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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9:53:57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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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1943의 이탈리아 왕국과 1943~1945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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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A][2]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B]
파일: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기.svg
파일: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심볼.svg
당기 심볼
약칭 NSDAP
Nazi (멸칭)
영문명칭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창설자 안톤 드렉슬러
창당일 1920년 2월 24일
해산일 1945년 10월 10일
전신 독일 노동자당
후신 독일 사회주의국가당
당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군사조직 돌격대
친위대
청년조직 히틀러유겐트
소녀조직 독일 소녀 동맹
여성조직 국가사회주의여성동맹
역대 당수 안톤 드렉슬러[4] (1920년 ~ 1921년)
아돌프 히틀러 (1921년 ~ 1945년)
마르틴 보어만 (1945년)
이념 초기(독일 노동자당 시절)
혼합주의
푈키셔 내셔널리즘
드렉슬러주의
1920년대 중반~1945년
나치즘(파시즘)[5]
반공주의
반유대주의
반자본주의
제3의 위치
정치 스펙트럼 극우[6][7]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Völkischer Beobachter)
당원 수 20명 (1920년)
850만명 (1945년)

1. 개요2. 명칭 문제3. 역사
3.1. 1919년 ~ 1923년: 창당 초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가입3.2. 1923년 ~ 1926년: 뮌헨 폭동의 실패와 히틀러의 투옥3.3. 1926년 ~ 1932년: 대공황의 혼란을 틈타3.4. 1932년 ~ 1933년: 정치적 대승과 곧이어 찾아온 위기3.5. 1933년: 집권3.6. 1933년 ~ 1939년: 독재 정권의 군림3.7. 1939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몰락3.8. 종전 이후 부활 시도3.9. 현재3.10. 역대 선거 결과
4. 조직
4.1. 퓌러 대리 참모진, 당수부4.2. 퓌러 비서실4.3. NSDAP 최상급당재판소4.4. 국(Amt)
4.4.1. NSDAP 중앙정치위원회4.4.2. 조직국4.4.3. NSDAP 서기국, 지방정치본부 4.4.4. 법무국4.4.5. 재무국4.4.6. 선전국4.4.7. 언론국4.4.8. 홍보국4.4.9. 농업정책국4.4.10. 국방정책국, NSDAP 식민정책국장4.4.11. 대외정책국
4.5. 국회의원단
5. 구성 인원과 정치적 성향
5.1. 나치 당원들의 사회 계층5.2. 정치적 성향
5.2.1. 제3의 위치
5.3. 도덕적 해이
6. 전후 인식
6.1. 서유럽 및 미국6.2. 오스트리아6.3. 동유럽/발칸반도 국가들6.4. 북유럽6.5. 아시아6.6. 남아메리카
7. 기타
7.1. 제복과 집회, 다큐멘터리
7.1.1. 제복7.1.2. 건축7.1.3. 영상
7.2. 동물 사랑7.3. 창작물에서
8. 관련 인물9. 관련 문서
9.1. 사상9.2. 조직9.3. 상징9.4. 사건9.5. 작품9.6. 기타
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나치당 당원.jpg
1930년,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원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독일정당이다. 흔히 나치당으로 알려져 있다. 창설자는 안톤 드렉슬러이며[8] 당가는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이다.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인종주의, 군국주의 등을 중점 이념으로 내세웠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강력히 반대해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 아래 대공황 이후 독일 내에서 급성장하여 1932년 독일 국회 내 가장 거대한 정당이 되었으며, 1933년 수권법을 통과시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통해 나치 독일을 출범시켜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사실상 독일 내 유일 합법 정당으로서 군림했다.

본래 아돌프 히틀러는 군에서 정당 감시를 위해 나치당으로 파견을 왔다가 입당한 당원이였으나, 원래 창설자를 내쫓고 당을 장악하게 되었다. 원래의 당명은 독일노동자당이며 신비주의와 음모론을 신봉하는 툴레 협회와 연관이 있었다.

2. 명칭 문제

정식 약칭은 '엔에스데아페(NSDAP)'. 나치 독일에서는 보통 NSDAP(국가사회당)로 줄여서 칭했고[12] 아돌프 히틀러나 골수 나치들 사이에서나 풀네임으로 썼다. 아돌프 히틀러는 줄여부르는 걸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우리가 보통 듣는 멸칭인 '나치'의 기원은 독일어에서 National이 '나치오날(Nazional)'로 읽히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Nation독일어민족을 뜻하지만 국가를 가리키기도 하는 등 서구 근대사의 특수성이 반영된 용어이므로[13] 민족으로 하든 국가로 번역하든 틀린건 아니다.[14] 일각에서는 제2제국 시절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장한 Staatssozialismus[15] 구분하기 위해 학계에선 나치를 민족 사회주의, 국민 사회주의라고 표현하지만, 역사학도나 정치학도가 아닌 이상 이들 개념을 깊숙이 공부할리 없는 일반인들은 애초에 잘 구분하지도 못하니 그냥 쓰는 경우가 많다.

민족(국가)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독일의 초기 파시스트들이 서구의 "자본주의"와 초기의 소련 및 각국 사회주의 세력의 "국제주의사회주의" 같은 외세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반자본주의+반국제주의=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다. 당 강령이나 정책은 여기저기서 베낀 것이라 이념으로 결합한 정당이 아니며(지도자 원리 문서로.) 초기엔 독일 노동자당이었고 민족(국가)주의 사회주의란 유대인에 오염된 서방식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독일식' 사회주의, 노동자를 강조하기 위해서 집어넣었다. 국내 번역으론 국가사회주의로 많이 쓰였다가 최근엔 민족사회주의로 표기하려고도 하는데 본래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라는 말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의미가 확장되어 국가를 이용하는 사회주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장됐다. 영어권에서도 나치즘이나 Volk[16](영어 표기로는 Folk), Reich(국가, 제국, 영어로는 'State'라고 번역할 수 있다.)의 제대로의 의미를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쓰는 추세고 따라서 나치즘이나 나치당을 해외 문헌에서 검색할 땐 NSDAP Nazi로 써도 별 무리가 없다. 독일에서는 현재 NS(National Sozialistische)라는 약칭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사실 Nazi 자체가 금기어에 가깝다.

통칭 '절 표시()'와 유사한 나치의 상징은 '만자문' 또는 '만자십자장'이라고 한다.[17] 일반적으로는 '스바스티카(Swastika)'로 불리며[18], 독일어로는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라고도 불린다.

반면, 히틀러가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려던 전간기 당시 일제강점기 하의 한반도의 언론들에서는 '(독일) 국수당'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히틀러 집권후에는 대부분 '나치쓰' 등으로 표기하였다는듯 하다.[19]

3. 역사

파일:attachment/nazi1.jpg
나치 집권 당시의 베를린 풍경

3.1. 1919년 ~ 1923년: 창당 초기와 아돌프 히틀러의 가입

원래 이름은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 약자는 DAP였다. 여기에 히틀러가 "민족"(National-)을,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제안으로 "사회주의"(-sozialistische)까지 더해 NSDAP, 즉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이 되었다.

처음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독일의 국력이 급격히 하락하고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사회 혼란과 불만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던 20년대 초반,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20] 뮌헨 시에서 전쟁 전 신흥 계층들이 전후 바이에른 지역에서 반유대주의, 범게르만주의를 추종하는 정당이랍시고 만든 조그만 단체였다. 창립자 겸 초대 당수는 안톤 드렉슬러라는 사람으로, 원래 직업은 열쇠 수리공이었지만 이미 독일 조국당(DVLP)[21]에서 당원으로 활동하던 경력이 있었고, 경력을 살려서 디트리히 에카르트, 고트프리트 페더 등의 지인들과 함께 DAP를 창당했다. 당연히 이때부터 이미 반유대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다만 NS가 붙지 않던 시절에는 하켄크로이츠가 아닌, 단순히 녹색 동그라미에 약자를 쓴 심플한 마크를 사용했다.

사실 말이 정당이지 실질적인 능력은 아무 것도 없는 불만 많은 아저씨들의 모임 정도에 불과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기 혼란과 정치적 자유로 인해 여기저기서 난립하던 다른 군소 정당들과 차별화 되던 점이 없었고, 당원 수도 수십 명 정도로 웬만한 군소 정당보다도 당세가 적었다. 따라서 불만을 사회의 아무곳으로나 표출하게 되면서 극단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국가방위군에서 바에에른 지역 내부의 여러 정당들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려고 여기에도 한 병사를 보냈는데...하필이면 그게 아돌프 히틀러였다.

당시 나치당에 모여 있던 고만고만한 자들이 이런저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걸 조사하던 히틀러는 되도 않을 것들을 보니 열뻗쳐서 참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연설을 했다고 한다. 참석 당일 히틀러의 눈에 비친 독일 노동자당의 이미지는 '별 시덥잖은 것들이 웃기고 있네' 수준이었던 모양.[22]

히틀러의 연설 능력은 군계일학이었고[23] 기존의 나치당원들은 히틀러의 연설에 압도되어 히틀러를 환영하였다. 히틀러도 썩 전망이 보이지도 않는 군대생활을 하느니[24] 이쪽이 더 자기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결국 조사하라고 보낸 놈이 오히려 정식으로 가입하여 당원증을 발급받아버렸다. 당원 번호는 555번.[25] 즉, 많이 오해하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창당 멤버가 아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화려하게 걷어차고 대빵이 된 경우. 창설자였던 안톤 드렉슬러는 굴러들어온 돌 히틀러를 비난하다가 히틀러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뒤 1921년 당수에서 물러났고 1923년에는 완전히 탈당해버렸다.

일단 히틀러는 1차대전에서 철십자 훈장[26]을 받은 전쟁 유공자였고 병사 출신이라 중산층 미만 계층에서 인기를 끌만한 대중성을 지녔다. 그리고 히틀러 자신의 열광적인 연설 퍼포먼스[27]와 당시 사회 불만이 크게 번져 있던 독일의 흉흉한 분위기 덕택에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어필했다. 그러나,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치당의 세력은 별 게 아니었다.

3.2. 1923년 ~ 1926년: 뮌헨 폭동의 실패와 히틀러의 투옥

하지만 히틀러는 나치당 집회시 다른 정당의 정치 깡패에 맞서고 나치의 세를 펴기 위하여 자신의 명령으로 "돌격대"를 창설하고 정치폭력배 집단을 통해, 타 정치 집단에 대한 무력 시위를 일삼으면서 천천히 정치적 입지를 다져갔다. 시민들 앞에서 돌격대를 행군시키는 등 일반 시민들에게도 뭔가 다른 집단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나치당이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되자 돌격대는 사회혁명용 반란군 임무를 띄게 된다.

당시 나치당이 활동하던 바이에른 지방은 독일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지역이었다. 프로이센을 제외하면 독일제국 내에서 가장 큰 지방으로 다른 독일지역이 개신교 지역인데 반해 바이에른은 가톨릭이 강세인 지역이었으며 이에 따라 지방색과 분리주의 성향이 강한 면도 있고, 한편 이런 분리주의 성향에 반발한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소로 불릴만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1차대전 패전 이후 극좌 세력의 무장 봉기로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이 수립되지만, 불과 6개월만에 (중도좌파) 사민당과 (중도우파) 중앙당의 연립 중앙정부의 주도로 군부와 극우 민병대가 다시 소비에트 정권을 무너뜨리는 등 극도로 혼란한 지역이었다.[28]

이런 상황에서 일부 세력들은 그들이 보기에 유약한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고, 또 다른 우익 세력은 아예 쿠데타를 일으켜 바이에른 지역을 장악한뒤 베를린으로 진격하자는 주장도 하고 있었다. 1923년도에 이르면 난립하던 바이에른 지역 우익 세력과 민병대 사이에 군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마침 작센 지역에서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 과격파가 합작하여 지방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베를린에선 우익 계열 민병대[29] 볼프강 카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데 자극받아서 나치당도 바이에른에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하지만 미리 포섭해놓은 바이에른 주정부 높으신 분들과 검찰, 경찰 나으리들이 중앙정부의 협박 때문에 나치당에 배신을 때리고 쉽게 제압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맥주홀 폭동(Munich Beer Hall Putsch)이다. 마침 바로 전해인 1922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로마 진군으로 정권을 장악하는걸 보고 우리도 '바이에른을 장악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해서 독일 정부를 한번 뒤집어 엎어볼까?' 하는 아주 엉성한 계획을 시도했지만, 순식간에 망하고 히틀러는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체포당한다. 그러나 나머지 반란세력들은 주요 참여자라도 듣보잡들은 체포하지 않았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 인물들이 재판에서 언플로 전국구로 뜨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재판 과정에서[30] 판사 앞에서 열광적으로 현재 독일의 문제와 승전국으로부터의 자유,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에 판사가 넘어가 히틀러의 형량을 줄여주었다. 반역죄는 중죄임에도 불구하고 판사를 잘 구워삶아서 비교적 가벼운 금고 5년을 선고받고 실제론 고작 9개월 복역하게 된 히틀러는 감옥 내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쿠데타 실패, 주요 인물의 투옥으로 세력이 열악했던 나치당은 붕괴 위험에 처한다.

히틀러는 무료함을 달래고 붕괴 위기에 처한 당을 재결집하려는 뜻에서 옆 방에 투옥된 루돌프 헤스에게 자신이 구술하는 내용을 받아쓰도록 시켜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담은 자서전 성격의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독일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히틀러는 후에 실제로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최초의 쿠데타는 위에 기술한 대로 실패했고, 이후의 숙청 등은 이미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후[31]에 발생한 일들. 독일 국민들이 전범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은 이렇게 그들이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라는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이 동안의 나치당은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대부분의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후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지향하면서 히틀러와 갈등이 생기고 히틀러의 정권 장악 시도에도 반발하다가 결국 쫓겨나서 1934년 암살당했다.

3.3. 1926년 ~ 1932년: 대공황의 혼란을 틈타

파일:attachment/nazi3.jpg
파일:Germany_Awake_(Deutschland_Erwache).png
Arbeit, Freiheit und Brot(노동, 자유[32] 그리고 빵)

나치당 초기의 선거 포스터에 써있던 표어이며 당시의 궁핍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배후중상설까지 믿고 있던 대다수 독일 민중들을 꾀는 데 이보다 가장 적합한 선거구호는 없었다.

출소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몇 달 간 시골로 돌아가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 대선에서 그를 지지하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대선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뒤 정계로 돌아왔다. 돌격대의 폭력 시위와 정치 투쟁이 계속되고, 아돌프 히틀러는 국민들의 좌절감과 갈 곳 없는 분노에 방향을 제시했다. 집권 전이나 후에나 나치당의 일관적인 정책은 인종정책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독일 국민들이 반유대주의 자체에는 공감하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정당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나치당의 지지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나치당은 지지율은 미약했지만 도시 지역에서는 돌격대의 숫자와 조직이 늘어났고 농촌의 농민단체와 군에는 나치 과격분자들이 잠입하여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1928년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자 이러한 조직력은 사회 불만과 합쳐졌고, 독일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녔던 우파 정당의 지지층도 같이 흡수하면서 세를 급속히 확장한다.

한편 겉보기에 이념상 나치당의 반대편에 섰지만 바이마르 체제의 붕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 공산당 또한 대대적인 약진을 시작했다. 1929년 월가의 주가 폭락 이후 세계경제가 대공황으로 파탄이 나면서 1928년 12석였던 나치가 1930년 선거에서는 104석(제2당)이 되었고, 공산당도 81석으로 역시 부상했다. 온건 좌파 사민당 지지자들은 폭력혁명과 바이마르 체제 절멸을 부르짖는 공산당에 부정적이었고 독일 내 자유주의 성향 지지자나 독일 내 80%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을 선택하느니 나치당을 선택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1932년 선거에서 공산당은 89석을 차지하지만 나치는 그때 196석 즉, 제1당이 되었다. 극단적인 경제, 사회적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결국 정치극단주의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고 온건 및 중도적인 사상보다는 좌우로의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10여년처럼 자유주의 우파 정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좌우 대연정을 꾸민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서로 체제 절멸과 체제 전복 드립이나 치는 나치당과 공산당 의석 수를 합치면 과반이라 기존 정당 사이에선 연립정부가 들어설 수 없게 되었다. 나치당은 자기네들 위주로 정권 잡기 위해, 공산당은 나름대로 정치 불안이 장기화 되면 체제 전복이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 성립하는 내각마다 불신임안을 냈다. 독일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이 제시한 '상호 불가침' 원칙을 맹렬하게 거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적 파시즘이다'는 스탈린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독일 사민당을 공격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근본적으로 공화국을 부르주아 체제의 산물로 혁명 대상이라고 보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키려는 건 사민당과 독일 중앙당 등 중도적 정당이나 몇 안 되는 자유주의 정당들 정도.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례대표제로 인해 군소 정당이 난립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당은 국회 내에서 37%를 차지하였을 뿐이지만 압도적인 원내 1당이며 또 다른 공화국 체제의 반대자 공산당을 합치면 과반수가 넘었고 이들은 모든 정부를 불신임할 작정이었다.[33] 거기다 히틀러는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40만의 돌격대가 봉기할 것이라고 하였다.

극우를 비롯한 우익 계열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회의적이었고 연합국의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이름의 '강요'로 이뤄진 체제로 인식했다. 극좌 공산당은 나치가 부상하자 혁명론과 반자본주의 성향이 자기들과 비슷하다고 판단했고, 또한 나치는 융커 보수주의 우파들의 하수인이므로 큰 위협이 아니라 판단했다. 우파 입장에서도 전통적인 독일 우파인 종교계, 토지 귀족, 군대는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신흥 부르주아 계층는 강력한 우파 정당을 원했으므로 아돌프 히틀러의 합법적 정권 추구 선언 이후에는 나치당을 이용하는게 안전해졌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의 집권은 바이마르 체제의 모순, 경제난, 히틀러 본인의 정치력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

이 때의 상황을 참회하며 독일의 목사 마르틴 니묄러는 '전쟁책임고백서'를 집필하며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를 지었다. 이 시는 정치적 무관심의 위험을 경고할 때 즐겨 인용된다.
나치가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가톨릭 교도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3.4. 1932년 ~ 1933년: 정치적 대승과 곧이어 찾아온 위기

1932년 7월의 유례없는 대승으로 37%를 득표했다. 바이마르 체제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공산당이 불참한 1919년 첫 총선 이후 30%를 넘은 적이 없다. 25%도 두번이고 다른 선거에선 20% 초반이었다. 즉 1919년 총선 이후 독일 정당 중 최대 득표율을 찍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 장악에는 실패하였다. 극좌 공산당, 중도좌파 사민당은 물론 우익들조차 히틀러를 불신해 연정은 꿈도 못꾸었다. 히틀러 본인도 줄곧 단독집권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저 득표 수는 실제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히틀러의 집착은 나치당의 상승세가 매우 가팔랐던 것도 한몫한다. 불과 2년만에 의석 수를 두배로 불려냈으니 다음 선거면 단독집권도 꿈도 아니겠구나...라고 생각했는지, 공산당이 제출한 파펜 내각 불신임안에 나치당이 동의해버리고 총선을 밀어붙여 11월에 또 한번 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1932년 11월의 선거는 나치당의 대패로 끝났다. 물론 33%의 득표율로 여전히 높은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히틀러의 비현실적인 야망으로 더 이상의 집권 희망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유권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원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유명 인사이기는 했지만 결국 나치당은 근본적으로 군소 정당이었다. 2%의 득표율을 37%로 불리고 300만 돌격대를 키우느라 나치당은 단기간에 막대한 비용을 사용했으며, 특히 3년간 선거를 대선 총선 도합 4번이나 치르면서 빚이 잔뜩 늘어난 상황이었는데,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집권을 하지 못하니 후원이 끊어지고, 후원이 끊어지니 선거에 돈을 쓰지 못하고 득표가 주는 악순환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디까지 추락할지 아무도 몰랐던 독일 경기가 1932년 봄에 바닥을 치고 점차 회복세에 있었다. 11월 총선 당시 실질적인 집권당이었던 보수 우파 독일 국가인민당은 이 덕을 톡톡히 보아 공산당과 함께 해당 선거에서 지지율이 상승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히틀러로 똘똘 뭉쳤던 나치당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레고어 슈트라서 일파는 더이상 히틀러에겐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고 선거 후 집권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총리와 결탁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3.5. 1933년: 집권

문제는 여전히 나치당이 32%의 의석 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회 내 지지세력 없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신임만으로 지탱되는 슐라이허 정권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슈트라서 일파를 끌어들이고 나치당을 분열시키려던 시도는 슈트라서 본인이 휴가를 간 사이에 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뭔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끝장났다.

이 때 쿠르트 폰 슐라이허의 전임 총리인 프란츠 폰 파펜은 슐라이허에 원한을 갖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히틀러 총리, 파펜 부총리, 그리고 나치당과 보수 진영의 독일 국가인민당이 각료에 참여한 내각을 구성할 것을 추천한다. 파펜 본인이 총리가 되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총리가 되어봤자 1932년 11월처럼 즉각 불신임 맞고 쫓겨날 게 뻔했기 때문. 히틀러는 총리가 되는 대가로 나치 각료가 총리 포함 세 명뿐인 불안정한 우익 연립정권에 동의했다. 히틀러를 끝까지 불신하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결국 파펜의 설득에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파펜의 연립내각 제안에 동의했다. 대통령의 신임도 못 받고 의회에 아무런 지지세력이 없는 정치군인 슐라이허의 정권은 이렇게 끝났고 히틀러 정권이 들어섰다.

이렇게 출범한 우파 연립정부의 총리는 히틀러였고, 경찰권을 장악하는 내무장관도 나치당원인 빌헬름 프리크이기는 했다. 그러나 어차피 히틀러 내각은 의회 신임이 아닌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신임으로 출범한 내각이니 나중에라도 수틀리거든 파펜이 대통령인 힌덴부르크를 움직여 총리를 갈아버리고 도로 자기가 취임하면 그만이고, 이렇게 히틀러 정권이 무너진다면 당초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었던 나치당도 함께 무너질 거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히틀러는 총리 취임을 위해 정치 생명을 건 상황이었고, 총리에서 물러나면 그의 정치 생명도 같이 끝장나는 판이었으며, 그를 위해서는 파펜에게 아주 잘 보여야만 했다. 적어도 파펜과 보수 우파는 그런줄 알았다.

3.6. 1933년 ~ 1939년: 독재 정권의 군림

비록 힌덴부르크를 구워 삶아 정권을 잡기는 했으나 보수 우파의 후원이 없으면 곧바로 무너질 처지였다. 따라서 히틀러는 재빠르게 정권의 독재화를 추구했다.

파펜은 힌덴부르크를 이용해 히틀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파펜을 제치고 힌덴부르크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대공황 이후 정국 혼란에 진절머리가 났던 힌덴부르크는 독일의 혼란을 수습해나가는 나치당과, 이를 이끄는 히틀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1933년, 히틀러는 집권과 동시에 의회를 해산한다. 그리고 선거를 불과 1주 앞둔 때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벌어졌는데 용의자가 네덜란드 공산당에 잠시 몸담았던 점이 밝혀졌다.[34] 이는 나치당에게 반대파를 공격할 수 있는, 기가 막히게 적절한 건수를 제공했다. 용의자가 얼마 안 가 공산당에서 탈당했었다는 점은 중요치 않았다. 히틀러는 공산당 퇴치를 위한 비상대권을 요구했고,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권한을 발동, 기본권 제한에 동의했다. 공산당은 물론 사민당마저 돌격대에게 대놓고 린치당하는 처지로 전락했다.[35] 히틀러를 조종하겠다던 파펜은 이 시점에 이르러 완전히 정국 중심에서 멀어졌다.

나치는 이 사건의 덕을 크게 보아 의회에서 44.5%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했으나 여전히 과반수에 미달하였으므로 히틀러는 독일 국가인민당과 연립 정권을 세웠다. 곧바로 히틀러는 행정부에게 모든 입법권을 넘기는 '수권법'을 세웠는데, 사민당과 공산당의 반대는 예상된 것이었고 따라서 필요한 2/3의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를 받아내고 좌파들을 체포, 차단했다.

수권법 제정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된 나치당은 가톨릭 중앙당은 물론이고 동맹이었던 독일 국가인민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다. 이 당시까지도 최대 정치 세력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방조직들(국기단 등)은 무장 봉기를 준비했지만, 중앙당 지도부가 무기력하게 해산하면서 묻히고 말았다.[36]

마침내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가 1934년 사망하자 히틀러는 자신의 지위를 반영구적인 것으로 만들어 일명 '총통(Führer, 지도자 혹은 영도자)' 자리에 올랐다.[37]

나치는 집권 이후 바로 수용소를 만들었다. 실제로 반대파와 유태인과 집시, 정신질환자장애인 등을 죄다 수용하고선 그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서 조직적인 학살 계획을 세우는 등 그야말로 권력욕에 극에 달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편으론 강력한 권력과 사회 안정 능력을 본 주위 유럽 국가들은 이를 부러워하며 나치당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차대전 승전국인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만약 우리가 독일 처지였으면 히틀러 같은 인물을 바랐을 것'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고,[38] 처칠 전의 수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 또한 히틀러와의 회담 후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이후 온 유럽이 막장 상태였으니 저런 말이 나오게 된 것.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제로 이식된 민주주의가 민족 분열을 조장하는 체제라고 주장하며, 집권 이전부터 그 폐지를 주장해 왔다. 대신 하나의 총통을 우두머리로 하는 단결된 유기체적 민족 집단화를 꿈꾸었다. 자연히, 두뇌에 해당하는 총통과, 그 명령을 하달하는 신경에 해당하는 관료의 관계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하관계적 관료주의나치당의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보수적인 관료들이 공무원들로서 질서와 안정을 추구한다면 나치 당원들은 급진적인 민족주의로 무장한 정치 집단이기 때문. 히틀러가 총리로 집권했던 초기만 해도 정부 내각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관료 집단이 남아있었다. 이 때문에 나치 집권 이후 일부 장관직이 나치당원에 넘어가고 정부 조직 곳곳에 나치당원이 침투했음에도 기존의 관료 조직과 보수주의자들은 막강한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히틀러 역시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원했기에 이러한 국가 관료 조직을 유지, 강화한다. 특히 대표적인 관료 집단인 독일 군부 역시 히틀러는 손을 대지 않고 철저히 보호해 준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소련에서처럼 당이 관료들을 향해 스탈린식의 정치적 대숙청이 일으키거나 당에서 군부에 나치즘을 신봉하는 정치장교를 파견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는 자신이 권력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던 당내 좌익 급진 세력을 날려버리기로 결심했다. 히틀러는 집권 직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치 당원과 나치 이데올로기를 군과 관료 조직에 침투시키는 데 앞장섰던 돌격대와 그 대장 에른스트 룀[39]도 당의 호위 조직인 SS를 동원해 제거해 버렸다. 이것이 장검의 밤이다. 즉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당원들이 정치적 이유로 국가 공무원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것은 억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틀러 역시 언제까지 국가 관료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였다. 국가 관료들은 대체로 히틀러의 의지에 순응했지만 그들 나름의 논리와 법과 절차를 고수하고는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 모든 공적인 행정 절차와 법 위에 서고자 했고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행정부의 기능마저 약화시키기로 결심한다. 결국 1930년대 후반에 이르자 히틀러는 기존 관료들을 놔두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하위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직책을 맡기고 특수 조직을 위임하면서 기존 관료들이 갖고 있던 온갖 권한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일례로 경제 전문가였던 재무부 장관 샤흐트을 냅두고 헤르만 괴링에게 4개년 계획을 맡긴다던가, 행정 전문가였던 내무부 장관 프리크를 냅두고 친위대장 힘러에게 게슈타포와 경찰 조직을 주기까지 하였다.[40] 한편 지도자의 의지를 대변하는 부총통실과 마르틴 보르만 등의 비서진들이 권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급기야 1938년에 이르러서는 구 관료주의적 성향의 장관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하고,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당 관료들이 수많은 직책을 겸직해 가며 모든 걸 해먹게 된다. 여기에는 군부도 예외가 아니라서,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터지자 히틀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존의 군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많은 수의 장성들을 물갈이한다. 여기서 괴링은 제국원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직위를 만들어서 군에서 가장 높은 직급을 차지하고 참모총장에는 말 잘듣고 무능한 빌헬름 카이텔이 임명된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나치당도 보수적인 관료주의자도 아닌 히틀러와 그 측근들 뿐이었다. 괴벨스를 위시한 나치당은 국가의 나치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선전 기관으로 자리매김했고, 국가 조직은 히틀러의 명령을 실행하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사실상 히틀러의 수족과 다를바가 없게 된다. 한편 총통과 그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소수의 나치 당원들은 히틀러와의 관계를 이용해 국가의 온갖 권익을 얻어 히틀러와 함께 국가를 좌지우지한다. 이들이야말로 최후의 승자인 셈. 결국 이러한 교묘한 술책 덕분에 영화 《몰락》에서 볼 수 있듯 전쟁 말엽에 히틀러가 신경쇠약으로 맛이 가도 주변 관리들은 아무도 반기를 들지 못하고 독일이 망할 때까지 그에게 복종한다.

3.7. 1939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몰락

파일:독일국 국회의사당.jpg

나치는 독일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히틀러를 주축으로 한 당이 곧 독일 국가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41] 나치당의 지도자 원리에 따라 히틀러는 궁극적인 권위의 원천으로 여겨지고, 나치당은 어떤 법률로도 그 위치가 규정되지 않았으나 히틀러의 의지를 전파하는 초국가적 조직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독일의 관료 정부보다 나치당이 우월한 조직으로 여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정복지에 나치즘을 전파하고 친나치 정부를 세웠다. 정부와 군부의 요직은 나치 당원, 혹은 강력한 동조자로 채워졌다. 반나치 정치인들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총통의 친위대사병으로 활용해 정규군과 대등한 수준의 조직으로 만들기도 했다. 독일의 지방자치 조직은 마비되었고, 나치당의 지구당이 이를 대체하다시피 했다. 히틀러의 철저한 내부 숙청과 프로파간다 등으로 인해 전쟁에서 점점 불리해지고 영토가 적군에게 넘어가는 와중에도 나치의 중앙 통제력은 살아 있어서 연합군에게 항복하려는 독일 민간인들과 군인들을 처벌하거나 고립된 지역에서 베를린까지 다녀가는 등 연합군이 점령할 때까지 나치의 통제력은 살아있었고 이는 히틀러가 죽고 카를 되니츠가 집권한 뒤에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패망과 함께 조직으로서의 나치는 철저하게 파멸하였다. 연합국과 소련은 독일을 넘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나치당을 용납할 수 없었다. 독일의 항복으로 인해 나치 독일 정부가 해산되고 연합군 군정은 9월 10일에는 법률에 의해 나치당을 금지하였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 의해 범죄 조직으로 인정되어 1945년 10월 10일, 공식 해산된다.

3.8. 종전 이후 부활 시도

서독동독으로 독일이 분할되고 냉전이 시작되자 서독의 나치 잔당들은 독일 사회주의국가당(Sozialistische Reichspartei Deutschlands, SRP)[42]를 만들어 부활을 시도했다. 여기에는 독일 국방군 육군 소장까지 오른 오토 에른스트 레머 같은 나치 광신자들의 지지를 받아 니더작센(Niedersachsen)에서 36만 지지자를 얻고 주의회에서 16석을 차지하며 나름 지지를 받았으나 연방정부에서 위헌정당으로 정당해산이 청구되었고, 연방헌법재판소로부터 청구가 인용되어 해산당했다.

이들을 해산시킨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그 목적이 민주주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복수정당제의 부인
2. 당내 조직과 그 운영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지도자 원리에 기초
3. 당원의 활동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비롯하여 그밖의 기본권 경시

한편 동독에서는 옛 나치당 인사들을 회유하여 독일 민족민주당이란 관제야당에서 연명하도록 했다. 동독 인민의회에서 52석 정도를 분배받았으며, 통일 후 동독 자민당(LDPD)과 함께 서독 자민당(FDP)에 흡수되었다.

3.9. 현재

그 후 오랫동안 나치는 서방세계에서 철저한 금기로서, 일부 소규모 정치 집단이나 지하 조직으로 존재하면서 간혹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것 이외에는 큰 활동은 없었다. 다만 지하에서 남아있던 추종자들이 나머지 극우파와 국수주의, 인종주의 패거리들을 규합해 독일 민족민주당을 창당해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지지율은 높지 않다.

기본적으로 제노포비아민족주의는 공통 분모로 지니고 있지만, 나치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의회 민주주의 부정[43]이나 개인 숭배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치와는 다르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서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고 있다. 2003년에 독일 민족민주당은 위헌 정당으로 제소되었다가 이러한 이유로 살아남았다. 극우 테러집단인 NSU가 외국인과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2013년에 연방상원 주도로 다시 한번 NPD를 위헌 정당으로 찍어서 해산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2017년에 연방헌법재판소가 청구를 기각하여 역시 무산되었다. 다행인점은 독일을 위한 대안이 표를 받는 일은 있어도 NPD가 표를 받는 일은 아주 적다는 것. NPD는 지방의회에서만 가끔 의석을 확보했고 연방의회에서는 창당이래로 단 한 석도 확보하지 못했다.

나치 전범인 에리히 프리프케 SS대위가 사망하자 이탈리아 로마 외곽 알바노 라지알레에서 장례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다가, 시민들의 항의로 그 시신을 로마 인근 군 비행장에 방치했다.

2010년대 들어선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지만, 유럽 난민 문제로 인해 페기다독일을 위한 대안과 같은 네오 파시즘 인종차별 계열 조직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중이다.

3.10. 역대 선거 결과

하원 선거
선거 년도 투표 수 % 획득 의석 +/- 비고
1928 810,127 2.6 12/491 +12
1930 6,379,672 18.25 107/577 +95
1932년 7월 13,745,680 37.27 230/608 +123
1932년 11월 11,737,021 33.09 196/584 -34
1933년 3월 17,277,180 43.91 288/647 +92
1933년 11월 39,655,224 92.11 661/661 +373 단일합법정당
1936 44,462,458 98.80 741/741 +80 단일합법정당
1938 44,451,092 99.01 813/813 +72 단일합법정당
대통령 선거
선거 년도 후보 첫 번째 결선투표
투표 % 투표 %
1925 에리히 루덴도르프 지지 (1.1%) 파울 폰 힌덴부르크 지지 (48.3%)
1932 아돌프 히틀러 11,339,446 30.1% 2위 13,418,547 36.8% 2위

4. 조직

먼저 나치당은 중앙당 최고조직으로 독일 협회법에 입각하여 구성된 최고회의(Vorstand)[44]가 있었으며 위원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협회 의장인 아돌프 히틀러프란츠 슈바르츠, 서기 카를 피흘러 이 세명만으로 구성되었다. 최고회의 아래에는 국(Amt)-과-계 이렇게 위계화된 당 기구가 있었다.

당 구조 당 휘하 조직

4.1. 퓌러 대리 참모진, 당수부

퓌러 대리 참모진(Stab des Stellvertreters des Führers)은 1941년까지 나치당의 지배 구조였다. 퓌러 대리 루돌프 헤스는 퓌러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으로 당의 모든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실용적인 기술이 부족한 헤스는이 힘을 사용할 수 없었고 실제 권력은 당수부장인 마르틴 보어만에게 넘어갔다.

1941년 5월에 퓌러 대리 루돌프 헤스가 영국으로 비행한 것에 의해 실각해, 퓌러 대리 참모진은 폐지되었다. 그 후 계승기관으로서 히틀러가 직접 당을 지배하기 위한 기구인 당수부(Parteikanzlei)가 설치되었다. 정권 말기 나치당의 실무는 당수부당 마르틴 보어만이 지배하고 있었고, 사실상 그가 당의 실권을 붙잡고 있었다.

4.2. 퓌러 비서실

4.3. NSDAP 최상급당재판소

(Oberstes Parteigericht der NSDAP)

4.4. 국(Amt)

4.4.1. NSDAP 중앙정치위원회

(Politischen Zentralkommission der NSDAP)

4.4.2. 조직국

(Reichsorganisationsleitung)
나치당 초기에 조직국은 나치당의 가장 중요한 조직이었고, 그 수장인 조직의 국가조직지휘자는 이름과 현실 모두에서 나치당의 2위였다. 그러나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당에서 추방되면서 조직국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4.4.3. NSDAP 서기국, 지방정치본부

4.4.4. 법무국

4.4.5. 재무국

4.4.6. 선전국

선전을 강조한 히틀러는 처음에는 선전의 국가 지도자로 봉사했다. 나중에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취임하여 나치당의 권력 장악과 그에 따른 여론 촉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4.7. 언론국

4.4.8. 홍보국

4.4.9. 농업정책국

도시를 기반으로 한 나치에게 농업 정책에 관한 부국이 놓여진 것은 비교적 느렸다. 나중에 농업정책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4.4.10. 국방정책국, NSDAP 식민정책국장

4.4.11. 대외정책국

(Außenpolitischen Amts der NSDAP)
나치당의 대외정책에 관한 부서는 난립하고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대외정책국(Außenpolitischen Amts der NSDAP)은 국가대외정책지휘자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총괄하고 있었다.

외국의 나치당원을 총괄하는 나치당 국외조직(Auslands-Organisation)은 대관구 취급을 했다. 대관구 지도자는 1931년부터 한스 니런트이며, 1933년부터 에른스트 빌헬름 볼레가 지도자가 되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리벤트로프 기관이라는 조직을 시작해 외교에서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4.5. 국회의원단

5. 구성 인원과 정치적 성향

...유태인 추출 이래 나치 독일 정부의 "순수" 보존열은 기구한 바 이 경향은 근래 점차 히스테릭화하여 빌헬름 프리크(Wilhelm Frick) 내무부 장관은 최근 전국 오백의 호적 등기소에 대하여 "독일 민족의 순수성을 외국 인종과 혼합하지 않는 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국민 사람사람마다 선조와 근친자에 반한 엄중차 상세한 조사를 하여 종족 카드를 작성할 일"이라고 반포하였다. 이 결과 금후 독일 국민은 소위 "지펜블라트(Sippenblatt)"라고 칭할 혈통 증명의 카드를 감찰로서 종시 몸에 갖고 선조의 혈통 순수성을 어느 때나 증명하도록 되었다 한다.
1934년 11월 3일, 동아일보, "전 독일인의 혈통카드(全獨逸人의 血統카드)"
...그렇다 하면 나치스 혁명에 포장하는 위험이란 무엇인가. 이를 단적으로 말하면 독일 민족성과 나치스 운동 간에 선천적으로 일치하기 어려운 대모순이 있는 것이다. 이를 상언하면 나치스 독재정치는 독일 국민을 일시적으로 또 표면적으로 지배하고 나치스 색을 물들일 수가 있다 하여도 영구적으로 그 정신까지 지배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이태리(이탈리아)와 노국(러시아) 우는(또는) 서반아(에스파냐/스페인), 포도아(포르투갈) 등 국민문화가 비교적 저급의 국가에서라면 무단정치나 일당독재라도 비교적 영속성을 지속할것이나[45] 독일국민은 정신의 자유까지 뺏으려는 철저한 독재정치를 감수하기에는 너무나 문화적으로 지나쳤다. 배후에 빌헬름 2세라는 반석이 있었음에 불구하고 비스마르크의 좌익탄압이나 "문화전쟁"도 실패에 귀한(실패로 돌아간) 역사상의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934년 7월 5일, 동아일보, "나치스 이변, 1년 반만에 벌써 내홍이 폭로(나치스 異變,一年半만에 벌서 內訌이暴露)"

5.1. 나치 당원들의 사회 계층

나치당원들은 모두 저학력자 하층민 깡패들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나치 하면 돌격대 깡패를 떠올렸기 때문에 인적구성상 수가 많은 돌격대의 이미지를 나치의 이미지로 착각하게 되는데 먼저 돌격대와 나치 당원을 구분해야 한다. 돌격대는 1924년 맥주홀 폭동 이전에는 나치당 하부 조직이 아니었다.

1925년 나치당이 재건되며 명목상으론 나치당 하부 조직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히틀러의 직속 조직이라서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돌격대원들은 "우리는 제3제국의 군인, 나치 당원은 민간인이다!" 라는 주장을 통하여 전혀 통제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치당은 당원들의 입당비와 매월 당회비로 운영되었는데 돌격대는 나치당 집회에서 경비를 서주면서 돈을 받아먹었지 당비를 내는 당원이 아니었다. 물론 돌격대 지휘자급들은 나치 당원이나 나치당 당직과는 겸직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일반 돌격대원 상당수는 나치당원이 아닌 셈이다.

또한 돌격대도 처음에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루돌프 헤스가 대학생 100인 모임을 만들 정도로 후기 이미지와 전혀 다르며 이후 돌격대가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군대처럼 조직을 만들어 나갈 때 지도자급은 대부분 제국 시절 장교 출신이며 패전 후 자유군단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이었다. 초기 돌격대에서 활약한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장군과 에른스트 룀 이전에 돌격대를 이끌던 페퍼 폰 잘로몬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폰(Von)자 들어가는 귀족 출신이었다. 더 높으신분으로 바이마르 후반에는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이탈리아 왕의 사위이자 헤센-카셀의 필리프 왕자도 돌격대에 가입한다. 물론 돌격대의 하부 인적자원들은 대부분은 중하위 계층 사람이었던 건 사실인데 패전 후 초인플레이션대공황이 발생하며 바이마르 시절 독일 내에 부랑자나 실업자가 넘쳐났기 때문에 일반적인 독일 평균에서도 그닥 많은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나치당 초기 구성원을 보면 자물쇠 수리공 안톤 드렉슬러가 창건자라지만 다른 멤버들 면모로 디트리히 에카르트(문학가),[46] 고트프리트 페더(엔지니어 출신, 후에 베를린 공대 교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47] 카를 하우스호퍼(뮌헨대학 교수), 한스 프랑크(변호사) 등 뮌헨의 높으신 어른들 모임 툴레 협회 멤버들이 주축이었다. 루돌프 헤스도 툴레 협회 출신이다. 바이에른 출신이지만 후에 북독일에서 활약한 당내 행정가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약사 출신으로 후에 제약회사 부사장을 지냈다. 나치당에는 박사 학위자도 빌헬름 프리크(법학)나 프리츠 토트(공학)처럼 괴벨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괴벨스 수하의 선전부 직원으로 빠지는 나치당 베를린 관구와 나치당 선전국 멤버들은 350명 중 절반 이상이 대졸자요 박사학위자도 상당수였다.

제3제국 시대 나치당 지도부의 사회 계층을 보자면 히틀러는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실업학교 고등과정 중퇴)지만 세무서장의 아들[48]로 프티부르주아 출신이며 헤르만 괴링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총독의 아들에다 역시 부유한 집안이었고, 루돌프 헤스는 해외교포 출신으로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고 둘다 전쟁때 공군장교라 아비투어(대학입학 시험)이 면제되어 뮌헨대학 진학이 가능했지만 괴링은 그냥 스웨덴으로 가서 재벌 여자와 결혼하고 헤스는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툴레 협회 인맥들과 나치당에 가입한다. 힘러는 농경제학 석사 출신이고, 나치에서 농업 분야를 맡았던 발터 다레는 농학 박사과정 중퇴로 역시 석사학위가 있다. 괴벨스야 널리 알려진 박사이고, 로젠베르크와 알베르트 슈페어는 건축가, 내무 장관 프리크는 앞서 소개한대로 법학박사, 발터 풍크는 나치당에서 후에 경제 장관이었지만 원래는 언론인 출신이다. 초기 히틀러의 후원자요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낸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무역상이면서 무려 하버드 졸업생[49]이며, 히틀러 유겐트를 이끈 발두어 폰 쉬라흐는 자기 집도 잘 살았지만 외가가 미국서 은행가 집안이었다. 괴벨스 밑에서 선전부 차관을 하다가 후에 히틀러의 유언에서 힘러 대신 친위대장으로 임명된 카를 항케는 전직 고교 교사였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법대를 나와 법학 박사와 변호사를 했으며,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의 주인공인 베셀도 원래는 법대생이다. 이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았어도 독일에서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서 상류층에 능히 속하고도 남았다. 중졸자인 히틀러와 그나마 대화가 통해서 총애받은 마르틴 보어만도 고등학교는 졸업했다.[50]

이후 나치당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나치 당원이 늘어나게 되는데 또 전형적인 이미지와 달리 당원들 대부분은 교사, 공무원, 소상공인 출신이 대다수였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지지도도 상당히 높았다. 세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독일 국가인민당, 가톨릭 중앙당, 바이에른 인민당, 독일 인민당 등 기존 보수정당들의 지지층을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흡수했기 때문이었고, 그러니 공무원이나 농민, 기득권층들의 지지도 얻을수 있었것이었다. 나치당 초기를 지나 정권을 잡기 전에도 나치당은 '공무원 당'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교사 공무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51] 노동자 계층 출신은 당명과 괴리가 클 정도로 적었는데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에 대한 노동조합 지지가 꾸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치당 집권후에 독일의 경제가 일시적으로 살아나고 소련침공 초기 시기까지는 독일이 잘나가는것처럼 보였기때문에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도가 높아자기는 했지만 후에 노동자계층이 제3제국에서 나치당에 호의적이었는지 여부는 학자마다 학설이 강하게 충돌하는 부분이다.

이들은 결코 못 배우고 무식해서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국민 평균으로 보아도 나치 지도부 출신은 평균적으로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해당한다.

5.2. 정치적 성향

이처럼 초기 나치 당원들은 구제국서 기득권층이긴 했지만 프로이센에 밀려 주류는 아니었던 바이에른 지역 출신이 많았고 정치적 욕구가 좌절되었던 신흥계층 출신이 주도했다. 바이에른 지역에서 유행한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나치당 당명인 '국가(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서 볼 수 있듯이 좌익 이론과 급진 반체제 사상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이는 전통주의적 가치관을 지키고자 했음에도 외세의 영향력에 맞서 급진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당대 보수주의자들의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말 그대로 영향을 받은 것이지 결국 기본 축은 당대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탈민족주의, 프롤레타리아 그 자체에 대한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회민주주의처럼 부르주아 자본계급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모두 포괄하는 민족 공동체에서 모든 민족들이 서로 협동하는 조합주의적 사회주의였고, 나치즘에서 말하는 사회주의란,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이 아니라, 민족이 주체가 되는 사회주의, 민족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였으며, 유대인 음모론에 심취하여, 유대 프리메이슨과 유대 볼셰비키와 유대 자본가들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독일 민족을 지배하려 한다고 보았다.
민족공동체 개념은 나치체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나치는 민족공동체의 형성을 약속하면서 정치와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를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구축하고자 했다. 연구개념으로서의 민족공동체는 첫째, 나치에서의 변화된 정치적·사회적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며, 두번째 사회적 약속을 통해 주민들을 동원하는 기제이며, 세 번째 나치체제의 통합과 배제의 특성을 지칭한다.
나치의 사회정책은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나치는 계급투쟁을 극복하고 민족공동체를 수립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파트너쉽에 기초한 바이마르의 노동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기업공동체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새로운 나치적 노동질서를 수립하였다. 민족공동체와 업적공동체를 수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노동전선은 노동자들을 규율하는 동시에 체제 내로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정책적 활동을 벌였다. 노동전선의 산하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은 여행, 스포츠, 문화활동 등의 다양한 여가를 노동자에게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노동의 아름다움은 공장의 환경을 개선하고 합리화함으로써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통합을 촉진하려는 시도였다.
사회보험분야에서 나치는 조직을 통합하여 행정합리화를 추진하는 한편 보험료는 올리고 급여는 낮추어 재정의 안정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사회보험의 구체적 운영은 인종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며 군수산업과 전쟁준비에 복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복지분야에서 민족복지회는 나치 최대의 조직으로서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적 약자가 아닌, 민족의 동지와 ‘가치있는 자’에게 다양한 후생복지혜택을 제공하여 미래의 건강한 민족을 재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에게 복지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지회의 활동은 근대적 성격의 가족·인구정책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은 철저히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월동구호단은 민족은 스스로 돕는다는 구호 아래 전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선모금활동을 벌였고, 이것은 민족공동체의 실현의 징표로서 선전되었다.
나치 사회정책의 많은 부분은 독일제국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이어지는 근대화 과정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나치의 사회정책은 복지국가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제거하고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자리에 민족을 대치함으로써 퇴행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신명훈, 독일 복지국가 담론의 역사: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 사회정책, 독일연구 2015, vol., no.29, pp. 155-198 (44 pages)#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자가당착, 그리고 이 두 이념의 종합은 독일 사상사의 핵심 내용이다. 1918년에서 1945 사이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이를 둘러싼 것이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이에 따라 과거로부터 전승된 자부심이 손상되고 전통적인 프로이센 군주 질서가 파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변화된 정치 조건에 대항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획득하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의 핵심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종합하려는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논의이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의 전개는 NSDAP(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 나치당)의 건설과 확장과정과 일치한다. 1933년의 나치의 권력 획득과 함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종합은 공공연히 사회전반에 적용된다. 민족 부르주아지 측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인 것은 “민족 사회주의”나 좀바르토(Sombart)가 말하는 “법치 사회주의”이며, 이들은 좌파 사회주의, 즉 맑스 사회주의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스스로 이해되고 있다. 1933년 이전까지의 논쟁에서는 여러 입장들이 주장되었지만 1933년 이후에는 단지 히틀러를 사회주의 혁명가로 표현하고 우상화하는 글들만이 만연된다. (1933년 이전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정리중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특이할 사항은 사회주의를 민족의 공동체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민족과 사회주의를 접합시키려는 노력이외에도 1890년대에 발행되어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퇴니스 (Toennis)의 저작 “공동체와 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가 1920-30년대에 6판까지 발행되었다는 점이다 자세한 논쟁은 준비중”)
...
독일의 부르주아지 이론가들에게는 자본주의 역시 “서구적인 것” 또는 “유대인의 상인정신”의 전형적인 산물로써 비난받았다 (대표적인 학자가 좀바르트). 민족적인 입장으로 정리한 사람은 자본주의를 어떤 “낯선 것”, “서구로부터 강제된 체제” 또는 “증오스러운 자유주의의 경제체제”로 간주하였다.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의 차용으로 독일은 서구의 규칙에 종속되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민족사회주의로의 이행: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독일 논쟁정리#

독일의 보수혁명은 기본적으로 반서구주의를 내세우며 민족적인 가치관을 주장했었는데, 자유주의(자본주의)와 볼셰비즘(공산주의) 모두가 외세나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반대하였다. 이 당시 독일은 민족주의 우파 진영에서도 반자본주의 성향이 높았다. "천박한 부르주아들은 돈만 되면 나라건 민족이건 다 팔아먹는다"는 디스는 일반적인 것이고, 고트프리트 페더처럼 은행 국유화, 이자율 폐지 주장[52]부터 제1차 세계 대전부당 이득자 벼락부자들은 유대인과 같이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게 히틀러의 나치당 초기 연설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런 성향은 나치당 좌파로 분류되는 괴벨스, 그레고어 슈트라서로 이어지며 슈트라서는 숙청 되지만 괴벨스는 승승장구하면서도 사회주의 성향을 버리지 않았다.[53] 이들 나치당 좌파의 주장은 나치즘 양대 축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 우위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나치당 내부에서 주류 우파의 주장과 충돌했다. 괴링 등의 나치 우파는 노동자를 먼저 민족주의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슈트라서 형제와 괴벨스 등의 나치 좌파들은 먼저 사회주의를 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을 볼셰비즘[54]에 빠지지 말라고 설득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 나치의 이론에 의하면 나치즘에서 이상인 초계급적 국가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공조하며 계급 투쟁을 배격하지만 사회 변혁을 이끌 주체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계급'이기 때문에 노동자를 이념상 중요시 했다. 자본가는 국가사회주의에서 민족의 이익 범위 안에서만 사유재산 추구가 인정된다고 보았고, 농민들은 나치이론에 빈농층에 대한 보조금 지급, 흉년 등의 재해시 정부가 직접 농산물을 구입하거나 인력을 보내 지원하는 등 사상적인 것보다는 결과적 이론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노선으로 히틀러의 나치당은 초창기에 농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왔었다.[55]

그러다가 나치가 성장하고 특히 집권 후 사회주의 성향이 바뀌게 되었고 독일노동전선으로 국가사회주의 사상 획일화 조치로 볼셰비즘으로 의심된다는 노동조합을 박살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휴가와 여가를 누리게 만드는 목적인 '기쁨의 힘'이나 '국민차 계획(폭스바겐)'처럼 노동 계층에 부합한 정책도 있었고 무엇보다 임금을 다소 깎거나 여성들을 노동 현장에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식으로 실업자 수를 줄이는 꼼수와 노동 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기업인들에게 고용 보장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 후에 1935년부터 경제 공황에서 회복으로 실질임금이 오르고 독일경제가 완전고용 상태로 접어들면서 노동 계층의 정치적 압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그와 비슷하게 충성스러운 기업들의 대한 지원 역시 아끼지 않았다.[56] 포르쉐, 메셔슈미트와 같은 군수기업에 대해서 충성의 대가로 여러 보조금을 주기도 하였고 기업들은 그 보조금을 타겠다 하여 히틀러에게 아양을아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히틀러는 충성스러운 이들에게는 지원을 충성하지 않는이들에게는 탄압을 가했다.

나치즘을 부르주아 계급에 의하여 만들어져서 부르주아를 위해 봉사하는 하수인으로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과는 달리, 실제로는 나치당이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의 위에 있었으며, 명령하는 위치였다. 그리고 나치당의 지지세력은 공무원, 교사, 퇴역군인과 같은 중간계층의 지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노동자들에게서도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즉 파시즘은 특정 계층만의 이익을 대변한다기보다는, 민족의 모든 계급에서 지지를 받았으며, 동시에 모든 계급에서 반대를 받았다. 이런 면에서 파시즘을 진정한 의미의 대중정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파일:나치 독일 반유대주의 포스터.jpg
우리의 적들이 꾸미는 모든 음모의 배후에 국제 유대주의가 있다는 진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이 전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유대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합국들을 한데 묶어두고 있는 접착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볼셰비즘은 동일한 유대적 뿌리에서 나오며, 한 나무의 다른 두 가지처럼 결국에는 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국제 유대주의는 많은 국가들과 민족을 압제하여 복종시키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45년 1월 21일 베를린, 주간지 'Das Reich'

나치당 반자본주의와 반공주의의 접점은 반유대주의 인종론으로 "공산주의는 유대 볼셰비키, 자본주의는 국제 유대자본"으로 통하는데 지금에서야 상반된 진영이 같이 유대인으로 엮이는 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57] 당시 독일에선 나치당뿐 아니라 교육받은 계층까지도 독일 민족의 것이 아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독일인을 약하게 만들어 민족성을 파괴하고 망하게 만들려는 국제 유대인들의 음모라는 떡밥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영미식 민주주의 체제는 금권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장악될 뿐이고 좌파 계열이 주장하는 계급 투쟁과 각국의 노동자 연대는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들의 야심대로 민족 고유의 특성을 박멸하여 세계 정부를 만드려는 음모론으로 해석한다. 나치가 공산주의를 유대민족의 사회주의로 보는 이유는, 당시 독일의 사회주의자 중에서는 카를 마르크스뿐만이 아니라, 페르디난트 라살, 로자 룩셈부르크,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같은 유대인들이 실제로도 많았으며, 볼셰비키 중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소콜니코프 등도 유대계 혈통이거나, 유대인이었기에, 히틀러의 판단으로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사회주의는 국가와 민족이 없는 유대인식 사회주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가 인기가 많았고, 지식인 중에서 유대인의 비중이 높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게 적절하다. 여기에다 19세기 이전 유럽에서 유대인을 천민 취급하던 역사적 편견에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배후중상설도 한몫 한다.

나치당이 극우 정당인데도 당명에 사회주의, 노동자가 들어간 것과 관련하여 혼란을 주지만 나치의 사회주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모든 민족은 민족 고유의 사회주의를 지닌다는 가치 아래 독일식의 사회주의를 만든 것이 바로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이다. 그렇기에 나치당은 자신들의 이상적인 군주와 정치가로 프리드리히 대왕비스마르크와 같은 군국주의 국가를 이상향으로 여겼다.[58] 따라서 독일 민족 고유의 국가사회주의란 서구의 나약하고 퇴폐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일 민족이 스스로 닦은 신시대 사회주의를 애기하게 된다. 그렇기에 독일의 25개 강령(25-Punkte-Programm)은 자본가, 노동자, 상인, 농민의 대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강령 13조는 사회 모든 기업의 국유화를 애기했지만 Trust를 받지 못하는 즉 신뢰받지 못한 기업에 한해서 국유화를 애기하였다. 이는 즉 국가에 충성만 한다면 국유화를 하지 않는다는 뜻에 해당된다.

14조의 대기업의 이익 공유 역시 13조에 의거하는 신뢰받지 못한 기업에 한정하여 이뤄젔으며 16조는 소상공인 지방자치화를 통한 상인 권력 증진을 애기하며 오히려 사회주의랑 전혀 딴판의 정책을 애기하기 시작했다.

18조에서는 모든 고리대금업자[59]의 사형을 요구하는 항목에서 보이듯이 이 강령은 사회주의 강령이 아니라 유대인 재산의 강제몰수를 말하는 강령이다. 강령 제 4조 유대인은 독일의 시민이 될 수 없다.를 통해서 이 강령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강령 22조 인민군의 창설처럼 사회주의적인 면이 보일만한 것이 있을 순 있지만, 독일 민족의 인민군 구상은 19세기 초반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란 사상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부터 있었다. 그리고 인민군 창설을 주장하던 은 히틀러에 의해 암살당했다.[60]

또한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나치 좌파가 과연 마르크스주의적이였냐 아니면 사회주의적이였냐라고 하기엔 애매한데 그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한건 아니였으며, 이들은 진보적인 사회주의나 우익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원시 고대 게르만의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고 이를 지지했다. 그조차도 히틀러는 용서하지 않고 싸그리 무너뜨렸다.
우리 국가사회주의자(National Socialists)는 경제의 국유화를 포함한 경제의 혁명을 원한다. 우린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나 영혼없는 유물론적 관점이 아닌 믿음있고 희생적이며 반이기적인 고대 독일인의 진정한 사회주의를 원한다. 공동체적 감정, 공동체적 목적, 공동체적 경제, 우린 민족혁명을 위한 사회혁명을 원한다.
1925년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연설. 출처:Childers, Thomas (2017). The Third Reich: A History of Nazi Germany. New York: Simon & Schuster

즉 나치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란 것은 고대 게르만인 혹은 강한 독일(비스마르크나 프리드리히 대왕이 만든)의 모습을 우리 민족이 따를 사회주의다.라고 규정한 말 그대로 자기들만의 사회주의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국제주의적인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다.

그렇기에 실제로도 나치당 좌파가 소련을 좋게 본 이유는 소련이 서구의 퇴폐에 저항하여 슬라브인만의 슬라브식 사회주의를 만들어서였지 소련을 정말로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정말로 소련을 지지했고 좋아했으면 슬라브인 전멸이라는 구호따윈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 Dietmar Gottfried: Nazis gegen Hitler. In: Telepolis, 23. September 2012.
빌어처먹게 고귀하신 귀족 나으리, 비곗덩어리 자유주의자, 증권시장 하이에나, 돈 자루 독재 금권정치인 놈들은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머리통 들이 모래 위를 구르게 될 것
요제프 괴벨스의 공격(Der Angriff)지 논평 < 대중 선동의 심리학(문제적 인간 2)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나치당과 히틀러는 같은 독일민족, 더 나아가 북방계 유럽민족들끼리는 평등해야 한다는 사고관을 갖고 있어서[61] 신분이나 계급이 아닌 능력을 중시한 인재 선발을 강조했고 전쟁중에 융커가 주류인 프로이센 장교단을 불신한 건 널리 알려져있다. 전통귀족이 장악한 육군보다는 공군과 해군에서 전쟁영웅 만들기에 열올렸고 육군에서는 평민 출신 장군의 대표적인 예시인 에르빈 롬멜을 띄우는데 이런 의도도 작용했다.[62]

서구 민주주의와 의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반감이 상당했는데 독일 제국이 패망하자 연합국에서 군부와 카이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은 민주정부와만 협상한다고 선언해서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연합국에서 강요한 것으로 보았고 나치당에서는 토론이나 다수결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민주제 체제라는 것은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지지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영미나 프랑스 정치인들은 선거를 치르기 위해 자본가에 손을 벌려야 하고 또한 공약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잘 보여만 하는 구조상 그것은 금권정치와 연결이 되며 유권자들은 그때그때 이익에만 충실하지 시대정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결국엔 독일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은 전통적인 독일인의 미덕인 명예심과 충성심, 인내와 자기희생, 끝없는 의지와 노력주의로 가장 능력이 뛰어나고 위대한 인물에게 위임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급과 당파를 떠나서 민족 공동체를 위해 히틀러 중심의 지도자 원리로 지도자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치당 내 이념이 현대 한국 기준으로 좌나 우냐 따지는 건 무리가 있다.[63][64] 어른의 사정으로 늦춰지긴 했지만 귀족출신 상류층, 기득층 보수교회세력, 프로이센 상류층 출신 군부, 부르주아들은 나치 기준으로는 잘났다고 고개가 뻣뻣하거나 비리부패에 걸리는 순간 한번에 박살내야 할 대상이란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도 제대로 일 안하거나 조금이라도 허튼 짓거리가 보인다면 바로 박살날 대상인 건 변함없긴 했지만 말이다.

프로이센 군부는 뒤늦게 전쟁 후기에야 완전히 손을 봤지만 반나치적이거나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가톨릭 세력들은 정교협약을 무시하고 나치당에게 탄압을 받았으나 친나치 성향의 가톨릭 세력들은 친위대 고위급 인사들이 대부분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라서[65] 보호와 혜택을 받았었다. 이와 똑같이 개신교와 나치당의 관계는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반나치 성향 고백교회의 등장으로 인해서 탄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나치당이 성공을 거두면서 정치적 힘이 생겨나고 높으신 분들과도 연결이 많이 되는데 집권 전까지 기업인 중에서 나치빠 성향은 프리츠 티센[66]이 거의 유일하고, 괴링과 햘마르 샤흐트가 히틀러와 재벌들 사이를 연결해주었지만 일회성으로 받는 돈들은 대부분 괴링과 히틀러의 호주머니로 들어 갔기 때문에 나치당 재정에 그리 의미가 있는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한다.

부르주아들은 제3제국에서는 유대인 기업가들 빼고 딱히 큰 탄압을 받지는 않았는데 주 목적은 독일의 빠른 재무장 때문이었고 결과적으로 재무장과 전쟁으로 군수기업들이 큰 혜택을 보았다. 부르주아들의 도움이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전쟁에서 물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손을 잡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재 업종 중에 유대인이 많았던 출판업유통업은 큰 타격을 받았고 영화 산업은 헐리우드에 이어서 2위로 바이마르 시대에 독일 영화산업은 유럽 모든 국가를 합친 것보다 작품 수가 많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나치 정권하에서 영화사는 3개만 남기고 그마저도 강제로 국유화된다. 그리고 혜택을 크게 받았던 군수기업들도 대가를 치루며 전후에 해체되거나 업종을 변경한다. 물론 이는 히틀러가 기업한테 빚진다고 메포어음을 마주잡이로 발행한 문제도 어느정도 있지만 말이다.

나치당에 초기에 몸을 담았고 1925년 나치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차 세계대전시 참모차장과 군수총감을 겸하며 힌덴부르크와 공동결정권으로 사실상 독재자 역할을 했었다. 루덴도르프는 전시에 군수기업의 국영화를 추진했는데 이유란 게 없는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총력전 체제로 이행해야 하는데 기업인에게 가는 이윤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군수기업의 이윤을 몰수해서 생산을 늘리고 노동자 몫을 늘리려는 것이 국가사회주의식 경제관이었다. 2차대전 후반에도 이러한 총력전 체제가 알베르트 슈페어, 괴벨스 주도하에 추진되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어서 추진 실적은 거의 없긴 했다.

5.2.1. 제3의 위치

첨언을 하자면, 파시즘과 관련해서 일컬어지는 제3의 위치, 혹은 제 3의 길이라는 말은, 자유주의(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족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이며, 제3의 위치 내에서도, 좌익 파시즘이 있고, 극우 성향의 파시즘이 있다.

슈트라서주의를 비롯한 나치즘의 좌파부류는 전간기에 제3의 위치 중에서도 좌익 파시즘에 가깝다.그도 그럴 것이, 기존 좌익의 입장에서 볼 때 계급보다는 민족 공동체를 우선으로 하고 반민주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으므로 좌파의 입장에 반드시 대입되지는 않지만[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복지를 강조하며 반자본주의적 입장이 강했고, 우파의 입장에서 볼 때 전통적인 봉건적 왕당파와는 궤를 달리하는 인민주의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희생과 신비주의에 대한 숭고미를 추구했다. 제3세력과 같은 포지션은 대립하는 두 이념, 정치세력 사이에서 언제나 나오게 되어 있다.

나치즘은 제3의 위치에 영향받은 파시즘의 방계 정도로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제3의 위치라는 것이 다른 사상에 비해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도 않고, 의미있는 정치 세력이 드물기 때문에 좀 헐렁하게 대충 어림잡아 제3의 위치이라고 뭉뚱그레 호칭되는 면이 있다.[68] 사실 나치당내 좌파들은 실제로 좌파적 정책들을 독일 게르만족 사이에서 실현시키려 했는데, 히틀러가 정치적 안정과 재무장을 위해서 부르주아들과 타협하고 정권을 잡자 배불러진 나치당 간부들은 좌파 성향에서 멀어지게 된다. 사회혁명을 부르짖던 돌격대가 좌파의 중심은 아니고 1933년 정권 잡기 직전 숙청 된 그레고어 슈트라서(동생 오토 슈트라서)가 이탈하면서 당내 좌파 세력이 약화된 탓도 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히틀러 몰래 자유주의 우파정당과 연립정권을 시도할 정도로 오히려 나치 주류보다 유연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경험한 독일에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자유/자본주의 이념 및 체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으며, 이는 192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포괄적인 의미의 반(反)서구주의적 ‘보수혁명(Konservative Revolution)’으로 나타났다. 그들 중 일부는 10월혁명에서도 사회주의적 성격보다 반서구적 측면에 주목했으며, 볼셰비즘을 자신들의 명칭으로 삼을 만큼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의미상 대립적인 단어들의 결합인 민족볼셰비즘은 일견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19/20세기 유럽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와 치열하게 싸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계급 대 민족, 국제주의 대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특히 첨예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변적인 현실정치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갈등도 확고하고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민족볼셰비즘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민족볼셰비즘의 핵심 인물인 니키쉬(Ernst Niekisch)는 자신이 주도한 운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저항운동은 순전한 서구의 이념들을... 거부한다. 로마의 지배사상, 로마법, 1789년의 사상, 문명의 이념들,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부르주아적 세계관과 경제관 등 이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은 독일의 자유 투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전제이다. ... 저항운동은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단호하게 동구로 시선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 모든 수단을 동원한 군사력의 강화, 로마법적인 사유재산의 거부. 사유재산권의 제한, 자본주의적 경제 및 사회 체제의 폐기. 세계경제 체제로부터 포괄적이고 무조건적인 탈퇴.” 이처럼 민족볼셰비즘의 핵심은 자유/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서구의 거부와 친(親)동구에 있었다.
따라서 민족볼셰비키는 서구와 다를 뿐 아니라 대립적인 러시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
독일에서 패전과 베르사유 조약이 끼친 영향은 공산주의자들마저 민족주의적으로 만들만큼 컸다. 1차 세계대전을 시장의 분할을 둘러싼 자본들 간의 싸움으로 보고 전쟁을 거부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타도를 외쳤던 독일 공산당조차 조약이 야기한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종전 직후 독일에서 반(反)프랑스 정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민족을 배제한 채 계급만으로 노동자의 지지를 얻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이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허구였지만 당시의 현실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민족볼셰비즘을 처음 언급한 인물들은 1918년 독일 공산당 창당 멤버들이기도 했던 라우펜베르크(Heinrich Laufenberg)와 볼프하임(Fritz Wolfheim)이었다. 두 사람은 계획경제와 함께 독일이 러시아에 접근할 것을 촉구했다. 정복당한 독일은 두 ‘프롤레탈리아 민족국가’의 동맹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베르사유 늑약’이 독일 제국을 조각내자, 독일 민족 거의 전부가 프롤레타리아화했고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민족을 대표하는 집단은 노동자계급이라고 보았다. 이들 두 사람은 민족해방의 주체를 노동자계급으로 보았다는 면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으나 베르사유 조약과 관련해서는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윤용선, 러시아 10월 혁명과 독일 보수혁명, 1920년대 민족볼셰비즘(Nationalbolschewismus)을 중심으로, 2018, vol., no.39, pp. 5-33 (29 pages)#

5.3. 도덕적 해이

집권 이후 나치당은 초법적인 존재가 되어 갔고 견제세력도 없었던 데다 구성인원 대부분이 기득권화되어가다 보니 내부 부정부패가 심했다.[69] 나치당 내부에서는 히틀러의 신임을 받기 위한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권력을 이용해 재벌들을 억압하여 뇌물을 받아먹는 등의 부정부패가 비일비재했다.[70]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하자 나치의 정치수뇌부들은 결사항전을 외쳤지만 안전한 후방으로 철수해버리고 국민들에게는 대피령을 내리기는 커녕 적들이 눈 앞까지 왔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71] 오히려 자신들만 위해서 전쟁에서 지는 와중에도 물자를 횡령하는 부패한 인원이 대부분이였고 살기 위해 도망치는 독일인들을 붙잡아 최전선에 절망적인 저항을 하도록 보내 버렸지만 각 지역의 나치들은 시민들을 버리고 도망, 자살하거나 자신들의 잘못을 일선에서 피 흘리고 싸우는 장병들과 시민들에게 떠넘겼다.

6. 전후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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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세계 전체로 봤을 때 나치에 대한 인식이 좋은 나라는 당연히 극히 적다.

덕분에 이들은 웃자고 하는 게 아닌 이상 스와스티카나, 인터넷에서 흔히 나치에 대해 보이는 동경심 자체에 엄청난 거부감을 드러낸다. 나치의 군복이 멋지다거나 아돌프 히틀러 사진이 간지난다 같은 발언만 해도 사회적 생매장을 시키는 분위기니 주의하자.[72]

과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을 휩쓸던 독일에 대한 공포와 괴벨스의 선동술이 워낙 약발을 잘 받아서 나치의 독재 체제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빠른 재건과 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부정되는 추세다. 당장 전후 재건에 도움을 주었다는 경제 정책만 봐도 군수 산업 우선으로 체제가 바뀌면서 경제 혼란이 오기 시작했고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조직 간 손발이 안 맞아 전쟁 하는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의 비효율적인 운영으로 알베르트 슈페어를 비롯한 인재들이 이를 바로잡는데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게다가 나치당 내부의 부패는 매우 심각해 아첨꾼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괴링을 비롯한 고위직들에게 비리는 일상이나 다름없었고 당원들은 선동 활동이나 내부의 적 색출이라는 명목의 탄압 활동은 잘 했어도 막상 적들이 쳐들어오면 자기의 일신만 챙겨서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독일이 전쟁터가 되는 와중에도 국정 운영도 모르는 주제에 권력다툼에 눈이 멀어 있을 정도였다.

흔히 알려진 바로는 독일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35년 3월 자를란트 귀속, 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 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38년 9월 나치의 체코 주데텐 점령, 39년 9월 1일 폴란드 선전포고에 이르는 과정을 히틀러 정부의 호전성과 전쟁광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설명된다.(히틀러 정부가 대규모 전쟁을 벌일 의도가 별로 없었을 때도 있었다는 것은 히틀러 정부가 선택한 해군력 증강 추진 사업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38년도 말에 에리히 레더 제독은 히틀러에게 2개의 해군력 증강방안을 건의했다. 하나는 잠수함, 기뢰부설함 건조 사업이었고 하나는 10년 계획의 최신 수상함 건조 사업이었다. 히틀러는 10년 계획을 6년만에 달성하라는 조건으로 후자를 선택했다. 이것은 당장 전쟁할 계획은 없었다는 것이다. 태평양 지휘로 명성있는 미국 체스터 니미츠 제독도 ‘대해상전’에서 히틀러가 왜 후자를 택했는지 의문을 표명하면서 히틀러 정부의 해전 준비가 별로였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자를란트부터 주데텐까지 모두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해 빼앗긴 땅이었거나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으로 인해 타국 영토가 됐지만 절대 다수의 독일인이 살던 땅들이었다. 히틀러 정부가 들어선 뒤 독일 경제가 눈부시게 부활하자 재외 독일인들은 독일로 귀속되기를 열망했다. 오스트리아는 1차대전에서 패배한 국민투표로 나치독일과의 통일을 결정했지만 승전국들이 불허했다. 대공황 시기 경제난 속에서 집권한 오스트리아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반나치 노선을 추구했지만 오스트리아 대중들 중에는 독일과 통일을 원하는 여론이 점점 강해졌다. 나치당 집권 이후 독일 실업률이 갑소하고 국경 너머 독일 경제가 번영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38년도에 국민여론의 압박으로 독일과의 통일여부를 묻는 투표를 시행하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투표권을 24세로 올리는 등 부정투표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일 찬성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공정한 투표가 보장되도록 선거절차를 바로잡으라는 요구에 오스트리아가 응하지 않자 투표가 예정됐던 3월 13일 군대를 보냈다. 이듬해 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독일과의 통일은 압도적인 찬성을 받았다. 성인 3명 중 1명이 실업자였던 심각한 경제파탄의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통일한 후에 실업률이 1년 만에 1.2%로 감소했다. 1차대전 뒤 체코 땅이 된 주데텐의 다수 주민도 독일인이었다. 타국에서 소수민으로 차별과 폭력을 당하며 살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경제가 부활하자 주데텐의 독일인도 독일로의 귀속을 열망했다.

6.1. 서유럽 및 미국

프랑스는 나라가 점령 당하고 수탈을 당하는 등, 나치라면 지금도 이를 갈 정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이면도 있긴 하다. 프랑스가 나치에 의해 점령 당할 당시,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 정도를 제외하면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를 비시로 옮긴 채 독일군의 침공을 막다가 전사한 10만에 가까운 프랑스 군의 희생은 무의미하게 국토의 절반을 그냥 내줬다. 당시 상당수의 보수적인 프랑스인들은 나치의 반공주의와 코포라티즘을 어느 정도 역할모델로 삼았다.

물론 이것은 대체적인 정국의 흐름일 뿐이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분투를 평가절하할 수도 없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저항 정도는 대전 내내 꾸준히 이어졌으며, 미국이 괜히 리버레이터 같은 이상한 권총까지 따로 만들어서 뿌려준 게 아니다.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의 자서전격인 만화인 《발작》을 보면 간질 환자인 자기 형이 아주 열렬한 나치 추종자였다고 나오는 등 프랑스에도 미친놈들은 없잖아 존재하는 모양이다.

영국은 당시 유럽에서 독일에게 점령 당하지 않고 소련과 더불어 매우 치열하게 나치에 맞서 싸웠던 나라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73] 물론 히틀러의 궁극적 목표는 소련이었기 때문에 당장 영국에 신경쓰고 싶지 않아서 동남아시아로 남하하는 일본을 공동으로 막자는 등, 휴전을 하고 같이 반공 투쟁을 하자는 둥, 뮌헨 회담과 독소불가침 협상 당시 전략을 써서 영국과 전쟁을 당분간은 피하려 했지만, 이미 뒤통수를 맞아본 처칠과 영국인들은 그대로 엿이나 먹으라 하며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나치와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식민지 대국 대영제국의 숨통을 제대로 끊어버렸고,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초강대국의 자리를 완전히 미국에게 넘겨준 뒤[74] 지속적인 하락세를 걷게 된다. 그럼에도 영국인들은 이 시대를 위대한 시대라 부르며[75] 나치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물론 그들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당연할 만큼 하나가 되어 죽을 각오로 나치에 맞서 싸웠고, 그리고 이겼다.

미국의 경우도 나치와 치열하게 싸워서 승리를 쟁취하는데 큰 역할을 한 국가임에는 틀림 없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현재는 전세계에서 네오 나치 단체들이 가장 활발한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 특유의 보수성과 인종주의 때문에 1920, 30년대부터 나치즘 단체가 있었고, 미국-독일 분트는 2차대전 이전까지 꽤 큰 성장을 보였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버로우. 전쟁 이후에 미국 나치당이 1959년 결성되었고, 그 외에도 미국 국가사회주의자당이나 국가사회주의 운동 등 별의별 네오나치 단체들이 존재한다.

또한 수정헌법 1조의 위력 덕분인지 잘 찾아보면 주로 언더그라운드 넷에서 나치 드립 치는 또라이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4chan의 /b/판 상주자 같은 4chan 중에서도 상또라이 취급받는 이들이라든가, Encyclopedia Dramatica의 편집자들[76]이 이에 해당된다. 다만 인터넷상의 나치 드립이라 할지라도 상당수는 넷 언더그라운드에서 돌아다니는 블랙 코미디에 불과하며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천조국이라고 해도 공개적으로 나치 드립을 치면 눈총 받기는 마찬가지.

사실 미국은 나치 드립이라기보다 "강력한 미국, 세계 경찰 미국"을 당연시하거나 동경, 추구하는 것을 지지하는 구성원이 많다 보니 나치 드립이라기보다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외에도 서유럽에서 나치 치하에 있던 어지간한 국가는 나치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특히 네덜란드 같은 경우는 중립국 특성까지 무시당한 채로 나라 자체가 점령당했고 거기서도 유태인이 많이 끌려나가 죽었기 때문에(《안네의 일기》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치에 대한 분노는 연합 참전국 못지않게 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네덜란드의 아른헴이 연합군에게 해방된 후 그 마을에 살던 나치부역자들은 자경단에 의해 총살 당하고 독일군과 눈이 맞은 여인들은 삭발 당하고, 머리에 하켄크로이츠 낙서가 그려지고 마을 바깥으로 쫒겨나는 묘사가 있다. 이건 그나마 양반이고 그리스의 섬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코렐리의 만돌린》에서는 독일군과 썸싱만 있었을 뿐인 여성을 목매달아버리기도(...)[77]

또한 유럽에서 2차대전 관련 프라모델이나 게임을 들여올 때 하켄크로이츠는 삭제해야 유통할 수 있다. 이 경우 하켄크로이츠는 대부분 철십자 문양이나 독수리 문양으로 교체된다. 설령 유럽인이 주인공이고 나치를 때려잡는 내용일지라도. 프라모델의 경우 데칼을 반으로 잘라서 LΓ 모양 2개로 인쇄해 두고 조립자가 알아서 합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6.2. 오스트리아

나치의 전 최고지도자 히틀러가 탄생한 나라. 정작 히틀러 본인은 합스부르크 왕가로 대변되는 모국의 봉건적, 다문화주의적, 다민족적 분위기를 혐오한 나머지[78] 독일로 도피해서 독일의 국가원수가 되고 고향에게 돌려준 것은 독일로 강제합병을 한 것뿐이었고, 독일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대악당 하나 잘못 배출해서 독일에게 질질 끌려다녔으니 여기까지는 독일에 상당히 억울할 법도 하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강제적으로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들이 독일과 합병에 찬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나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국가이다. 그래서 전후 연합군의 군정이 실시되고 동쪽은 소련 치하, 서쪽은 영국, 프랑스, 미국 치하에 놓이게 되어 오스트리아도 독일처럼 분단국가가 될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타국처럼 나치를 혐오하는 게 당연할 법도 한데 정작 오스트리아 보수층은 나치에 대해 크게 혐오감이 없다.

그러나 일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게르만 민족이고, 히틀러가 탄생한 곳이라 그런지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반성이 철처하게 이뤄졌던 독일과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영구 중립을 조건으로 점령을 피한 후 분명 독일 본국과 함께 만행을 저지른 국가인데도 탈나치화 프로그램을 전혀 받지 않았고 나치 잔존세력 제거도 의미없는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1990년대 들면서 극우 정당(자유당)이 상당한 세를 얻고[79] 나치에 호의적인 정치인들이 여럿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대통령까지 한 쿠르트 발트하임과 전 케른텐 주지사였던 외르크 하이더가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에 히틀러 부모가 묻힌 묘소는 네오 나치성지순례를 하는 등 물의를 빚었다가 뒤늦게 묘소를 철거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영화배우인 아놀드 슈워제네거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출마 당시 부친 구스타프 슈워제네거의 나치군 복무 전력으로 미국 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80]

6.3. 동유럽/발칸반도 국가들

독소전쟁 시기에 유태인 만이 아니라 수많은 슬라브계 혹은 유대계, 집시계열 소련인들은 게르만족의 생활권(레벤스라움) 확보라는 명목으로 학살당했다. 또한 소련은 애초부터 베어마흐트에 비해 질적으로 열악했었던 것에 더하여 대숙청 등으로 군 지휘체계까지 막장이였던 상황이라 수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대조국전쟁 당시의 소련 측 사망자2900만 명(당시 소련 인구가 2억이었다)으로 잡고 있는데, 이 중 900만 명이 군인, 2000만 명이 민간인들이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전체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숫자다.

그러나 소련군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군을 쳐부수며 전쟁에서 승리했지만[81], 이미 모스크바에서 베를린 사이에 남아 있던 것은 오직 잿더미뿐이었으며 나치의 학살과 침공으로 생겨난 인구적 타격은 비율로나 절대수로나 가장 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러시아에서는 나치와의 전쟁을 대조국전쟁이라 부르며 승전한 날을 가장 큰 행사로 치룬다.

그런데 소련 붕괴 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러시아 등지에서는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외국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네오 나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자기네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들은 조국을 나치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웠는데 그야말로 누워서 침뱉기 하는 꼴.

벨라루스의 경우 아직까지도 사람 뼈로 이루어진 지층이 존재한다고 이야기될 정도이며, 우크라이나에서도 키예프 전투를 겪은 소련 서부 지역의 도시들은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단 이 지역들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은 소련 체체에 대한 반감이 강하여 처음에는 나치를 해방자로 인식하고 괴뢰국 설립에 일조하거나 소수민족 학살을 방조, 참여하기도 했었다. 반공 정권이나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한 명분으로 나치는 이들을 이용하다가 나중에 세력이 커지자 괴뢰국을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로 넣고 민족주의자와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위를 자행하였기에 현재 일부 네오나치 세력을 제외하면 반공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도 나치 독일군 점령 시절을 좋게 보는 경우가 드물거나 최소 중립적으로 본다.

폴란드체코, 그리스에서는 나치에 대한 평가는 더욱 안 좋은데 체코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를 뜯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나치 독일에게 합병당하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에는 강제적으로 체코인들이 나치군에 입대당해 싸우다 못해,[82] 모국을 강점한 나치군에게 저항하다가 1942년 나치군대가 저지른 리디체(Lidice) 마을 학살 사건과 레자키(Lezaky) 마을 학살 사건에서 수많은 체코 국민들이 당시 나치군이 쏘아댄 총탄 및 포탄 세례에 일방적으로 살육당한 어두운 역사를 겪었다.[83] 그리스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등 추축국에게 국토가 점령당한 적도 있으며,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70여년이 지난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 당시 그리스에게 긴축정책을 권유하던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과 독일의 정치 각료들을 현지 언론에서 나치 제복을 입은 나치독일군으로 묘사하는 만평을 올리거나 혹은 나치 독일군 장교와 합성한 포스터를 길거리에 대놓고 올리는 등# 메르켈 등 독일 정치인을 나치로 비하하기도 했다. 폴란드의 경우 1939년, 그러니까 전쟁 직전 폴란드의 인구는 3500만 명이었다. 이 중 1/6인 600만 명이 1945년까지 나치가 폴란드를 통치하는 동안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참고로 2차 대전 참전국 중 인구 대비 희생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바로 폴란드였다. 희생자 600만 명 중 290만 명은 유대인, 277만 명은 폴란드인[84]이었다.[85] 또한 법률가의 절반 이상, 의사 40%, 대학교수, 가톨릭 성직자 1/3 이상이 학살당했다.[86] 물적 피해도 심각하여 전체 국가 재산의 40%를 손실했으며, 바르샤바, 우치, 그니에즈노, 그디니아, 포즈난, 라돔, 키엘체, 타르누프, 자모시치, 토룬 등 주요 도시들이 폐허가 되었다. 게다가 전후에도 과거 완전한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기는커녕 오히려 소련의 위성국으로 휘둘려야 했던 역사가 있기에 폴란드인들에게 나치는 엄청난 역사적 시련을 던져준, 악마 그 자체다.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함께 추축국의 편에 섰던 다른 동유럽 나라들에서도 나치에 대한 인식은 안 좋긴 마찬가지이다. 이 쪽도 나치의 반강제적인 추축국 합류로 인해서 전후에도 소련에 의해 강제적으로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휘둘리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반강제적으로 히틀러에 의해 추축국에 참전해야 했던 불가리아와 다르게[87]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나치의 압력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도 전쟁에 참전하고 나치와는 별도로 헝가리군루마니아군도 독소전 등지에서 전쟁범죄도 상당히 자행했기에 애매하다.[88] 심지어 이들 3개국은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추축국의 일원이었음에도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 아닌 나치에 의한 피해국이라고 외치며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물론 나치즘반유대주의를 추종하는 현지의 극우파들과 극우 정당도 있지만 이들 3국의 국민들 대부분은 나치 독일과 히틀러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불가리아 등 발칸반도 국가로 여행 갔던 한 영국인 관광객은 불가리아의 흑해 휴양지에 불가리아 현지인에게 니네 나라 아돌프 히틀러 나치놈들이랑 손잡고 깡패짓했잖아.라고 말을 함부로 했다가 그 곳의 현지인 남성에게 멱살 잡혀 '우리나라 역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깡패라고 입 나불대지 마라',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 사람들 학살하고 잔혹하게 착취한 주제에 니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강압에 끌려간 우리나라를 비난할 자격이 되느냐?',[89] '앞으로 그 살인자 이야기 꺼내지마라. 우리도 그 놈한테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아픈 역사 있다!'라며 욕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다만 발트 3국 등지에서는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치에 부역한 이들도 많았고 이들은 지금까지 친 나치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어서 주변국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또한 발트 3국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전쟁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몇 안되는 유럽의 지역이다. 당시 발트 3국은 소련에게 강제로 합병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에게 동조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다를 수는 있지만, 나치가 오기도 전에 앞장서서 미리 유태인들을 몰아놓고 개패듯 잔혹하게 살해했던 역사까지도 독립운동으로 포장하려는 일각의 주장은 도를 넘은 듯하다. 심지어 라트비아에서는 슈츠슈타펠 자원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소련이 탄압하던 몇몇 소수민족 역시 나치를 자신을 해방하려는 자들로 보고 우호적으로 본 사례도 있다.

크로아티아[90]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같은 경우 나치당에 부역한 정교유착의 결과물인 민병대우스타샤와 현지 친나치 부역자들로 구성된 나치독일군의 외인부대한트샤르 여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나치당에게 적극적으로 부역하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영내에서 살던 세르비아계와 유대계, 집시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91] 게다가 현재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극우주의자들 사이에서 우스타샤한트샤르를 애국자로 추앙하거나 이들을 지원한 나치를 우호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다만 이 지역 역시 나치에 부역했던 것과는 별개로 추축국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인데다 마냥 나치의 지배에 따른 것도 아니어서 그런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등에 가담하여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으며[92] 일부 개념을 가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현지인들은 우스타샤와 한트샤르를 흑역사로 생각하거나 나치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보스니아 한트샤르, 나치 독일군에게 학살당했던 세르비아에서는 나치에 대한 인식이 나쁜 편. 그러나 정작 이 쪽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계로 이루어진 유고 내 저항 조직인 체트니치가 나치에 대항하는 창설 초기의 이념은 갖다 버리고 나치 독일 등 추축국에 빌붙어서 전쟁범죄를 벌이기도 하고, 1990년대 냉전 종식 후 벌어진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나치 독일이나 크로아티아를 욕하지 못할 정도로 보스니아계 주민들과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을 상대로 제노사이드 수준의 대량학살과 보복을 저질렀으니 어찌보면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볼 수 있겠다. 여하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실질적 승계국이자 옛 유고의 맹주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피 흘려 발칸의 남슬라브족을 통합하여 결성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짓밟다 못해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와 보스니아의 한트샤르의 세르비아계에 대한 학살을 지원하여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보슈냐크계 등 각 남슬라브계 민족 간 종교적 갈등과 원한, 분열을 극대화시키고 2차 대전 전후 티토가 다시 통합시켜놓았던 유고슬라비아를 다시금 분열과 학살, 몰락으로 몰아가게 만든 악의 원흉으로 여기고 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세르비아를 제외한 다른 구유고권 국가들인 몬테네그로북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의 경우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등 추축국에게 점령당한 역사 때문인지 나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알바니아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과 싸운 이력이 있어서 그런지 나치에 대한 반감이 있다. 아예 알바니아 공산정권의 초대 수반인 엔베르 호자 전 서기장이 빨치산 활동을 하며 독일군과 이탈리아군과도 싸웠을 정도. 다만 현재의 알바니아는 목구멍이 포도청일 정도로 동유럽에서 굉장히 가난한 나라인지라 나치 시절 독일에 대한 반감이 있어도 폴란드나 체코처럼 독일에 대한 과거사 사죄 요구를 드러내지 못 하고 있다.[93]

6.4. 북유럽

서유럽과 동유럽에 비하면 반감이 덜하겠지만 여기서도 평가가 영 좋지 않다. 나치가 이쪽 민족들을 롤모델로 찬양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가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대단히 착각한 것이다. 2차대전 당시 철광석을 팔아 뒷거래했다는 것이 기정사실인 스웨덴조차 유대인에 대해서는 끝까지 숨겨주고 나치에게 넘기려고 하지 않았다.[94] 물론 SSS, 뉘스벤스카 협회처럼 적극적으로 친나치 성향을 가진 단체들도 활개치긴 했으나 생각보다 영향력은 크지 않았으며 당연히 2차대전 이후에는 모두 금지되었다.

그리고 겨울전쟁, 계속전쟁 과정에서 나치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같은 사례도 실상은 소련이 더 미우니까 이이제이적인 접근으로 다가간 것이었고 나중에 라플란드 전쟁으로 뒤통수를 쳤다.[95] 덴마크[96], 아이슬란드[97], 노르웨이에서도 다른 유럽 국가들만큼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이 대세인 편이다.

특히 노르웨이에서는 아예 대놓고 나치에게 철저히 농락, 유린당한 기억이 있어 현재까지도 치를 떤다. 여자들의 경우 독일인과 노르웨이인의 혼혈을 낳을 것을 강요당했고 남자들 역시 반 강제로 독일군이나 친위대에 징집되어 종전 후에는 위의 프랑스, 네덜란드와 같은 식의 후폭풍을 겪어야 했다.[98] 괜히 안데르스 브레이빅이나 버줌처럼 대놓고 네오나치, 극우 성향을 보이는 범죄자들에 대해 법정 최고형[99]을 선고했던 게 아니다.

그리고 2차대전 이후로는 모두 대세가 그 유명한 사회민주주의 성향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일부 철없는 네오나치들이나 흑화한 신이교주의자들이 아닌 이상 자기들 칭찬해 줬다고 태연하게 전체주의, 군국주의, 독재체제를 정당화한 나치를 대놓고 찬양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고 봐도 좋다.

6.5. 아시아

그들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거나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식민제국 연합국들이 자기 식민지에서 학살, 착취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킨 것에 시달려야 했던 아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나치에 대한 반감이 덜한데, 이 때문에 나치에 대한 찬양, 미화, 희화 등등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성행하고 있다.[100]

특히 나치의 만행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던 동양에서는 금기가 덜해서 그런지 다루는 게 자유로워 이미지가 좋게 나오기도 하고 희화화가 되기도 한다. 또한 반제국주의 쪽 성격에 동감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이런 일련의 나치 미화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101]. 물론 세계의 정세를 쥐고 있는 것은 나치를 혐오하는 유럽과 북미권 국가들이므로,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대놓고 나치에 대한 평가나 논의는 시도하려 들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주로 넷 우익들이 미화 및 추켜세우기를 한다. 다행히 모든 일본인이 저런 노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서 일본의 어느 글로벌 토크쇼로 추정되는 TV 프로그램에서 나치 코스프레를 한 밀덕들이 나왔는데, 그것도 서양인들이 모인 프로그램이라 등장하자마자 현장의 모든 서양인들에게 아주 가루가 되도록 비난받고, 유럽인들만 깐 게 아니라 한국인, 중국인 등 참석한 외국인 전체에게 모두에게 비난받았다.

동영상 보기/해석, 요약본
동영상과 번역본을 보면 알겠지만 나치 밀덕들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진행자들도 방송 이미지 때문인지 중립적인 말만 하고 있지만 그들도 사실 비난하는 듯한 모습이였다.

2013년 7월 29일. 아소 다로는 한 강연회에서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어느 틈엔가 바뀌어 있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해 버렸다. 그 수법을 배워 보면 어떨까" 라고 했다.

한국은 애초부터 제3제국이 일본제국의 동맹국이었던만큼 나치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잘 나오지 않았고, 또한 독일이 조선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있던지라 일제강점기 당시의 조선인들은 나치에 대한 악감정이 별로 없었다.[102] 일제강점기 시대의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하는 사람도 가끔 가다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은 어쨌거나 일본의 우방국이었고, 한반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외국인들은 독일인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까지는 독일인들에게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는 것. 문제는 이 분들이 2차대전 이후 어쩌다 독일인들이 한국에 들렀을 때 "아, 독일? 하일 히틀러?" 하고 인사해서 당혹스런 상황이 종종 연출되었다는 것.

간혹가다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무솔리니나 히틀러의 저서가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경우가 있긴 한데,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고 어느정도 간접적인 영향은 있었다고 한다. 책 자체를 구하기 힘든 시대였고 원전은 더더욱 하늘에 별 따기로 구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나의 투쟁이나 파시즘의 원칙(The Doctrine of Fascism) 같은 책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당시 좌파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카를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접했고, 우파 독립운동가들은 소설로 된 역사적 영웅들의 이야기를 주로 접하거나 중국식 삼민주의에 깊이 공감했다. 간혹가다 일본식 근대주의자들에게 공감하거나 아시아주의에 공감하는 우파 독립운동가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일본 제국주의를 찬성한 것이 아니듯,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사례를 간혹 언급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자체에 경도된 경우는 거의 없다. 이범석 장군이나 안호상 박사처럼 나치즘 추종자나 파시즘 추종자들이 있기는 한다.

여담이지만, 한국의 사찰이나 점집에서 상징을 보고 서양인들이 순간 흠칫할 수도 있다.(사실 상식이 어느 정도 풍부하면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걸 알고 있을 리는 없으니) 사실 좌만자와 우만자는 동형이자다. 卍자에 비해 하켄크로이츠는 45도 정도 기울어 있다곤 하지만 개요 부분 첫번째 사진만 해도 안 기울어진 하켄크로이츠를 쓰고있지 않은가?

그 외에 제국주의 열강들의 악행은 잘 언급하지 않으면서 나치의 악행만 강조하는 서구권에 대한 조롱과 본인들이 직접 피해를 겪은 나치의 악행에는 분노하면서 자신들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일제의 악행에는 무관심하거나 아예 무지함을 넘어 왜곡된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신봉한 결과 일뽕 및 혐한이 극에 달하여 한국이 과거에 집착한다고 생각하는 서구권의 무관심과 무지함에 대한 심정적 반감으로 나치를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들은 나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것이 없으니 서구권이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똑같은 태도로 나치를 옹호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지하게 나치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서구권의 위선적인 태도를 비꼬는 의도가 더 강하다.

하지만 가끔 가다 중동이나 인도에 한정해서는 오히려 나치는 미국과 영국, 유대인들에 맞선 정의의 편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없잖아 있는 모양이다! 단, 이란의 경우는 중립을 표방했음에도 연합군에게 강제 점령 당한 경험이 있어서 이란 한정으론 나치 찬양 한다고 뭐라 하긴 그렇다.

중국은 사실 중일전쟁중화민국 정부와 나치 독일과 상호교류를 한 적이 있고 나치 때문에 피해를 받은 게 거의 없다. 실제로 히틀러가 "일본 제국과의 협력은 계속하되 중국 국민당에 지원은 계속하라."고 지시했었고 장제스도 양자 웨이구오를 독일군에 파견을 보내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도 딱히 나치와 엮인 적이 없는지라 중국에서도 관심이 없고 네오나치도 잘 보이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욘 라베나치 독일중국과 우호하다는 것을 알았고, 것보다 난징 대학살 때 많은 중국인들을 구해낸 공적이 있다. 그래도 오늘날 중국인들이 나치 독일 자체에 대해서는 똑같이 부정적인 입장이다.[103]

인도의 경우에는 영국의 악랄한 식민 통치와 영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면이 있는 1943년 벵갈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어 영국하면 치를 떨고 있고 찬드라 보스 등은 일본이나 나치를 비롯한 추축국과 손을 잡아 인도를 독립시키려 한 전적 등으로 피부로 와닿는 압제자인 영국보다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나치에 은근히 호의를 품기도 하며 인도에서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삶을 조명한 영화가 나오고 '총통의 카페'라는 프랜차이즈가 존재할 정도다.

이건 인도 뿐만 아니라 인도와 똑같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겪었던 남아시아의 옆나라인 파키스탄과 네팔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독일인은 파키스탄에 가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독일인인 자신을 보고 갑자기 히틀러와 나치를 열렬히 찬양하면서 유대인 욕을 하길래 경악한 일도 있다. 그래서 기사보고 "히틀러가 무슨 사람인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 라고 화를 내자 "당신이나 나나 같은 아리아 인인데 왜 그러느냐?" 라고 당황해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히틀러가 같은 아리아 인이라고 인도인을 잘 대해줬을 지는 의문이다. 히틀러가 "만약 자신들이 인도를 통치했다면 인도인들은 영국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미확인 발언이다.) 1914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전 세계의 무슬림들은 단결하여 연합군의 사탄들에 맞서 싸우라고 지하드를 선포하자 아프가니스탄과 펀자브 출신의 무슬림 인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독일군 포로들을 풀어주고 그들을 동료로 맞아들이려고 했는데 독일군 포로들은 적이지만 같은 백인인 영국이 너희보다 좋다고 생까버렸다. 존 키건의 1차 세계대전사에 나온 내용이다.

이란의 경우도 유대인하면 치를 떠는 특성상 '유대인을 쓸어주신 총통 각하'에 대해 호의를 품는 사람이 있으며 이란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유엔에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과 연합군의 음모라는 연설을 했다가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대사들이 일제히 격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만든 적도 있다. 그러나 이란에서 국부대접을 받는 호메이니[104] 또한 제3제국이나 히틀러의 학살 정책을 비판하였다.[105]

이스라엘 건국 이후 여러 차례 중동 전쟁을 치렀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집트 등 이스라엘과 견원지간인 중동 아랍권 국가들에서도 "히틀러도 유대인들에게 저런 짓은 안 했어! 히틀러가 저 개같은 유대인놈들을 죄다 쓸어버렸어야 했는데!"라면서 은근히 유대인에 맞서 싸운 투사 대우를 받기도 한다.

만약 나치가 인도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전쟁 당시 립서비스를 하긴 했어도 이들을 딱히 우대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다만 중동의 경우엔 다를지 모른다. 히틀러는 중동인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고 특히 이란의 경우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나치의 잔당 중에는 아랍 국가로 넘어가 독재자들을 위한 정치경찰 창설에 도움을 주거나 그들이 증오하는 유태인들이 세운 국가인 이스라엘과 싸우기도 했다.####

태국의 경우 힙스러운 패션 아이템이나 간지의 상징처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사회 곳곳에서 히틀러, 나치 관련 사용했다가 해외로부터 빈축을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들의 사례는 열거해도 한둘이 아닌데, 러브호텔 객실에 히틀러 사진[106], BNK48 멤버가 하켄크로이츠 티셔츠 입고 공연 #, 마담 투소 박물관 태국지점 광고에서 히틀러를 내세운다든가 #,[107], 태국 군부의 군정 홍보영화에 히틀러 및 하켄크로이츠 사용논란 #, 심지어 히틀러 사진을 사용한 짝퉁 KFC까지 등장했다. 결국 도이체 벨레에서 태국 히틀러 심볼 사용의 심각성을 보도했다.

6.6. 남아메리카

여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이라 나치에 대해서 별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거기에 이 지역은 군사독재가 극심했기에 똑같이 독재를 한 나치에게 반감을 가질 일이 별로 없었다. 실제로 수많은 나치 전범들이 이곳을 주요 도피처로 삼았을 정도. 사실상 아르헨티나추축국 편이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의 회오리 속에서도 이곳은 생각보다 피터지게 싸우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요즘은 추축국에 적대적인 중국, 러시아와의 경제 및 외교관계를 중요시하다 보니 나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성향은 많이 사라졌다.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당이 아니라 다른 악당과 동일한 수준의 악당으로 객관적으로 보려한다는 게 차이점. 다른 악당과 동일하게 대우하므로 하켄크로이츠같은 나치의 상징을 써도 제재받거나 지탄받는 일은 없다.

7. 기타

7.1. 제복과 집회, 다큐멘터리

나치의 멋들어진 제복과 장식, 그리고 웅장한 건물과 장식들, 거대한 집회와 그것을 널리 알릴 다큐멘터리.

마치 탐미주의 집단처럼 보일 정도로 나치당이 멋진 외양에 신경을 쓴 이유 중 하나는 "열등감의 해소"였다. 세련된 문화를 가졌던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 비하면 통일도 되지 못한 채 문화적 후진국 취급을 받았던 독일의 뿌리깊은 열등감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겪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처절한 상황에서 열폭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적인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그 어떤 나라보다도 더 멋지고 웅장한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위압감을 통해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고 자신들의 추악한 행동을 미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7.1.1. 제복

나치당의 제복 디자이너는 휴고 보스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보스와 그의 공장은 단지 제복생산에 관여하였을 뿐이다. 나치당의 제복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검은 SS제복은 카를 디비치(Karl Diebitsch) 교수와 그래픽 디자이너 발터 헤크(Walter Heck)가 디자인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상당부분 과거 독일제국군의 전통적인 제복에 근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순수한 창작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그들은 이 위압적인 제복을 통해 복종을 강요하는 한편 나름대로의 자긍심 고취에 성공한다.

나치의 제복은 과거는 물론 현재에 와서도 상당히 멋진 디자인으로 호평받고 있는데 이러한 디자인 호평은 아무런 이유 없이 혹은 얼떨결에 생긴 것이 아니라 철저한 히틀러의 노림수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당시 히틀러는 제복을 만들라고 지시할 때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였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멋진 나치 제복은 히틀러의 노림수대로 수많은 독일 젊은이들에게 나치에 관한 환상을 품게 만들었고, 그들을 나치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즉 나치 제복의 멋진 디자인은 계획대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멋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멋지면 입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냉정하게 말해서 나치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만한 근거는 없다. 잘 따져 보면 여러 가지 반례도 많고 논리도 100% 정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비난받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멋진 디자인과는 별개로 나치 제복은 군복으로써의 효율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보면 알겠지만 몸에 쫙 달라 붙기 때문에 뛰고 기고 구르는 전쟁터에서 입을 만한 의류는 아니다. 괜히 군복들이 크고 헐렁하게 디자인되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7.1.2. 건축

당시 유럽에서 대두되던 실용적이면서 현대적인 모더니즘 건축을 거부하고, 웅장하고 거대한 고전주의에 사로잡혀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문서에도 나온다.

7.1.3. 영상

1934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던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기록한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의지의 승리는 정치 영화의 시작이자 다큐멘터리 촬영과 연출의 수작으로 인정받는 영화이다. 그 제작의도는 나치당과 히틀러의 거대하고 웅장한 전당대회와 그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통해 암울한 상태의 독일 국민들과 세계에게 강력한 제3제국이 등장한 것을 선언하는 불순한 것이었지만 촬영과 영상만큼은 상당히 훌륭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훌륭한 영상을 통해 나치는 스스로를 미화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7.2. 동물 사랑

반전이기는 하나, 동물애호가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런 동물애호가적인 모습은 우생학과도 연계되어 있었지만.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인 데다가 사냥개로 동물 사냥을 하는 것을 금지했고 힘러도 동물에게 총질하는 것은 오락이 아닌 잔인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 외에도 나치는 각종 동물보호법[108]을 만들었고 어기는 이들은 처벌했는데 어떤 곤충학자는 곤충에게 실험할 때 마취를 제대로 안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했다.

또한 동물보호법은 위대한 아리아인에 어울리는 고고한 야수들에게만 적용되며, 소모되는 게 마땅한 가축들(=열등민족에게 어울리는 것들)은 소모되도 된다고 주장했다.#

7.3. 창작물에서

나치와 관련된 수많은 음모론 떡밥들이 심심찮게 보이며, 각종 영화, 문학, 게임, 애니메이션 등에서 '악의 화신' 내지 '악마의 군대'처럼 묘사되어 등장하고, 이 경우 십중팔구 오컬트와 엮인다. 대표적인 예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 등장한 나치의 특무기관 아넨엘베. 인디아나 존스에서는 성궤와 성배를 찾아내어 세계정복에 활용하려고 한다. 초고대문명설과 엮이는 경우도 흔하다. 울펜슈타인의 최신작에서는 평행세계를 찾아내기도 한다. 또한 대체역사물에서는 전쟁에 승리한다면, 최소한 유럽 강역, 최대로는 동/남아시아 정도를 제외한 유라시아[109] 및 아프리카, 북미까지 정복하는 경우도 있다. 심한 경우는 전쟁에 승리한뒤 같은 추축군이었던 일본과 싸우는 경우도 있다. 완전 판타지 집단이다. 히틀러 최후의 망상이었던 라스트 바탈리온 드립도 음모론의 일부로 대중문화에 자주 등장한다. 제일 대표적인 예를 들면 헬싱히틀러의 비밀지시로 1000명의 무장친위대패잔병들을 흡혈귀로 만든 무지막지한 집단 최후의 대대(헬싱)[110] 또 나치의 세계정복을 위한 비밀 연구 떡밥도 곧잘 등장한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 전투조류의 묘사나, 가면라이더의 비밀결사 쇼커 등.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점에 주의하자. 이것을 읽으면 나치의 오컬트적 성향이 철저히 주류 미디어에 의해 자극적으로 재생산되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워낙에 악역 이미지와 현실의서의 악역 역할도 했기에 악역으로 사용하기 완벽하다. 게임 상에선 (적대적) 외계인 또는 외계 크리쳐, 악마, 인류에게 적대적인 로봇(...)들, 좀비와 함께[111]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사람들이 별로 불만을 가지지않는 존재들[112] 미국인들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나치와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냉전기에는 아예 나치와 소련을 대놓고 섞어놓은,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한 혼종이 악의 조직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유행하기도 했다.TV tropes의 '빨갱이 나치'(Commie Nazis) 항목 좀비와는 달리 엘리트 병사란 인상도 강해서 적당한 난이도도 제공하는 등 악역으로 만들기엔 더없이 좋은 존재들이다.

양대 미국 만화 출판사인 DC 코믹스마블 코믹스 모두 나치를 악당으로 적극 채용했다. 진주만 공습 이전에는 세계에 전쟁을 불러온 독재 정권이니 악당이었고, 그 이후에는 국가의 적이니 당연히 악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도 나오는 하이드라와 같이 네임드 악당들으로 정착한 사례가 나오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출연권이 보장되었다. 그런데 자영업 악당들에게는 평판이 좋지 않은 것 같다.[113]

다만 요즘은 식상하다는 의식도 좀 있긴 있다. 식상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적을 바꾼 것이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 외전인 레드 얼럿 시리즈. 히틀러를 날려버려서 나치는 안 생겼는데 소련이 커버렸다.

피해가 덜한 동양쪽에선 어쩌다가 가끔 개심한 나치 기믹의 선역이 나왔는데(루돌 폰 슈트로하임이나 브로켄 주니어) 이들 때문에 해당작품이 서구권에는 수입금지되기도 했다. 또 가면라이더 시리즈의 오리지널 적 세력인 쇼커는 이들의 잔재세력이란 설정이다.

독일에서는 나치(Nazi)라는 표기 자체가 금지되어있기때문에 NS라고 한다. 사실 같은 줄임말인데…. 네오나치들은 NS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거침없는 모양.

IGN 비디오 게임 악역 투표에선 조직 그 자체로 6위에 올랐다. 등장한 게임은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모든 게임'.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에서는 시간 전쟁의 피해 중 하나로 나치가 세계정복을 하는 시간선이 형성되었는데, 29세기의 외계인들이 나치를 암살, 물자 지원, 첨단 기술 등 다방면으로 지원해주고 그 대가로 자산들은 원래 시대로 돌아가려는 계획이였다. 그러나 22세기의 지구 우주선이 나타나 외계인의 시간 여행 장치도 파괴하고 덤으로 외계인까지 죽이면서 역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8. 관련 인물

나치 독일/인물 문서로.

9. 관련 문서

9.1. 사상

9.2. 조직

9.3. 상징

9.4. 사건

9.5. 작품

9.6. 기타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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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회주의라는 명칭 때문에 혼동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흔히 알고 있는 경제 이념이나 체제가 아니라 개인보다 사회를 우선한다는 사상이다. 자세한 것은 프로이센 사회주의 문서로.[2] '국가사회주의'라는 번역은 일본 제국 시절에 사용했단 용어를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오역에 가깝기 때문에 "민족사회주의"라고 표현해야 한다는 학계 견해가 꽤 있다. 이는 '명칭 문제' 항목에서 후술하고 있으며, 국가주의#오해 문서에서도 나와 있다.[B] 나치오날조치알리스티셰 도이체 아르바이터파르타이[4] 창당자[5] 전체주의, 범게르만주의, 푈키셔 내셔널리즘, 프로이센 사회주의 등등[6] 일부 반공주의,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나치가 경제적 자유주의를 반대했기 때문에 좌파였다고 인식하고 나아가서 경제적 자유에다가 정치적 자유까지 억압한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정당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술하듯 반자본주의 우파도 있을 뿐더러, 나치당은 빅텐트 세력 확장을 위해 초기엔 좌파 세력을 끌어들였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부턴 기득권 세력과 손잡은 히틀러가 장검의 밤으로 좌익 세력을 쓸어버리는 등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태를 보였기에 이는 틀린 말이다. 반마르크스주의적 극좌의 요소가 어느 정도 포함된 극우라고 보는 것이 옳다.[7] 나치당 창설자인 안톤 드렉슬러는 독일 조국당(DVLP) 출신이고 나치 좌파(슈트라서주의)의 슈트라서 형제 역시 독일 국가인민당(DNVP)에서 파생된 독일 민족자유당(DVFP) 출신이다. DVLP와 DNVP 둘다 전통적 프로이센 보수정당인 독일 보수당(DkP)에서 나온 정당들이다.[8] 종종 아돌프 히틀러가 창설한 당으로 아는 경우도 있는데, 히틀러는 드렉슬러의 창당 이후 당을 접수한 것일 뿐이다.[A] [B] [11] 우리가 흔히 아는 나치는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의 약자라는 설도 있다.[12]서독 유학 경험이 있는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서도 이 점에 충실하여 히틀러가 나치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항상 Nazi가 아닌 NSDAP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13] 동양에서 생각하는 혈통적 민족주의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치의 내셔널리즘은 독일식 혈통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14] 슈테판 마르크스 저 ≪나치즘 열광 도취의 심리학≫ 역자 신종훈(현 경상대 교수) 역자 주.[15] 여담으로 이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건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이였다. 다만 그는 독일 제국을 이끄는 비스마르크를 좋게 봐서 독일 안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시도했기에 당대 국제주의적 사회주의자들에겐 비난을 받기도 했다.[16] 보통 민족이나 인민으로 번역하나 독일어에만 있는 고유의 뜻 때문에 정확한 번역은 어렵다. 나치 집권 후 괴벨스가 Volk를 독일 민족에만 쓰는 것으로 결정하고 다른 민족에는 사용을 금지했다.[17] 卍자와 하켄크로이츠는 불교에서 혼용된다.[18] 칼 세이건의 저서 《혜성》에 이 卍자 무늬의 상징성과 신성성에 대해 저술한 내용이 있다. 원래는 기호학적으로 신성한 상징이었으나 나치 독일이 선점/사용해버려서 신성이 나락으로 훼손되었고, 이후 금기시되었다는 내용이다. 인도에서 유래된 게르만 전통 표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卍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다. 빨간 바탕에 스바스티카를 넣는 건 히틀러가 직접 디자인했는데 卍를 뒤집어 45도 비틀어서 혁명적이고 역동적인 형태로 만들었다.[19] 당시 외국어 표기에 의한 나치 고관 인명들의 예시를 들면 유성 파열음에 된소리가 많이 쓰였는데, 히틀러는 히틀러라고 쓰기도 하지만 힛틀러라고도 표기되었다. 헤르만 괴링의 경우는 '꾀링', '꾈링' 등으로 표기되었으며(일본어 표기를 받아들여 '게링'이라고 표기한 경우도 소수 있음.),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경우 '괴뻴스', '꾀벨스', '꾀뻴스' 등으로 표기,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경우는 '리뻰트롭' 등으로 표기되었다.[20] 바이에른 주는 남독일의 중심부로 프로이센이 주도한 통일 이후에도 독립적인 분위기가 넘쳐나서 재정과 치안 등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분위기는 바이에른뿐만이 아니었다. 뷔르템베르크 작센 주도 더 많은 자치권을 보장받았다.[21] 카프 폭동의 주동자인 볼프강 카프에 의해 창당된 정당.[22] 당일 일기에 "당 기금이라는 게 용돈 수준인 놈들이 황송하게도 날 받아주시겠단다"라고 비웃고 있다. 히틀러는 세무서장이던 아버지의 유산과 연금을 물려받았기에 최소 중산층 수준은 되었으며 추가로 광고용 그림이나 엽서를 그려 판매한 수익을 합치면 당시 은행원의 평균 월급보다 더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 배경을 가진 히틀러였으니 저런 반응이 나왔던 것.[23] 히틀러는 길거리 그림쟁이 시절에 부랑자나 노숙자들 일부와 친해져 심심풀이로 연설을 자주 해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이유는 히틀러 개인 문제라기보다는 베르사유 조약 때문이었다. 조약에 따라 엄청난 군축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많은 군인들이 반강제로 전역했으며 빡빡한 심사를 거쳐 현역에 남은 이들도 급격히 조직이 축소된 여파로 인사적체에 시달려야 했다. 1차대전 시절 큰 공을 세웠던 히틀러였지만 베르사유 조약이 빚어낸 인사적체를 피할 순 없었다.[25] 당원 수 많아보이게 하려고 당원 번호를 501부터 시작하게 해놓았다. 따라서 히틀러는 55번째로 가입한 당원.[26] 그것도 두개나 받았다. 2급과 1급. 받은 사유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지만 어쨌건 객관적으로 굉장히 받기 어려운 훈장인 것은 사실이다.[27] 히틀러의 연설 기술은 대단한 수준으로 지금의 선전, 선동의 기본을 확립했다. 물론 이 시절에 이미 완성된 건 아니고 10여년 이상 선동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엄청난 연구와 경험을 통해 완성해낸 것이다. 그래도 상술된 대로 놀고 먹던 시절에도 연설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시작했던 상황이라 기본 능력은 있었다. 또한 발전한 것도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괴벨스 등의 지원이 있긴 했겠지만.[28] 당시 사민당 정권은 군부에 무장 봉기 진압을 "부탁"할 정도로 군부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 이것은 사민당, 중앙당 등 민간인 정치 세력이 1차대전을 주도한 군부를 밀어내고 집권한 것이 아니라 1차대전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쓰기 싫은 군부가 자발적으로 퇴장한 뒤에 등장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29] 베르사유 조약으로 정규군 병력이 10만명으로 제한되어, 온건 좌익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조차 민병대를 묵인했다.[30] 바이에른 주정부, 군, 경찰에서 참여한 정황 때문에 라이프치히 국가 대법정에서 판결해야 하는데도 바이에른 임시재판소에서 재판한다. 그 덕에 이미 재판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31] 완전히 합법적으로 총통이 된 건 아니었다만 적어도 히틀러가 총리가 될 때까지는 합법적이었다.[32] 개인 단위의 자유가 아닌 (1차대전 승전국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33] 브뤼닝 내각에서는 공산당의 발의한 불신임안을 나치가 찬성했다가 사민당의 거부로 부결되었고 파펜 내각에서는 모든 정파가 협조해서 압도적인 차이로 불신임안이 채택된다.[34] 굽시니스트는 '저기에 불지르고 싶은 마음은 동서고금 누구나 똑같구나.'라는 평을 내렸다. 덧붙여 당시 독일에서 방화 사건은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최고 형량을 사형으로 개정한뒤 법을 소급 적용하여 처벌하였다. 그 때문에 소급 입법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35]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의사당 방화가 나치당의 자작극이라 생각했지만, 이후 역사학계에서 연구한 결과 나치당이 개입한 정황은 없었다고 하며, 정신 이상에 걸린 사회주의자가 단독으로 불을 지른 것이라고 한다. 나치에겐 정말로 기막힌 타이밍에 일이 적절하게 터져주었기에 거의 천운이 따랐다고 할 정도.[36] 당시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손잡고 나치에 강경하게 싸웠으면, 히틀러가 순조롭게 집권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의견이 2차 대전 이후 사회민주당 평당원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큰 근거는 없다. 슐라이허 총리는 몇달 전 사회민주당보다 더한 나치 돌격대 40만과 공산 깡패들의 폭동이 함께 일어났어도 국가방위군 병력과 프로이센 무장 경찰로 충분히 막았을 거라 판단했다. 사민당의 봉기 계획 자체가 사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프로이센 경찰'이 자기들 편을 들어준다는 전제하에서 짜여진 것인데, 프로이센 주와 경찰이 나치에 완전히 장악당한 시점에서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37] 본디 당의 지도자로서 히틀러가 가지고 있던 '퓌러'라는 직함을, 공식적인 직함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힌덴부르크 사후, 대통령의 직위는 총리 지위와 통합되고 그 권한을 히틀러가 가져간 것이다.[38] U보트 부대장, 독일 해군 총사령관에 이어 히틀러 자살 후 대통령을 지낸 카를 되니츠 원수는 자신의 전쟁 회고록에서 처칠의 이 말을 인용하며, 당시 독일 국민의 히틀러 선택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의 사촌 런던데리 경은 나치를 찬양하였다.[39] 제2혁명을 주장하며 돌격대 봉기를 역설했고, 종전의 귀족적 군대를 대체하고 민중적 돌격대를 민족국가의 무장력으로 내세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도 이런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면 이미 갈아탄 상태였다.[40] 유태인 학살 당시 SS게슈타포 두 조직이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었던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41] 그래서 2차 세계대전 영화 중 히틀러에 대해 언급을 많이 하는 거고 오스터 음모사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등과 같이 히틀러만 죽이면 나치 독일은 끝이나 다름이 없어서 히틀러 암살 작전이 많이 일어난 것이다.[42] 국내에선 "사회주의제국당"이라는 번역도 많이 쓰이고 있다.[43] 공정한 룰로 복수정당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자유민주주의적 질서에 관련한 부분을 심각하게 벗어나면 독일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정당 해산이 가능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공산당은 볼셰비즘을 기반으로 한 스탈린주의적 1당 독재체제를 기본 노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해산당했다.[44] 최고위원에 해당된다.[45] 단 이 기사에서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의 국민 문화가 무슨 근거로 저급하다고 보았는지는 불명.[46]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대를 다니다가 때려치고 시인 평론가가 된다. 후에 나치당 초기 아무런 배경이 없는 아돌프 히틀러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47] 러시아 제국 망명 교포로 모스크바에서 정식 건축가 교육을 받았다.후에 나치 이론가로 나치당 인종국장을 맡았고 2차 대전 시기 오스트란트(발트3국)장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48] 정확하겐 세관장이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도시 브라우나우암인 출신으로 히틀러의 아버지는 그 도시 세관장이었다. 아버지가 은퇴 후 린츠로 이주한다.[49] 1934년 하버드대학 초청으로 나치당 인사 신분으로 졸업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하버드의 흑역사로 꼽힌다.[50] 중퇴로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18세때 자원 입대하여 중퇴가 아니라 참전자 혜택으로 조기졸업 처리 되었다.[51] <히틀러 국가 Der Staat Hitlers(1969년)> 마르틴 브로샤트(Martin Broszat) 著[52] 영미 약탈 자본은 유대인에 장악되었다면서 독일인의 산업 자본은 유익하다곤 했다.[53] 물론 괴벨스 역시 자신의 영도자인 히틀러를 위해 자신의 사소한 의견 따위는 접어두었다.[54] 당시 나치당은 레닌이 추구하는 공산주의는 볼셰비즘, 레닌주의 공산당은 볼셰비키로 불렀다.[55] 다만 농민들은(특히 프로이센 농민) 대단히 보수적이기에 나치당의 대두 전에도 국가인민당을 주로 지지했다. 자기 소유의 토지를 신성시하는 자영농들이 사회주의를 좋아한 적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56] 몇몇 이들은 나치가 충성하지 않는 기업을 억압했다는 점에서 나치의 사회주의적 면모를 강조하지만, 나치는 충성하지 않는 농민과 노동자들도 탄압하였다.[57]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치열한 노-사 대립보다 특정한 분석 틀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성향은 드물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특정 종교나 성별, 극단적인 민족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다.[58] 나치에서 사회주의뿐 아니라 예술 문화 면에서 국제적인 요소를 띄는 사상이나 성향은 무조건 유대인 음모론 드립으로 흐른다. 나치와 히틀러 기준에서 사회주의에서 국제적 요소란 마르크스식 계급 투쟁으로 유대인식(?)인 계급 투쟁을 배격해야 한다는 식으로 흘렀다.[59] 이 당시 고리대금업자의 대표격은 유대인이였다.[60] 출처:Das 25-Punkte-Programm der Nationalsozialistischen Deutschen Arbeiterpartei. vom 24. Februar 1920[61] 다만 T4 작전이 행해졌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선천적이고 국가에 불필요하고 오히려 비용이 들어가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자들은 예외로 간주되었다.[62] 물론 이는 히틀러사회주의자여서 그런게 아니라 국방군은 히틀러를 '보헤미아 상병'이라고 여기며 불신했고 히틀러 역시 그런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프로이센 장교단을 거부한 것이다. 즉 권력 관계에 따른 불신이었고 자신과 기존 군인과의 지지문제로 자신만의 사병이나 평민을 진급시킨 일은 나치 독일뿐만 아니라 이미 고대에서부터 많이들 이루어진 일이다.[63] 영미식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부류가 우파고 그 반대가 좌파라는 것은, 나치와 비슷한 극우파가 2차대전 이후로 사그러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온건우파들은 진짜 극우파들(융커나 왕당파 정치인)에게는 배척받았다. 왜냐하면 극우파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한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64] 제국 시절에도 부르주아가 주도한 영국의 정치와는 달리, 독일제국의 부르주아들(주로 국민자유당에 분포)은 융커-관료-군부의 전통주의자들에게 눌려서 정치적 영향력이 사실상 없었다.[65] 에른스트 칼텐부르너가 대표적 인물.[66] 나치당에 몸 담았다가 1939년 돌연 망명해서 히틀러에게 속았다고 책을 낸다. 독일 최대 재벌 크루프사의 데릴사위다. 국내에도 있는 엘리베이터 브랜드 티센크루프의 그가 맞다. 히틀러를 키워줬다고(?) 일부 출판물서 은막의 제왕 겸 최종보스(?)로 꼽히는 후겐베르크는 크루프에서 월급사장이나 했던 인물이다.[67] 대입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계급투쟁을 주장했다.[68]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영국에선 1950년대 국가노동자당 같은 정당이 되레 노동당과 척을 지고 보수당과 통합되는 정치 성향만으로 볼 때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69] 헤르만 괴링이 나치당 내 가장 심각한 부정부패를 저지른 당원이였다. 일화 중에 이탈리아제 스타킹 같은 제품들을 몰래 밀수업자에게 팔다가 게슈타포에 딱 포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사했더니 모르핀 중독 관련으로 정신병원에 반강제로 치료받았고 또 여러번 조사당했다.[70]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생일날에 은근슬쩍 암묵적으로 참석자들에게 선물을 가져올 것을 종용했고 참석한 당원들이나 지인들은 내심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71] 쾨니히스베르크 전투의 경우 시민들은 소련군이 도달하기 30분 전에야 소련군이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동부전선 뿐 아니라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의 진공으로 전선에 대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나치당은 서부전선의 독일 국민들을 사실상 방기했다.[72] 네오 나치나 스킨헤드가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종북주의자, 일베충, 메갈 등의 인식이 매우 좋지 않듯, 이들은 이미 주류 사회에서 병신 취급을 받고 있으므로 논외. 웃는 히틀러가 등장하는 광고 및 나치 코스프레 카페에 대해서 이스라엘 대사관과 주한 독일 대사관 측이 강력 항의한 적이 있었다.[73] 처칠 왈 우리는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한다면 나는 하원에서 악마를 지지하는 연설을 할 것이다.[74] 사실 경제 규모로만 보면 이미 1차 대전 전후부터 미국에게 계속 밀리는 상태였다.[75] 처칠이 연설에서 "우리 후손들은 이 시대를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라 부를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76] 다만 이쪽은 "죄다 까세"에 가까운 입장이라... 그런데 이 사전에서 독일을 입력하면 그냥 하켄크로이츠 반짝이는 화면만 나온다. 이전에 독일 문서에 나치 드립 엄청 쳤다가 수정전쟁 벌어지고 "걍 독일은 나치"라는 뜻으로 하켄크로이츠 반짝이만 나오는 듯.[77]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의 네덜란드계, 영국계 백인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네오 나치 정당을 만들어 하켄크로이츠를 휘두르고 돌격대 제복을 입거나 흑인들을 모든 중앙권력에서 배제하며 흑백 평등을 주장하는 흑인이나 백인들을 위협하거나 살해하며 나치를 찬양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쪽도 훗날 나치즘 비슷한 짓을 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아프리카 탈식민화 과정에서 서유럽의 식민지였던 모든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흑인 국가로 독립할 때 백인 지배를 역행하는 통에 남아공과 로디지아 두 나라 모두 국제 왕따가 된다.~~(참고로 그 아파르트헤이트는 사상적으로 나치즘, 파시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맞는다.)[78] 합스부르크 일족도 히틀러를 좋게 볼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일족의 얼마 안 남은 후손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전시에 나치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할 정도.[79] 특히 1999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인민당(우파정당)을 제치고 득표율에서 2당을 차지했다(의석은 인민당과 같은 52석.) 이를 바탕으로 한동안 인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총공깽.[80] 이 당시 나치군 출신 주지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거나 차라리 다른 미국 주로 이사가겠다고 반발하던 일부 캘리포니아 주민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다만 미국은 연좌제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였었고, 아놀드 슈워제네거 역시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47년 출생자라는 점을 내세우고 나치군 시절 아버지가 자행한 만행에 대해 사죄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아놀드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아버지의 실제 관계도 몹시 안 좋았다.[81]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전사자의 80%가 동부 전선에서 발생했다.[82]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체코 강제 징집병들이 총 버리고 살려달라며 체코어로 우린 체코인이라고 항변하며 당신들을 쏘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미군들은 체코어나 독일어나 구별 못해 그냥 다 쏴죽여버리고 뭐라는 거야? 라고 하던 장교에게 "그게? 배고프다고 밥먹겠다며 손들지 뭡니까? 하하하하하." 하고 웃는다. 체코인들에게는 굉장히 씁쓸한 장면일 것이다.[83] 체코 주둔 나치 독일군 장교를 체코의 반나치 레지스탕스 인사가 암살했다는 이유로 레지스탕스 세력들의 거점지들을 토벌한다는 명분 하에 애꿏은 민간인 마을을 초토화하고, 무고한 민간인들을 겨냥한 양민학살을 자행했다.[84] 폴란드 국립 기념원(Instytut Pamięci Narodowej, 약자 IPN), https://web.archive.org/web/20120323161233/http://niniwa2.cba.pl/polska_1939_1945.htm[85] 이 시기의 폴란드는 다민족 국가로, 1931년 통계에 의하면 폴란드 전체 인구 중 폴란드인 68.9%, 우크라이나인 13.9%, 유대인 10%, 벨라루스인 3.1%, 독일인 2.3%, 기타 2.8%로 구성되어 있었다.[86] 폴란드 엘리트층의 희생이 막심했던 이유는 나치가 폴란드 엘리트층을 모두 제거하여 폴란드 민족을 노예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엘리트의 상당수가 유대계였으니 독일에게는 그야말로 비오는 날 대청소였던 셈.[87]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히틀러가 압력을 넣어준 덕에 발칸 전쟁 당시 루마니아에게 빼앗긴 남도브루자 등 흑해 연안의 영토들을 루마니아로부터 수복했으나, 아예 홀로코스트에 참여하라는 나치독일의 유대인 호송 압력에도 자국 내 유태인 국민들을 아우슈비츠와 다하우 등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인도하지 않고 적극 보호했으며, 독소전과 서부전선에 대한 독일의 불가리아군 참전 요청도 거부한 바 있었다. 그리고 당시 불가리아 민중들 또한 독일을 썩 좋아하진 않았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중에도 불가리아 조국전선 등 나치독일군에 대항하는 반독 게릴라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며 불가리아 국내의 나치 독일군과 군사고문단, 외교관들을 공격하거나 죽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치가 패망하고 불가리아가 공산화된 직후에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토도르 지프코프도 제2차 대전 당시 반나치 게릴라 세력들을 지휘하며 나치 독일군대와 싸우던 인물이었다.[88] 당장에 추축국 아이디어를 짠 나라가 어디인지를 생각해보자.[89] 사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등 추축국의 주요국가들의 악행이 커서 그렇지.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으로 추축국과 맞서 싸우던 다른 서유럽 열강들도 식민지였던 여타 나라들에서는 잔인하고 억압적으로 통치한 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게 악용되어서 추축국 범죄나 연합국 범죄나 다를거 없다는 물타기로 이용되는 게 문제지...[90] 현대 크로아티아와 달리 2차대전 당시의 크로아티아는 추축국에서 세워준 일종의 괴뢰국이었다. 영토 자체도 실제로는 냉전시기 유고연방보다는 조금 작은 정도였다. 당시 크로아티아인들은 대부분 나치, 우스타샤에 우호적이였다. 그러니 강제부역이라 하기도 뭐하다...[91] 현지 주둔 독일국방군은 경악하여 이들과 협력을 무산시키자는 통보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정작 SS 등은 감탄했다고 한다.[92] 당장에 유고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자 2차 대전 당시 유고 파르티잔의 지도자였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도 크로아티아 출신이다.[93] 폴란드와 체코는 알바니아보다는 그래도 1인당 GDP가 높은 편이다.[94] 여기에는 라울 발렌베리의 덕이 컸다. 라울 발렌베리 문서로.[95] 그래서 종전 이후에도 대놓고 패전국 일원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종전 이후에는 소련에 상당한 배상금을 갚고 소련의 눈치를 좀 보아야 했다.[96] 나치가 쳐들어오자 체급 자체에서부터 도저히 맞설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별 저항 없이 항복해 국가체제 자체는 유지될 수 있었으나 애당초 좋아서 항복한게 아니었기에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0세는 끝까지 나치에 비협조적이었다. 히틀러가 보낸 생일을 축하하는 매우 긴 전문조차 짤막하게 '매우 고맙소' 라는 답변만 했을 정도였으며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까지 행했다. 물론 덴마크 사람들도 나치에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덴마크 영화 랜드 오브 마인에서도 덴마크인들이 독일 패잔병들을 유태인 죽인 손으로 신성한 덴마크 국기를 만졌다는 이유로 구타하는 등 그야말로 개만도 못한 존재로 보는 묘사가 나온다.[97] 나치가 덴마크 국왕의 반응에 빡쳐서 독립시켜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와 별개로 나치 자체에 대해선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당시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본국의 사이가 딱히 나쁘지도 않았거니와 독립시킨 것과 이들의 만행은 별개이니.[98] 이 '강요당한 부역질'에 관해서는 노르웨이/역사 문서로.[99] 징역 21년+5년 예방구금으로 수감자가 갱생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 경우 사실상 무기징역이나 마찬가지이다.[100] 특히 중동,인도 쪽이 심하며 구 추측국이던 일본 역시 만만치 않다. 그나마 소련 소속 공화국이던 중앙아나 캅카스 쪽은 자제하는 분위기.[101] 이는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국제 무대에서 고립된 우물 안 개구리 신세로 살아서 세계사에 대해 매우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1989년 해외 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전까지 한국인들은 외국 여행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고,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리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고 그 뒤에 반공주의 교육까지 마쳐야 했다.[102] 물론 임시정부는 대독선전포고를 하지만 딱히 나치랑 엮일 일이 없어서 악감정이 생길 일조차 없었다.[103] 한때 중국에서 반프랑스 시위 때 프랑스를 나치라 비하하고[120] 대만의 중화민국도 이미 나치와 교류한 시절인 장제스 세대 인사들은 대부분 은퇴했거나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나치에 대해선 비판적이다.[104] 그러나 팔라비 왕정 시절 고위 각료로 활동했다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붕괴,몰락하면서 미국/서방등으로 망명한 이전 이란의 고위층 인사들이나, 호메이니 집권 시기에 정치범으로 몰려 친지, 가족이 호메이니의 이슬람 근본주의 독재 정치에 죽임을 당하거나 연좌제의 고초를 겪은 적이 있었던 이란 내 국민들은 호메이니를 국부로 인정하거나 존경하지 않고 적대하거나 원수 취급을 한다.[105] 호메이니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크게 적대적이지 않고 시오니즘이나 이스라엘을 오히려 가짜 유대인들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을 괴롭힌다고 적대시했으며, 자기자신도 우리는 히틀러와는 다르다라고 일갈한 적이 있었다.[106] 독소전쟁 테마인건지 몰라도 옆에는 또 낫과 망치가 있다.[107] 실제로 마담 투소에는 역사적 유명인, 실존인물들의 밀랍인형이 있고 히틀러 밀랍인형도 있다. 다만 이게 문제가 된건 광고모델의 사용이 부적절했다는것이다.[108] 독일 최초의 동물보호법이다. 여튼 법전 내 항목을 개설한 최초의 동물보호법.[109] 이 경우 우랄 산맥 동쪽의 러시아,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는 추축국의 승리를 가정한다면, 일본제국령일 가능성이 크다.[110] 이름 자체가 라스트 바탈리온이며 본인들도 자신들이 라스트 바탈리온이라고 소개한다.[111] 단,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일 경우 감염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기에 주인공들이 고뇌하거나하는 전개가 나오기도 하고, 독자들도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기는 한다.[112]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는 아예 나치 좀비라는 괴상한 물건까지 만들었다.[113] 어스토니싱 앤트맨(2015) #8에서는 쩌리 악당들이 신입에게 나치는 부하들 죽이는걸 너무 좋아하니 절대 나치하고는 엮이지 말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있으며 태스크마스터도 태스크마스터(2020) #3에서 나치는 믿을 수 없기에 고용주로 받지 않는다고 독백한다.[114] 다만 괴링처럼 전 재산을 뺏진 않았다.[115] 현가로 30억 달러가 넘는다.[116] 고향상실heimatlos로 인한 현대인의 "실존 상실" 상태 극복. 하이데거는 현대인의 정신이 피폐해진 이유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기술주의" 때문이라고 믿었고 제3의 지대에 위치한 나치즘이 기술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117] 1966년 슈피겔지 인터뷰에 나온다.[118] 최근 들어 아렌트를 좋아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 계열 철학자들이 아렌트를 까는 주요 논리가 정작 나치당원인 하이데거를 변호했으면서 소련을 "좌파 나치즘"으로 폄훼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119] 야스퍼스는 하이데거가 나치주의자였을지언정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120] 한국을 일제라고 비하하는 것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