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Alois Brunner 알로이스 브루너 |
출생 | 1912년 4월 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사망 | 2001년?/2010년? (향년 89세?/향년 98세?) 시리아 다마스쿠스 |
복무 | 슈츠슈타펠 (1938년 ~ 1945년) |
최종계급 | 슈츠슈타펠 대위 (최상급돌격지도자)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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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로이스 브루너 (Alois Brunner) |
2. 초기 행적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에는 빈에 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유대인 이송국>으로 배치되어 아이히만의 부관으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을 폴란드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 1943년 2월까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4만 7천명을 수용소로 보낸 브루너는 그 공적으로 승진을 거듭 해 1940년 4월 20일의 총통탄생일 당시 친위대 소위, 1941년 11월 9일엔 중위, 1942년 1월 30일엔 대위로 승진했다. 1943년 2월부터 그리스의 테살로니카로 파견되어 그곳의 유대인 명사 25명을 인질로 잡은 후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이들을 총살하겠다고 하며 유대인 사회를 협박했다. 이리하여 테살로니카와 마케도니아의 유대인 5만 8천 명 중 4만 4천명이 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브루너는 1943년 6월에 프랑스로 부임해서 그곳의 유대인 2만 7천 명을 수용소로 보냈다. 또 슬로바키아로 파견되어 1만 4천명의 유대인을 이송했으며 다시 헝가리로 부임해 1만 2천 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브루너가 전쟁터에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전시 많은 독일병사들이 전선에서 전사할 때 브루너는 일관되게 안전한 곳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4. 전후 행적
독일이 패전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브루너는 친위대의 군복을 벗고 한 명의 독일시민으로 숨어지냈다. 전후 브루너는 알로이스 슈마르딘스트라는 가명으로 독일의 난민으로 분류되어 서독으로 입국했다. 서독에 머무르던 중 그는 독일의 구 정보부원으로 對소련에 방첩임무를 하는 겔렌 기관에 합류해 공작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4년에 브루너는 독일을 빠져나가 프랑스 정부는 궐석재판으로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게오르크 귀셔라는 가명의 여권으로 이집트의 카이로로 이사한 그는 다시 시리아로 이주했다. 이 사실을 안 서독정부 및 프랑스 정부, 오스트리아 정부, 그리스 정부는 시리아에 대해 알로이스 브루너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리아는 <브루너란 사람은 살고 있지 않다>며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시리아는 브루너를 유대인 문제의 정보부 고문으로 앉혔기 때문이었다. 정보기관에서 오랫동안의 경험을 쌓은 브루너는 아직 미숙한 시리아의 첩보기관원들에겐 대선배로 추앙받아서 시리아 정보기관은 독재정치의 유지를 위해 그를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았다.5. 암살 위협
그러나 브루너는 결코 안전하지 못해 1961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폭발물이 든 편지를 받았다. 브루너는 첫 번째 편지를 개봉하다가 한쪽 눈, 두 번째 편지를 개봉하다가 손가락을 잃었다. 이것은 민간인의 소행이라 보기 어려워 이스라엘 첩보기관인 모사드가 한 짓으로 의심받았다.6. 최후
1995년에 독일정부는 브루너에게 33만 3천달러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 걸었다. 하지만 브루너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는데 이에 열받은 프랑스는 1999년과 2001년 두 번에 걸쳐 궐석재판으로 브루너에게 종신형 판결을 내렸다. 시리아는 아직도 브루너가 국내에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데 현재 그의 생사도 불명인 상태이지만 나이를 고려하면 2001~2010년 사이에 사망했을 것이다.말년의 브루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