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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폰 파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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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제22대 국가수상
나치 독일 부총리
프로이센 주의 제2대 총리
파일:프란츠 폰 파펜.jpg
프란츠 폰 파펜[1]
Franz von Papen
본명 프란츠 요제프 헤르만 미하엘 마리아 폰 파펜, 에르프젤처 추 베를 운트 노이베르크[2]
Franz Joseph Hermann Michael Maria von Papen, Erbsälzer zu Werl und Neuwerk
출생 1879년 10월 29일
독일 제국 라인란트 베를
사망 1969년 5월 2일 (향년 89세)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오버자스바흐
정당

(1918년 ~ 1932년)
(1932년 ~ 1938년)
(1938년 ~ 1945년)
신체 175cm
종교 가톨릭
배우자 마르타 폰 보흐갈하우
자녀 안토아네트, 마르가레타, 프리드리히 프란츠, 이자벨라, 슈테파니
서명
파일:프란츠 폰 파펜 서명.svg

파일:1933-10-25 - Franz von Papen - Rundfunkrede des Vizekanzlers zur Volksabstimmung am 12. November.jpg
1933년 10월 25일, 연설하는 프란츠 폰 파펜. #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정계 입문2.3. 총리2.4. 악마와 손을 잡다
2.4.1. 히틀러 내각2.4.2. 실각
2.5. 이후
3. 평가4.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독일군인, 정치인, 외교관. 독일 제국 시기 귀족 장교였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정치가로 활동하며, 프로이센주의 제2대 총리, 제22대 독일 총리 등을 역임했다. 나치 독일 시기에는 부총리 등을 역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요 정치인으로서 그는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을 과소평가하며 나치당의 높은 대중적 지지도를 이용하려 했지만, 히틀러가 역으로 그를 이용하면서, 나치 독일 정권 탄생의 1급 조연이 되어 버렸다. 나치가 집권하면서 실각했으나 완전히 숙청당하지는 않았고 나중에 외교관으로 기용되었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파일:B1JB6UjCAAEEKEk.jpg

파펜은 독일 제국 라인란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서부 귀족 가문 출신의 독일 제국 군인이었다. 명문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빌헬름 2세의 학우였다. 승마에 뛰어나 기병장교로 임관했고 참모부에 배속된다. 여기서 베프를 맺은게 나중에 애증의 관계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국 주재 국방무관으로서 대미외교를 담당하여, 본업인 군인보다 외교임무를 더 많이 맡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더글러스 맥아더(!)와 절친했고, 심지어 치머만 전보도 사실 파펜의 작품이다. 또한 인도 독립주의자들의 무장봉기를 부추기려고, 1915년에는 미국에서 구입한 총을 배에 실어 영국령 인도에 보내려는 공작도 꾸몄지만 무위에 그쳤다.

결국 1916년 독일,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의 군수공장 파업을 주도하며 파괴공작을 벌이다가 미국에서 추방당했고, 중간에 영국 해군한테 걸려서 첩보 상황도 노출되었다. 귀국한 이후 철십자 훈장을 받고, 대대장으로 서부전선에 참전했으며, 오스만 제국에 파견된 독일 군사고문단의 참모가 되었다. 참모직은 큰 의미가 없었지만 이때 히틀러와의 다리가 되는 리벤트로프를 만났다. 전쟁 끝날 때 마흔살의 육군 소령이었으니 대단한 군공이 있지는 않았다. 다만 파업 파괴공작을 주도하여 추방당한 일로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2.2. 정계 입문

파일:프란츠 폰 파펜.png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군에서 중령으로 퇴역했다. 퇴역 후에는 현재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뒬멘(Dülmen) 지역에 농지를 사서 중소 지주로 지냈다.

그러나 당시 막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우들과 극좌들의 준동에 바람 잘 날 없었고, 그가 살던 뒬멘에서는 극좌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반공 왕당파였던 파펜은 그와 뜻이 맞는 자유군단을 이끌고 극좌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에 맞섰고, 자유군단의 지지를 받아 1920년에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계에 입문했다. 가톨릭교도이자 우파였기에 그는 가톨릭 중앙당에 몸을 담았으나, 공화국을 대체로 인정하던 중앙당 지도부와 달리 그는 왕당파답게 공화국에 냉담했다. 그의 정치성향은 독일 인민당이나 독일 국가인민당에 가까웠다고 평가받는다. 1921년부터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나 별 존재감도 없고 의정활동도 거의 없었다고 하며, 1924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하원 총선에 출마하고자 했으나 중앙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가 대통령으로 출마했음에도 전쟁영웅 출신의 무소속 후보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적극적으로 지지, 당선시키는 데 공헌하여 대통령과의 친분을 쌓은 대신 중앙당 지도부와의 사이는 극히 나빠졌다. 더불어 프로이센 주의 사민당-중앙당 연립정부 붕괴를 획책하여 당에서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결국 1928년에는 프로이센 주의원을 사직하고 일단 정계에서 은퇴한다.

1930년 대공황정치극단주의 세력의 대두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정계에 복귀하였다. 당시 독일은 중앙당의 브뤼닝 내각이 의회 신임이 아닌 대통령 비상대권으로써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가 속한 중앙당은 원내 제4당에 불과했으나 원내 제1당인 사민당은 내각불신임을 날려버리면 제2당인 나치당과 제3당인 공산당이 작당해 공화국을 결딴낼 것을 두려워해 내각불신임을 포기했기에 대통령 신임만으로 내각이 유지될 수 있었다. 반공화국 성향에 반공주의 왕당파 반동주의자였던 파펜은 대통령 신임으로만 유지되는 내각을 환영하면서도 자당의 브뤼닝 내각을 연일 공격했고 사민당 금지, 나치당 등 극우파와의 연정을 요구했다.

2.3. 총리

1932년 6월, 어느 정당도 과반수 확보를 못하고 연정 또한 구성하지 못해 의회내각 구성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힌덴부르크는 대공황에 방황하는 브뤼닝 총리에 대한 신임을 거두고 파펜을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총리에 임명했다.

듣보잡이었던 파펜이 총리가 된건 국방부 정무부서 정치군인 똥별 슐라이허의 추천(뒷공작) 때문이었다. 슐라이허와 파펜은 초급장교 시절 베프를 먹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실상은 슐라이허가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허수아비로 젊은 시절 베프였던 파펜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때 슐라이허의 국방부 부하가 저런 하찮고 머리 딸리는 인간을 어떻게 추천하냐는 질문에 슐라이허 왈 "그는 머리가 필요 없어. 모자니깐!"이라면서 자신감을 드러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나 파펜에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최대의 재능이 있었다. 바로 아부 떨기와 비위 맞추기. 마누라도 친구도 없던 뒷방 노인신세였던 팔순 노인 힌덴부르크에게 큰 신임을 받은 파펜은 슐라이허와 점점 따로 놀면서 권력 기반을 굳혀나간다.

당시 주독 프랑스 대사 프랑수아 퐁셰도 역시 그렇게 서술했다.
그는 원수[3]가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생기 발랄하고 유쾌한 언행으로 이 늙은이를 즐겁게 했고, 존경과 헌신을 보여 그의 마음을 샀으며, 대담함으로 그를 기쁘게 했다. 힌덴부르크 눈엔 파펜이 완벽한 신사였다.

그러나 퐁셰는 파펜에 대해서 이렇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진지하지 못하며, 천박하고 이간질이나 잘하는 이. 사람을 잘 속이고 출세욕이 강하며, 교활하고 낯두꺼운데, 자신은 그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모든 내기를 받아 들이는 탓에 절대 위험한 일을 맡으면 안 될 사람이다."

영국 대사 호러스 럼볼드 경은 파펜이 총리에서 짤린 1933년 1월 파펜과 만나고 나서 "이 거대한 나라의 운명을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렇게 무게 없는 사람이 짊어지고 있었다니 놀랍다."고 평했으며, 전후 서독총리가 되는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는 늘 그의 수많은 한계를 감안해 정상을 참작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라고 회상했다.

보수적인 파펜 내각은 각료 중에 11명중 7명이 귀족이라 남작님 내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머지 2명은 재벌회장이었고, 1명은 슐라이허 장군이었다. 프랑스 대사 퐁셰는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아무도 믿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중에 사실로 확인되자 다들 웃거나 실소했다"라고 적었다. 총리 파펜, 내무장관 가일, 국방장관 슐라이허의 삼두정치는 프로이센주사회민주당 정부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는데, 특히 동프로이센의 토지귀족 융커의 이익을 대변하는 가일은 사민당과는 천적관계였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파펜은 당의 동의 없이 총리직을 수락하여, 슐라이허와 작당해 브뤼닝 전 총리를 중상모략했다고 의심받아 현직 총리임에도 출신당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무엇보다 대공황으로 실업자는 600만에 달하는데 실업수당이 너무 아깝다고 수령요건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고 노동자의 동의 없이 사업주가 임금을 깎을수 있도록 추진하는 바람에 재벌에 언론사 사주이자 우파 독일 국가인민당의 당수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만 열광하고 다른 우파정당 사이에서도 노동자의 적으로 찍힐까봐 버림받았다.

이렇게 파펜은 몇달 안되는 임기 기간동안 별 실력도 지지도 없는 주제에 목표는 독재다란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데다가, 자신을 비스마르크에 비유하며, 비스마르크도 헌법을 무시하며 통치했다며 바이마르 헌법을 지키지 않겠다고 대놓고 선언하고 헌법을 제국시대처럼 권위적이고 보수적으로 뜯어 고치려고 시도하는 등[4] 온갖 실책을 저질렀다.

2.3.1. "프로이센 쿠데타"

이렇게 되자 파펜은 안정적인 내각 유지를 위해 아돌프 히틀러와 거래를 했다. 파펜은 총리가 되자마자 히틀러를 만났는데 히틀러는 파펜에게 "나는 귀하의 내각을 한시적 대안으로 보고 있으며 우리 당을 가장 강한 당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라면서 파펜에게 친근감을 보였고, 파펜은 히틀러를 "깍듯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커다란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히틀러는 원내 2당인 나치당이 파펜 내각을 지지하는 대신, 2년 임기가 남은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돌격대 활동정지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고 파펜은 덜컥 승낙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요구한 대로 돌격대 활동을 허가하는 것은 이에 대한 금지 명령이 중앙정부가 아닌 사회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던 프로이센 주 주정부에 의해 내려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5] 그러나 마침 1932년 4월에 프로이센 주의 주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중앙당을 중심으로 한 오토 브라운의 연립정권이 패배했기 때문에 파펜과 히틀러에게 당시는 절호의 기회였다.[6] 주의회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얻은 나치당돌격대는 이미 법 같은 건 다 무시하고 정권을 내놓으라고 난리질이었고, 허구한날 길거리서 공산당 정치깡패 붉은전선전사동맹과의 충돌로 곤봉, 쇠파이프가 난무, 심하면 권총 살인까지 일어나는 막장 상황이었다.[7]

파펜은 7월 17일에 알트너에서 일어난 나치당공산당의 패싸움[8]을 명분으로 삼아 "프로이센 주는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선언하여 개입을 시작했다.

7월 20일에 파펜은 프로이센 주 각료들을 소집, 대통령 긴급명령을 내려 프로이센 주 총리 브라운과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카를 제펠링크를 해임했다. 또 베를린브란덴부르크계엄령을 내리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리고 친 사민당 성향을 가진 베를린의 경시총감과 사령관들을 잇달아 체포했다. 이것을 프로이센 쿠데타라고 부른다.

쿠데타를 벌여 프로이센 주 정부의 사민당 정권을 붕괴시킨 파펜은 라디오 방송에서 "프로이센 주 정부는 공산테러조직에 대항할 생각이 없다."라며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파펜은 프로이센 주 경찰청장을 겸임하면서 프로이센 주 총리로 취임했다. 의원내각제 국가의 특성상 겸직이 많고 실무부처장 자리는 정치인이 겸임하는 게 잦긴 했지만 연방 총리가 일개주 주지사와 경찰청장직까지 겸임하는 건 당시에도 특이한 상황이었다.

2.3.2. 사면초가

한편, 히틀러와 한 두 번째 약속에 따라 1932년 7월 31일 총선이 열렸다. 이때 나치당은 제1당이 되었으며(37.4%, 230석), 히틀러는 1당이 되었다는 이유로 민주적 다수결 원칙을 강조하며 총리직을 요구하면서 파펜과의 약속을 깨버렸다. 훗날 파펜은 "히틀러는 내가 두달 전에 만났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깍듯한 태도는 사라지고 요구 많은 정치인으로 돌변해 있었다." 라고 회고했다.

파펜과 힌덴부르크는 거부했으나 바야흐로 사면초가였다. 열받은 히틀러는 정권 거부 투쟁에 나섰고, 사민당에선 당연히 프로이센 쿠데타 사태로 불신임, 한때 몸담았던 가톨릭 중앙당은 사민당과 프로이센 연립정부 구성원이었으며 "전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이 짤린 건 파펜이 정치군인 슐라이허와 짜고 뒷공작치면서 배신을 했기 때문"이라며 칼을 갈고 있었고, 독일 공산당남작 나으리들의 내각인 파펜 내각이면 당연히 무조건 반대였다.[9] 또 다른 중도 정당들도 친재벌 정책인 노동자 임금삭감안이나 올려놓은 무능한 파펜을 지지했다간 표가 날아가기 때문에 지지하지 않았다.

때마침 1932년 9월에 의회가 열리자 독일 공산당에서 내각불신임결의안을 제출한다. 이에 자신의 열렬한 후빨러인 파펜을 보호하려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미리 의회 해산에 서명해 놓고 파펜을 시켜서 의회에 제출했다. 비상대권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것. 그러나 당시 제국의회 의장이었던 헤르만 괴링은 먼저 도착한 의회해산 서류는 쌩까고 공산당과 합심해서 내각불신임결의안을 상정, 찬성 512 vs 반대 42 이라는 압도적인 개관광으로 불신임안의 가결을 선포해버린다. 파펜은 내각불신임안 전에 의회해산안이 먼저 도착했다는 '절차상 문제점'을 들어서 당장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진 않아 과도내각으로 존재했지만[10] 이로 인해 입은 정치적 타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1932년 11월에 다시 총선이 열렸으나, 이 때에도 또 반공화국 극단주의 세력인 나치당과 공산당이 합쳐 과반을 넘어 각각 1당과 2당을 차지했다. 그리고 나치와 공산당이 연정을 구성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의회 신임을 못 받는 파펜 내각은 과도내각으로서만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파펜 내각이 무너진 것은 국방장관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에게 파펜을 포기하라고 공작한 탓이다.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에게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불신임한 총리를 의회 해산하고 재선거없이 비상대권으로 통치하면 곳곳에서 폭동이 벌어질 것이고 병력이 10만에 불과한[11] 국가방위군(Reichswehr)은 이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파펜의 총리직에 결정타를 먹었다.

힌덴부르크는 눈물을 흘리며 파펜을 놓아준다... 헤어지기 아쉬운 듯 자필편지로 그를 잃은 슬픔을 표현하고 서명이 된 자기 사진을 죽은 동료에 대한 감상을 노래한 "내게는 전우가 있었다네~"라는 군가 후렴구로 장식해 전해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총리공관[12] 바로 앞에 내무부에 있는 아파트를 내주고 개구멍을 통해 몰래 드나들도록 한다. 이 때문에 파펜은 총리서 짤리고도 몰래 드나들면서 계속 힌덴부르크를 구워삶을 수 있었다.

2.4. 악마와 손을 잡다

파펜은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와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속셈으로 프랑스 대사직을 제안하자 단번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슐라이허에 대한 복수, 아니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복수에 들어간다. 총리직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슐라이허를 몰아내고 권력을 되찾기 위해 나치와 다시 손을 잡았던 것.

국방부에서 뒷조사나 하고 도청하면서 정치공작이나 벌이던 슐라이허는 의회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고, 급부상하던 나치당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래서 멍청한 파펜이[13] 자기를 도와주려 히틀러와 접촉하는줄 알았단다.

한편 의회는 의회 나름 막장이었다. 의회는 해산되었으나 청문회는 열렸는데, 대통령의 친구들이 농업보조금을 해먹은게 까발려지면서 위기 상황이 온 것. 힌덴부르크는 "정치공작에 능한 저놈이 그것도 못 막는건가, 아니면 일부러 안 막는건가"하고 의심했고, 여기에 더해 농민단체가 "수입농산물 관세 내린 총리 때문에 못살겠다"라고 징징거리면서 역시 동부 지주출신인 힌덴베르크는 슐라이허에 불만을 품고 있던 상황이었다.

파펜은 뒤늦게 정치적 포텐을 다시 터트린다. 이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까지 구워삶았고, 대통령 비서실장,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어와 함께 팔순 노인 앞에서 히틀러 찬양에 나섰다. 총애하던 파펜의 설득에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다시 보게 되었고 슐라이허 경질을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상황에서도 정신 못 차린 슐라이허는 자신을 믿고 의회를 해산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팔순 노인은 해산-재선거-해산-재선거에 진절머리가 난 상황이었다.[14] 슐라이허는 예전에 의회 해산하면 폭동난다고 거짓말쳤던 전력이 있는데, 이번에도 폭동 벌어지면 어쩔 거냐는 힌덴부르크의 퉁명스런 질문에 슐라이허는 "이번엔 군대가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15] 라며 말을 뒤집어 힌덴부르크를 격노시켰고, 슐라이허가 쿠데타를 획책한다는 루머까지 돌아서 결국엔 슐라이허는 사표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파펜은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여 히틀러를 총리에 취임시키고, 자신이 부총리에 프로이센 경찰청장을 겸직하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으며 1933년 3월에 다시 총선을 실시한다는데 합의했다. 여기에 나치만으로 부족한 의회 의석 확보를 위해 독일 국가인민당까지 끌어들여 연립내각의 구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디스질, 선동질이나 일삼던 히틀러가 총리 되는 것에 반대하던 대통령 힌덴부르크를 설득한 장본인도 바로 파펜. 심지어 의회 과반 확보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게는 "제가 속한 가톨릭 중앙당도 연립내각에 참여합니다." 라고 구라까지 쳤다.[16]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대통령 비상대권을 사용하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가 아닌 의회 내각의 총리로 임명하여 원내 과반수 의석을 달성하기 어려운 총리를 자신의 영향력에 두려고 하였다. 히틀러와 파펜은 가톨릭 중앙당과 힌덴부르크에게 의회내각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위해 법무장관직은 공석으로 해놓고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가톨릭 중앙당에선 내심 연정이 요청이 오면 검토하자는 입장이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히틀러는 의회 결의를 필요로 하는 내각은 할 생각이 없었고 이미 총리가 사실상 내정된 마당에 비상대권을 쓸 수 있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만을 원했다. 그리고 연립정부 파트너 독일 국가인민당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가톨릭 중앙당이 연립정부에 끼어들면 자신이 맡기로 한 농업장관, 경제부 장관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가톨릭 중앙당의 합류는 극심하게 반대했고, 중앙당과 연립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베를린 정계에선 이미 1933년 초 이미 슐라이허 경질설이 나올 때부터 새 내각은 파펜 내각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1월 30일 내각이 출범할 때 임명장 받으러 온 장관들은 그제서야 히틀러 내각인 걸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힌덴부르크에게 임명장 받기 직전까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는 재선거를 하자느니, 내각 참여 안한다느니 병림픽을 벌이는 등 코미디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연정이 구성되고 힌덴부르크 앞으로 임명장 받으러 갈 때까지 갈등이 있었는데, 내각 출범 후 3월에 재선거를 한다는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뒷통수 맞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뛰쳐나가라고 했던 것. 이에 히틀러가 총선 결과와 관계없이 내각 인적구성은 유지한다고 또 지키지 않을 거짓말로 간신히 달랬다.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연방 및 프로이센 경제/농업 장관으로 선임되었다.

결국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다.

2.4.1. 히틀러 내각

물론 히틀러 내각이 용인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히틀러 내각을 노련한 힌덴부르크와 보수 관료들이 정치 초보 히틀러를 조종하는 괴뢰내각 정도로 생각했으며, 파펜 본인도 그런 목적으로 히틀러의 연립내각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좌파인 사민당과 공산당 또한 저질선동가 히틀러는 밑천이 드러나면 곧 몰락할 거라고 생각하고 힌덴부르크와 파펜의 꼭두각시라고 봤다.

사실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연립내각에 나치당 인사는 총리인 히틀러 포함 달랑 3명뿐이었고, 국방장관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인선한 제복군인 출신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나머지는 모두 파펜이 인선했기 때문이다.

파일:Dc3gbgf.png
당시 독일 내부의 시각을 보여주는 만평 - 후겐베르크의 운전학원.

만평 속에서, 후겐베르크는 파펜에게 "저 초짜가 저기 앞에서 자기가 운전하고 있다고 한가하게 자뻑하고 있겠지만, 경제 과정의 확실한 운전은 우리가 하고 있지요!"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만평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기관지인 <전진(Vorwärts)> 1933년 2월 1일자의 것이었는데, 당시 대중들의 히틀러 내각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17]

그러나 제복군인인 블롬베르크는 친나치당 인사였고, 히틀러를 제외한 나머지 2인 중 헤르만 괴링은 무임소장관 및 신설될 항공교통장관에 프로이센 내무장관을 겸직했다. 프로이센 내무장관에 취임한 괴링은 잘 훈련된 베를린 무장경찰 15,000명을[18] 손에 넣은 데다가 돌격대 SA를 프로이센 예비경찰로 임명해버린다. 프로이센이 나라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니 국가 경찰력이 통째로 나치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빌헬름 프리크는 내무장관직에 별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19] 내무장관이 되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총선의 관리를 도맡아 나치당 정권을 지탱해줄 수 있었다. 물론 국방장관 블롬베르크도 친나치당 인사로서 파펜을 위해 히틀러를 견제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래놓고 '히틀러 조종해야지~' 하고 있었으니 답이 안 나온다. 결국 허수아비가 된 건 파펜과 후겐베르크였다.

엉뚱하게도 당시 영국프랑스는 주독 대사의 보고를 토대로 정확하게 사태를 인지했다. 히틀러가 절대 합법적이고 온건하게 권력을 유지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그래봤자 그건 독일 국내정치고, 히틀러는 국제정치에선 암것도 모르는 생초짜에 협상 가능한 상대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얕본 것은 같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됐다. 여담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는 "별 일 아니다."라고 본국에 타전했다. 그리고 6년 후,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에 먹힌다.

2.4.2. 실각

새정부 출범 후 3월 총선을 앞두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터졌다. 희대의 운빨 보너스를 받은 히틀러는 일약 공포 분위기를 조성, 독일 공산당독일 사민당 뿐만 아니라 연립내각 참여자들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숙청을 벌인다.

히틀러의 살벌함에 히틀러를 조종하겠다던 파펜의 야망은 사라졌다. 파펜은 사이가 좋지 않던 히틀러와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관계를 이용하여,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반격을 가하려고도 했으나 대통령이 히틀러의 정국운영에 만족해버린 상태였다.

이를 대비하여 원래 히틀러와 대통령이 만날 때에는 부총리 파펜이 동참하도록 합의가 되었지만 히틀러가 약속을 지킬 사람도 아니고 비서실장 마이스너, 대통령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대령도 히틀러에 기울었다. 무엇보다 의사당 방화사건으로 비상시국이라서 파펜은 대통령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되었다.
역사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하는 어떤 민족도 아래쪽으로부터의 영원한 봉기를 견뎌낼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당 운동이 끝나야 합니다. 언젠가는 영향받지 않는 사법기관과 논란의 여지가 없는 국권에 뒷받침된 확고한 사회적 구조가 생겨나야 합니다. 영원한 역동성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독일은 허공으로 가는 행렬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도이치 혁명이라는 구실 아래 사리사욕, 나약함, 진실하지 못함, 기사적이지 못함, 불손함 따위를 퍼뜨리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부는 독일 국민이 선물해준 믿음이라는 풍성한 보물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에게 가깝고 국민과 결합되기를 바란다면 국민의 지혜를 모자란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 믿음을 키우면서 끝없이 후견인 노릇을 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를 자극하거나, 어찌할 바 모르는 국민의 엘리트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오직 국민과의 믿음에 찬 토의를 통해서만 자신감과 일하는 즐거움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요.... 비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악의에서 나온 것이라 해석되지 않고 약한 소리를 하는 애국자들이 나라의 적이라고 낙인찍히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2 829P

그래도 1934년 6월 17일에 기독교 윤리를 들먹이며 나치 정책에 반발하는 연설("마르부르크 대학교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고 독일 내에서는 언론통제로 검열되었으나, 해외로 유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연설 후에 히틀러는 파펜과 만나 파펜의 '마르부르크 대학교 연설' 내용을 정책에 반영할 것이라고 약속해야 할 정도로 굴욕을 당한다. 그러나 6월 30일에 히틀러와 나치당은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히틀러의 정적들을 줄줄이 숙청했으며, 파펜도 모든 공직에서 사퇴당한 뒤 가택연금당했다. 그나마 파펜은 슐라이허나 자기 비서들처럼 부부동반으로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장검의 밤 당일 파펜이 찾아가서 항의하려 했던 바로 그 괴링이 파펜을 보호했다고 한다. 장검의 밤 5주 후에 힌덴부르크가 노환으로 사망한 걸 보면 운빨은 아직 남아 있었던 셈이다.

파펜은 장검의 밤 이후 부총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당했고, 살기 위해 깨갱거리는 처절함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다. 실제로 파펜은 총통제를 용인하는 힌덴베르크의 유언장 작성에도 참가했다. 일설에 따르면 주제도 모르고 힌덴부르크가 사망하면 부총리인 자신이 대통령직을 '물려 받는 것'을 시도했다고도 하지만 히틀러도 파펜의 이런 깨갱거리는 모습이 측은했는지 숙청은 안 했다. 대신 그의 외교경험을 활용해 주 오스트리아 연방국 대사로 보내 오스트리아 합병 작업을 추진했다. 훗날 회상록에서는 전 유럽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합병공작을 벌였다고 술회했다.

2.5.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주 튀르키예 대사로 부임하여 중립국 튀르키예를 추축국으로 꼬드기는 작업에 전념하였고 실제로 1941년엔 독일 - 튀르키예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여전히 중립적이었고[20] 소련의 스파이에 의한 암살미수 사건까지 접한 파펜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전에는 첩보원을 시켜 영국대사관의 정보를 수집했지만 오히려 연합국의 기만전술에 걸려 독일에 잘못된 정보를 보내는 사고를 터뜨리기도 했다.

결국 1944년튀르키예나치 독일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독일로 귀국했다. 그 뒤 로마 교황청의 대사가 되는 방법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베를린 교구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고, 1944년 7월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체포를 막으려 하던 파펜은 오히려 게슈타포의 감시만 받게 되었다.

파펜은 자신의 사위인 막스 폰 슈토크하우젠 백작이 메센디에 소유한 성에서 살다가, 1945년 4월에 미군이 메센디를 점령하자 인근의 사냥꾼 가옥으로 달아났다가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파펜은 헤르만 괴링, 카를 되니츠, 알베르트 슈페어, 빌헬름 카이텔 등과 함께 나치 전범들 중에서도 거물급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던 룩셈부르크의 바트 몽들프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파펜은 나치 정권에서 공직생활을 한 점과 오스트리아 합병에 관여한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파펜 자신은 1946년 6월 14일 변론에서 히틀러에 협조했다는 사실은 부정했고, 히틀러에게 실질적으로 사임을 당한 전 정권인사는 자기뿐이었다고 항변을 했다. 그러자 영국 측 수석검사인 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 경은 이에 대해 "그렇소, 그리고 당신은 11일 후 오스트리아를 살해정부의 대사가 되었지." 라고 맞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1946년 10월 1일 파펜은 히틀러를 총리에 앉힌 동조죄와 히틀러 정권에서 대사를 지낸 고위직 인사이며, 오스트리아 합병에 관여한 죄로 기소되었지만 범죄행위가 없다는 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에 소련 측 재판관인 이오나 니키첸코는 히틀러의 범죄행위 대부분은 파펜이 가담했다고 하면서 유죄를 요구했지만 서방 측 재판관들은 이를 거부했다. 또한 프란츠 폰 파펜은 1947년 2월에 열린 비나치전범 재판에서 노동교화 8년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지만 결국 1949년무혐의로 풀려났다.

1952년에는 자신의 회상록인 <길 위의 현실(Der Wahrheit eine Gasse)>을 출판하였는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히틀러가 집권한 건 내 탓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았다. 이에 역사학자 로버트 위스트리치(Robert Solomon Wistrich)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내용"이라며 비판했다. 1959년 7월 24일에는 교황 요한 23세와 미국 주재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기에 교황시종으로 임명되기도 했고, 몰타 기사단의 일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서독 정계에 진출하려고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파펜은 은거생활을 보내던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오버자스바흐에서 1969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전쟁이 끝나고도 24년을 더 살다가 89살 장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가 죽은 해 세계는 68운동의 후유증으로 들끓고 있었고, 독일에선 그 해 10월에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된다.

3. 평가

정치적 재능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고, 프로이센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불법적인 정치 행동을 여러 차례 시도한 시대착오적 정치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권력추구의 과정에서 히틀러를 과소평가하고 그를 이용하겠다는 오판으로 역사에 악명을 남겼다. 또한 무려 89세[21]까지 장수한 것이 여생 동안에도 후대 사람들의 비판 속에 생을 마감하는 저주로 작용했다.

두뇌는 그럭저럭 우수했던 모양이다. IQ 134로, 에리히 레더와 함께 나치 전범 재판을 받은 자들 중 공동 5위. 하지만 헤르만 괴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머리가 좋다고 판단력도 좋은 것은 아니다.참고

4. 매체에서



[1] 국립국어원의 고유 명사 지침에 따르면 '폰파펜'으로 표기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규정 용례는 띄어쓰기를 반영한 '파펜, 프란츠 폰'이다.[2] '베를과 노이베르크 소금광산의 상속인'을 뜻하는 칭호이다.[3] 힌덴부르크를 의미한다.[4] 의석수 3분의 2가 동의해야 가능하다.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걸 고집했던 것.[5] 독일은 경찰병력을 중앙정부가 아닌 주정부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파펜의 권한으론 프로이센 주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독일은 지방자치제가 강한 연방국가독일 제국 또는 그 이전부터의 전통에 따라 지방행정의 자율성과 정부구성이 보장되어 치안권은 중앙정부 내무부가 아닌 주정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6] 그러나 당시 의석 과반을 차지한 나치당공산당은 허구한날 체제절멸을 부르짖어 나머지 중도 정당들과의 타협이 어려웠고, 나치당과 공산당은 서로 불구대천지원수지간이어서 새 내각구성은 지지부진했기에 사민당-중앙당 내각이 여전히 잠정내각으로 존재하긴 했다.[7] "1932년 정치 폭력으로 사망자는 155명에 달했고 나치당 55명 공산당이 54명에 달했다."-리처드 오버리 - <독재자들>.[8] 사망자 17명, 중상자 다수[9] 사실 독일 공산당은 정치혼란이 가속화되면 공산화가 더 쉬워지리라 믿었기에 이때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거부를 자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많이 동조한건 나치당이었는데, 나치당도 정치혼란의 가속화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10] 적법한 의회해산명령서가 의회 앞으로 송달된 순간 의회가 해산되어버리기 때문에 의회에서 추가로 무언가를 결의할 수는 없었다. 법치국가에서 이런 사태가 터질 경우 일단 의회해산이 앞선다고 사법부는 판결할 것이며, 재총선 후 첫 국회 본회의에서 기존 총리에 대한 내각불신임결의를 추가로 의결해야 비로소 총리를 쫓아낼 수 있다.[11]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군비 제한 때문이다.[12] 당시 대통령궁은 수리 중이라 대통령이 총리공관을 쓰고 총리는 총리공관 별관을 사용했다.[13] 사실 파펜은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몰랐다. 그냥 느낌으로 알았던 것. 그래서 슐라이허는 파펜이 자신을 증오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덤 앤 더머[14] 저 병림픽이 몇년에 한번 벌어진 수준이 아니라 몇 달에 한번씩 벌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뤼닝 내각이 1932년 5월 30일에 무너진 후 파펜 내각이 두 달 뒤인 7월에 세워졌는데 넉 달만에 무너지고 다음에 들어선 슐라이허 내각은 두 달만에 무너졌다. 이따위 상황에 힌덴부르크가 진저리가 나지 않으면 이상할 일.[15] 군과 프로이센 경찰병력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했다고 한다.[16] 당시 독일 의회는 재적의원 584명이었고, 나치당의 196명과 독일 국가인민당의 52석을 합쳐도 과반에 미달했기에 70석의 가톨릭 중앙당이 합류해야 의회 과반을 확보하는 안정적인 내각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펜은 총리직을 수락한 당시 허락을 얻지 않은 덕분에 당에서 쫓겨난 외톨이였고, 당연히 당의 연립내각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없었다.[17] <전진>은 사회민주당이 나치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폐간되었고, 2차대전 패전 후 부활하여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18] 경찰이라곤 하지만 기관총장갑차까지 보유했다. 시가전에서 공산당 정치깡패 '붉은 전사 동맹'이나 돌격대는 그냥 쳐바르기 충분했다. 이미 1929년에 공산당의 베를린 폭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전력도 있다.[19] 바이마르 공화국은 연방제라 주의 자치권이 높았고, 특히 치안은 전적으로 주의 권한이었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연방경찰에 해당하는 조직이 없었다.[20] 튀르키예의 국부인 아타튀르크가 죽기 전에 히틀러는 미친놈이니 절대 손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당시 튀르키예 대통령 이스메트 이뇌뉘2차대전 후반까지 중립을 고수했고 이후 전황이 연합국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연합국 쪽에 합류했다.[21] 2차대전이 끝날 당시에 이미 6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