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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2:57:39

나치 독일/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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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인
1.1. 저항자
2. 양심적인 군인
2.1. 애매한 인물
3. 유능한 인물
3.1. 군사 지휘관3.2. 육해공군의 에이스
4. 정계의 일원이 된 민간인5. 평범했던 인물
5.1. 군사 지휘관5.2. 기타 인물
6. 시대의 증언자7.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인물8. 슈츠슈타펠9. 나치를 열렬하게 따른 인물10. 외국인 협력자들11. 희대의 악인
11.1. 핵심 전범11.2. 의사(醫師)11.3. 수용소의 간수11.4. 학살자
12. 가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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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인

이 사람들은 나치에 몸을 담았지만 민간인을 구한 위대한 영웅들이다. 민간인은 ★로, 군인들은 ☆로 표기한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하얀 장미 등 직접적으로 민간인들을 구출한 것은 아니지만 나치에 저항했던 인물은 밑의 저항자들 항목에서 따로 서술한다.

1.1. 저항자

이 사람들은 나치가 온 독일을 공포로 물들이고 있을 무렵 그에 항거했던 진정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2. 양심적인 군인

민간이나 포로 학살에 찬동하지 않았거나 반대했던 군인들이다. 전쟁은 반대하지 않았으나 군인으로서 양심은 지키려던 자들이다.

2.1. 애매한 인물

전범들보다는 양심적인 인물에 가까우나 양심적인 인물이라고 단정짓기도 어렵다.

3. 유능한 인물

3.1. 군사 지휘관

나이 순, 경력 순, 여기에 계급까지 고려하여 배치한다.

3.2. 육해공군의 에이스

4. 정계의 일원이 된 민간인

5. 평범했던 인물

5.1. 군사 지휘관

5.2. 기타 인물

6. 시대의 증언자

7.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인물

8. 슈츠슈타펠

9. 나치를 열렬하게 따른 인물

10. 외국인 협력자들

나치 독일 국적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나치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던 외국인들도 다수 있었다.

11. 희대의 악인


지금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물론 심지어 네오 나치들마저 핵심 전범들을 제외하고는 찬양하다 못해 비방하고 고인드립을 시전 하기도 한다. [45]

참고로 여기 나온 악질 5위부터는 뉘른베르크에서 죽은 인물들이 아니다.

11.1. 핵심 전범

11.2. 의사(醫師)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 참조.

아우슈비츠에서 그리고 부헨발트나 여러 다른 수용소에서 요제프 멩겔레, 호르스트 슈만, 카를 게프하르트, 카를 브란트, 카를 클라우베르크 등 생체실험에 참가한 의사들은 꽤나 많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20여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도망치거나 이름을 감춘 채 해외로 도망다니면서 살았다. 대표적으로 그 악명 높은 요제프 멩겔레만 해도 남미로 도망가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점에서 참 아이러니하다.

11.3. 수용소의 간수

11.4. 학살자

12. 가상 인물


[1] 참고로 안경 쓴 친위대 장교가 그다.[2] 무장친위대 다수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생각하면 예외적이다.[3] 그래서 친했던 셸렌베르크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4] 독일어의 sp는 어두에서 '슈프'라고 읽는다. 다만 슈필만은 독일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기 때문에 독일식인 Spielmann 이 아닌 Szpilman이다.[5] 하지만 이게 꼭 이상한 것은 아닌 게 당시엔 인종 말살 같은 전쟁범죄는 혐오하면서도 부강한 조국을 만들어 나가는 나치를 지지하던 군인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6] 유럽 최대(最大), 그리고 최고(最古)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다.[7] Przemyśl. 폴란드 남동부 국경지대의 도시. 폴란드의 독립 이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령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의 도시였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곳의 프셰미실 요새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이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 영상[8] 폴란드 유대인 절멸 작전. 이 작전 기간 동안 200만 명 가량이 살해되었다.[9] 출처 1:《나치의 병사들》, 죙케 나이첼 및 하랄트 벨처, 민음사, 518p. 출처 2: 위키백과[10] 반론: 이 사람은 융커다. 융커의 심장인 동프로이센이 단치히 회랑으로 월경지가 되었기에 이 사람도 폴란드에 대한 나치의 침공과 절멸에 긍정적이었다. 그가 히틀러를 죽이려던 1944년에는 융커(왕당파)와 총통과의 사이가 틀어진 시기다. 7월 20일 사건이 순수하게 나치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기는 힘들다.[11] 들소 작전 당시 초토화 전술과 러시아 민간인 강제이주에 관여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지만, 소련 공군으로부터 민간인들을 피난시킨 것이라는 독일 측의 주장도 만만찮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본인도 개인 성향을 떠나서 자신의 군 복무가 결국에는 나치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자결했다.[12] 두 사람 모두 반나치 성향의 우익 장교 그룹이었던 검은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히틀러 암살작전에 적극 동조하였지만, 암살이 실패하면서 체포되어 희생당했다.[13]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소련군이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해오자, 스탈린그라드에서 무사히 탈출했던 것처럼 알렉산더는 수백명의 난민과 수백마리의 말, 그리고 가문 대대로 내려온 귀중한 미술품들을 가지고, 이번에도 독일 본토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14] 전쟁이 끝나자 알렉산더는 스위스로 이주하였다. 노년에는 폴란드 영토로 변한 옛 고향인 동프로이센 슐로비텐 성을 자주 방문하여 폴란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고향의 재건을 도왔다.[15] 본인은 리델 하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결코 그 일에 찬동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리델 하트 본인부터가 에리히 폰 만슈타인 등 핵심 전범들을 미화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기에 클라이스트 역시 리델 하트와 접촉하여 자신을 미화하려 했다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16] 실제로도 중부집단군은 다른 집단군에 비해 전쟁범죄의 수가 적었다.[17] 일례로 스몰렌스크 점령 뒤 스몰렌스크 성당을 지키려 한 사례를 들 수 있다. 또한 전쟁범죄 명령은 본인 또는 윗선에서 반려했다고 주장했으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경우와 달리 이에 대한 반론은 아직 없다.[18]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라 그는 별다른 전공도 없었고 오히려 각종 패전에 책임이 있는 등, 평가에 매우 거품이 많이 낀 인물이라는 평이 있다.[19] 히틀러는 국방군의 최고참 장성들의 친나치 성향과는 별개로 이들과 사이가 나빴다. 그렇기에 이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서 장성들에게 거금의 수표 지급을 남용했다. 이는 정경유착과 맞물려 전쟁 후반 독일의 경제력이 형편없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 수표를 받은 장성들은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거나, 면세 특권을 이용해 스위스 은행에서 현찰로 환전한 뒤 땅이나 부동산을 마련하여 전후 그곳에 정착하였다.[20] 종전까지도 연합군은 케셀링이 방어하는 이탈리아 전선을 뚫는 데에 실패한다. 물론 오버로드 작전 이후에는 이탈리아 전선 자체가 소강 상태로 들어간건 감안하자.[21] 에르빈 롬멜 원수는 지원을 더 요청하기 위해 독일 본국으로 향했지만, 관료주의 체제로 인해 이탈리아 전선 책임자 케셀링, 독일국육군총감 구데리안, 총통의 대리자 알프레트 요들, 그리고 총통 히틀러 본인까지 총 4명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했다. 이렇게 지체되는 와중에 영국군은 북아프리카에서 반격에 성공한 것이다.[22] 이 영상은 비츨레벤이 마지막에 하일 히틀러를 외쳤고, 저주스러운 유언[60]을 내뱉은 탓에 공개되지 않았다.[23] 폰 클라이스트 원수는 당시 해당 지역에 주둔하던 1군단의 최고 지휘관이었다.[24] 그의 상관 격인 프란츠 할더 등이 반대했지만, 직속 상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최고 상관 히틀러가 그의 계획에 동의하였기에 작전은 실행되었다. 다만 할더가 괜히 반대한 것이 아닌데, 이 작전은 군대의 속도에 비해 보급을 간과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아라스 전차전에서 패배를 맛보기도 했으며,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애초에 승인된 것도 제 2의 슐리펜 계획에 불과한 황색 작전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25] 히틀러와 육군과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으며, 공군 책임자이자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은 전쟁 말엽에 나치의 최순실 보어만의 묘수로 배신자 이미지가 씌워지며 억울하게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바펜-슈츠슈타펠[61]의 최고 책임자 하인리히 힘러 역시 전쟁 말엽에 히틀러를 배신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뜬금없이 고분고분한 되니츠를 후계자로 삼았다.[26] 이 때 역시 같은 혐의로 의심받던 한스 슈파이델, 귄터 블루멘트리트 등은 보신을 위해 상관 격인 롬멜의 이름을 불었다.[27] 단, ~했으면 독일이 이겼을 것이다는 식의 래퍼토리는 독일 장성들의 정신승리 래퍼토리라는 건 감안하자.[28] 바로 그 헤르만 괴링이 있던 곳이다.[29] 정확히는 참모총장 대리 자격으로 구데리안을 대신해 들어갔다.[30] 무솔리니 구출 작전인 알라릭-떡갈나무 작전, 호르티 제독의 아들을 납치하여 헝가리 왕국이 소련 치하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판처파우스트-마가레타 작전, 아르덴 대공세 중의 그라이프 작전 등[31] 프랑코의 고문을 지내는가 하면, 상상 이상의 괴력으로 걷지 못하게 된 상태를 극복했다.[32] 스코르체니는 간 적도 없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법정에 섰다.[33] 이는 롬멜의 부하였던 한스 폰 루크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들은 롬멜의 요청을 듣자마자, 총통께서는 이온 안토네스쿠 원수와의 회동에 이미 만족하셨는데 그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말하며 롬멜의 말을 묵살했다.[34] 출처 :히틀러의 아이들[35] 이 당시 독일은 명목상의 공화제에 불과한 일당 독재 국가였으나, 제국 색깔 빼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3제국 체제 자체는 여러 면에서 프로이센, 즉 독일 제국의 연속체에 불과했기에 여기서의 제국은 프로이센으로 이해해야 한다.[36] 사실 성공 자체가 불가능한 공격이었던데다가, 히틀러가 언급하는 부대들은 서류 상으로만 존재하는 종이 부대였다. 괜히 Steiner könnte nicht genügende Kräfte massieren.(슈타이너는 충분한 부대를 전개시킬 수 없었습니다.)[62]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37] 전쟁 당시 영국의 가장 중요한 군항[38] 토크멘터리 전쟁사 144부 참고[39] 기존 화폐인 마르크를 렌텐마르크로의 치환하는 화폐 개혁을 통해 독일국의 초인플레이션을 단번에 진정시켜 독일이 경제적으로 안정되도록 하였다. 하인리히 브뤼닝이 의도적인 디플레이션과 내핍으로 독일의 경제 상황을 안정시키려다 실패하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실각하는 것을 지켜보았기에 본인은 기업과 결속하여 메포 어음을 발행하고 신뢰도가 높은 라이히스마르크 통화로 독일국 정부가 직접 어음을 상환할 것을 보장함으로써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덕분에 독일국은 산업 역량을 다시금 키워나가고 군대를 양성했다. 허나 곧 히틀러 정권은 이와같은 단물만 보고 메포 벡셀의 발행을 무진장 남발했고, 결국 상환 보장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침략을 통한 전시 약탈 경제를 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상환 역량을 넘어서는 군대 양성은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샤흐트는 좌천되었고, 후임에 발터 풍크가 임명된다. 애초에 2차대전의 개전 목적 자체가 전시 약탈 경제를 통한 국가 발전이었기에 전쟁범죄를 필연적으로 수반했다.[40] 영관급인데도 무려 푸르 르 메티르훈장을 수여받았다.[41] 독일인이라 송환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스스로 송환되었다.[42] 그래서 부하들에게 작전재량권을 줬다.그래서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쿠르스크 전투등에서 제1SS가 미친 수준의 활약을 보인것이다.[43] 다만 괴링처럼 전 재산을 빼앗진 않았다.[44] 풀네임은 쿠르트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폰 슐라이허이며, 슐라이허는 본인의 인생처럼 '기회주의자', '살살거리는 자'라는 뜻이라는 웃긴 사실이 있다.[45] 아주 드물게는 히틀러를 혐오하는 네오 나치도 있다. 이 경우는 히틀러와 툴레 협회 이전의 원류 파시즘을 신봉하는 경우이다.[46] 나치 독일 한정이고 일본 제국까지 합치면 무려 5천만명이 사망했다.[47] 피해자가 두 줄로 나뉘어 선 가해자들 가운데를 달려가면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몽둥이로 구타하는 방식이다.[48] 다만 그렇다고 무조건 안 했다고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으며, 기록에만 남기지 않았을 뿐 암암리에 구타를 자행했을 가능성은 있다.[49] 여기는 강제노동 없이 바로 절멸에 들어갔으며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50] 여담으로 이 일은 꽤나 나중에나 알려졌다.[51] 지페르스 또는 자이버스라 알려져 있으나 지퍼스에 가깝게 발음된다.[52] 나치의 인종학 연구기관.[53] 대표적인 실험 중 하나가 동성애자 들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얼음물이 든 탱크에다 집어 넣고서 동성애를 없애겠다는 실험이었다.[54] 1달 간의 비율로 따지면 트레블링카가 아우슈비츠보다 더 악랄했다.[55] 그러자 검사가 "무슨 소리야? 이 사람들은 다른 수용소 사람인데?" 라고 구라치자 바로 안색을 바꾸고 "그럼 내가 살린 사람들이네요?" 라고 개드립을 쳤다.[56] 골 때리는 사실은 첼레프스키도 러시아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바르샤바 봉기 당시 20만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이 있으니 할 말 없다.[57] 브루네거가 이 때 "저들은 여자잖습니까?" 라고 항명하자 이 이후로 그를 죽이기 위해 그에게 온갖 부당한 명령을 해댔다.[58] 인면암의 제4의 얼굴이 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전 나치의 간부다.[59] 다만 라스푸틴은 나치에게 고용되었을 뿐이기에 나치의 사상을 추종하지는 않으며, 심지어 멍청한 놈들이라고 비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