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몰살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4] 괴벨스도 한때 아내와의 불화로 이혼하고 싶다고 자주 하소연 했지만, 아내가 괴벨스 못지않은 나치 열렬지지자였던터라 히틀러가 절대 허락해주지 않았다.(...)[5] 제2제국 시절급의 군대 복원은 당시 독일 장군 전원의 공통된 염원이었다. 자신들 생전에 그게 이루어지리라 믿고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에서 승진 정체도 견디며 20년을 견뎌낸 사람들이니.[6] 원래는 히틀러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내정되었지만 라이헤나우가 알아주는 나치 추종자였던지라 국방군이 슈츠슈타펠과 동급의 나치당 휘하 사설 무장 조직으로 전락할 것을 염려한 장성들, 특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육군 총참모장으로 내정된 할더가 반발해 브라우히치가 육군총사령관이 되었다.[7] 이때 일본군 육군의 장성인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만난 적이 있다.[8] 이때 영국 침공이 성공했다면 브라우히치는 영국의 총독으로 임명될 계획이었다고 한다.[9] 루트비히 베크는 이 작전이 실패한 후 자살하였다.[10] 이때 친위대와 경찰 대표로 나온 이들이 바로 헤르만 페겔라인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였다.[11] 할더의 군 경력은 야전 경험이 전무했고, 이를 히틀러에게 비하당할 정도로 열등감이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야전 지휘관으로서 천재적인 모습까지 보인 만슈타인, 구데리안, 모델, 롬멜 등과 전부 사이가 안 좋았다. 사적으로 불화가 있다고 이를 인사 배치에도 적용하는 게 할더의 고질적인 단점이다.[12] 독소전쟁 이전까지 기갑사단 근무 경험이 전혀 없었던 발터 모델을, 할더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3기갑사단장에 임명한 것도 브라우히치이다. 물론 브라우히치는 이미 전간기에 모델과 함께 소련 카잔의 기갑학교에 다녀오는 등 모델이 초창기부터 기갑 교리를 연구해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13] 1932년 시즌에 메르세데스 SSLK를 타고 AVUS 서킷에서 승리한 이후 벤츠가 실버 애로우라는 별칭을 얻게 만든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