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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 Gustav Adolf Bauer 구스타프 아돌프 바우어 |
출생 | 1870년 1월 4일 |
사망 | 1944년 9월 16일 (향년 74세) |
재임기간 | 1919년 6월 21일 ~ 1920년 3월 26일 |
출신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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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2대(제11대) 총리. 각종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어려웠던 독일 국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자 시도했지만 전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총리로는 단명하고 말았다.[1]2. 생애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에서 1870년 출생하였다. 실업학교를 졸업한 이후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였으며[2] 사무원 노조의 대표자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1912년 슐레지엔 브레슬라우에서 사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제국의회 진입에 성공하였으며, 원내 활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독일 제국의 전쟁 수행 지지여부를 놓고 사민당은 사분오열하지만, 바우어는 굳건한 에베르트의 지지자로 남아있었으며, 1918년 11월 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된 뒤 뒷수습을 위해 제국 총리에 오른 에베르트는 바우어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그간의 지지에 보답한다.이후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고 필리프 샤이데만이 총리직에 오르지만[3] 그에 상관없이 바우어는 노동부 장관 자리를 유지한다. [4] 하지만 샤이데만은 취임한 지 불과 넉달만에 베르사유 조약 승인을 거부하면서 총리직에서 사퇴해버리고 바우어가 그 뒤를 이어 제국총리에 오르게 된다. 바우어 내각은 울며 겨자먹기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바우어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추락하게 된다. 어쨌든 바우어는 지옥과 같았던 종전 직후 독일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각종 개혁을 단행하였고, 부유세 도입/ 실업급여 지급 / 출산지원과 같은 당대 상황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정책이 수반된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을 위해서는 국가의 튼실한 재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한 상식인데, 전후 독일은 전쟁배상금 문제로 인하여 완전히 빈털터리였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바우어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재정장관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1919년 10월 정치적 극단주의 세력에게 암살당하면서 개혁은 완전히 추진력을 잃고 만다.
안 그래도 위태롭던 바우어 내각의 숨통을 끊은 것은 1920년 3월에 일어난 카프 폭동이었다. 대통령 에베르트까지 나서서 노동자들에게 폭동에 대항하는 총파업을 호소한 끝에 폭동을 간신히 수습됐지만 바우어의 지도력 역시도 사실상 끝장이 났고 결국 바우어는 3월 27일에 사임한다. 그리고 그 뒤로는 헤르만 뮐러가 총리에 임명된다.[5] 이후로도 바우어는 의원직을 유지하면서 헤르만 뮐러 / 요제프 비르트 내각에 참여하였으나 1925년 뇌물 스캔들에 연루되어 당에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1년뒤 출당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사민당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바우어 본인의 정치 생명 자체는 끝장난 것과 진배없었고 본인 역시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후 1933년 나치가 집권하고 수권법이 통과됨에 따라 사민당의 중진 출신이었던 바우어 역시 나치의 표적이 됐고 공금 횡령 혐의로 같은 해 6월 나치에게 체포됐다. 하지만 증거불충분[6]으로 곧 석방됐으며 이후 바우어는 은둔하다가 1944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난다.
[1] 딱 219일 재임했다.[2] 변호사는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사무실 직원으로 근무하였을 뿐.[3] 에베르트는 대통령으로 자리를 옮긴다.[4] 바우어 본인이 주 40시간 근무, 건강보험, 보통 선거 보장 등의 개혁책을 도입하면서 인기가 좋았다.[5] 하지만 헤르만 뮐러는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총선에서 참패하고 3달이 채 안되어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애초에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한 것 자체만으로 독일 국민들은 사민당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기도 했고.[6] 이 과정이 무척 골때리는데, 애초에 공금 횡령의 증거로 제시된 것이 바우어의 아들의 진술이었다. 그런데 바우어는 결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