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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03 10:05:24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1865년 6월 19일에 하노버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국회의원 출신인 아버지 아래 태어난 후겐베르크는 괴팅겐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및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학,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891년에 초 국가주의 단체인
범독일연맹을 설립한 그는 1900년에 게르트너 아디케스와 결혼했다.
후겐베르크는 처음에 관료로 입각하여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지만 1907년에 실업가로 전직했다. 후겐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광업은행 지배인으로 취임하였고 이어서 1909년엔 크룹 사의 중역으로 초빙되어 은행업무와
철강계통의 업무를 담당하며 1918년까지 재무, 경리이사장을 지냈다.
그 사이인 1916년에 후겐베르크 콘체른을 창설했는데, 후겐베르크 콘체른은 방송장악을 위해 1920년 초엔 우익 및
보수단체 출판업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27년에 영화회사인 UFA의 사장이 되었고, 신문, 광고의 지배권을 획득해
후겐베르크 콘체른 산하엔 약 150개의 계열사가 있는 거대재벌로 성장했다.
독일제국 시절에 국민자유당 소속이던 후겐베르크는 제 1차 세계대전 후 1918년에 독일국가인민당(DNVP)에 입당했다.
이 당은 중공업 자본가의 이익을 대표하는 우익보수반동적 정당으로 후겐베르크는 실업계와 산업계를 대표하는 정당에
참가한 것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후겐베르크는 1928년에 국가인민당의 당수로 취임했다.
후겐베르크는 그의 전임자였던 크노 폰 베스타프 백작보다 당을 더욱 우선회했다. 후겐베르크는 바이마르 헌법체제를 비판하며
보다 급진적인 국가주의, 민족주의을 내세웠다. 그러나 후겐베르크는 군주제 부활엔 부정적이어서 국가인민당 내부의 보수제정파
대부분은 이에 반발하여 탈당해 새로이 보수인민당(KVP)을 결성했다.

1929년에 세계 경제공황으로 경제위기와 공산주의의 대두를 우려한 실업계를 대표하여 후겐베르크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과 접촉하여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힌덴부르크 아래 성립된 대통령내각에서 파펜과 협력해 국가인민당의 우파를
이끌고 입성했다.
파펜 내각이 무너지고 슐라이허 내각이 들어서자 다시 나치당과 연대한 후겐베르크는 1933년 1월 30일에 나치당과 보수파의
연립을 이끌어내 제 1차 히틀러 내각을 만들었다. 후겐베르크는 경제장관 및 농림식량장관으로 히틀러 내각에 입성했다.
여기서 수상인 히틀러, 내무장관인 빌헬름 프리크, 그리고 헤르만 괴링이 비록 대두했지만 내각 대부분은 여전히 보수파가 많았다.
파펜과 후겐베르크는 히틀러를 제어하여 나치당을 압박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독일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나치당은
반대세력을 축출하여 1933년 3월에 전권위임법을 성립 후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1933년 6월에 후겐베르크는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고 국가인민당도 해산의 지경에 이르렀다.
또 후겐베르크 콘체른도 강제매각되어 결국 매스미디어도 나치스의 지배하에 들어가버렸다. 후겐베르크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잃고
살다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1951년에 사망했다.
[출처] 알프레드 후겐베르크|작성자 도위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