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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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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4695161220214155g.jpg
이름 Hermann Hoth(헤르만 호트)
출생 1885년 4월 12일
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주 노이루핀
사망 1971년 1월 25일 (향년 85세)
독일 니더작센 주 고슬라르
복무 독일 제국군(1904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파일:Si_4a.png 육군 상급대장(Generaloberst)
신체 157cm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공방전
청색 작전
겨울폭풍 작전
쿠르스크 전투
주요 서훈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1. 개요2. 생애3. 평가4. 호트의 기갑 이론5. 주요 보직 내역6. 진급 내역7. 주요 서훈 내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Hermann_Hoth.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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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media.liveauctiongroup.net/14049536_1.jpg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독소전쟁에서 맹활약한 독일 국방군 장성. 대표적인 기갑 지휘관 중 한 명이다.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Generaloberst).

군사적 능력이 출중한 군인이었으나 하인츠 구데리안과 마찬가지로 원수에는 진급하지 못했다. 또한 독일군이 벌인 전쟁범죄에 핵심적인 책임이 있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호트는 1885년 4월 12일 독일 제국 브란덴부르크 주 노이루핀(Neuruppin)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에 입대하였고, 위관급 장교 시절에는 토르가우 소재 제72보병연대에서,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제국 독일 육군대학 과정을 수학하였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예비군 장군 참모부에 소속되어 정보 수집 임무와 제342보병연대 대대장을 역임하였고 제30보병사단의 작전참모가 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단 작전참모를 지냈던 그는 다시 중대장을 2회에 걸쳐 수행하였다.

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에도 계속 군에 남아 1920년에 육군성 편제과 장군 참모장교로 복무하였고, 1925년에는 훈련처 보좌관, 1929년에는 슈트가르트 보병연대 1 대대장, 1932년부터 2년간 보병 제17연대장을 수행하였다.

2.2. 폴란드 침공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이후인 1935년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독일 육군 제18보병사단장을 역임하였다. 육군 중장으로 승진한 1938년 11월에는 제15차량화군단장에 취임하였고 이 부대를 이끌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휘하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폴란드 침공에 참전하였다.

2.3. 프랑스 침공

호트의 제15기갑군단은 프랑스 침공에서 A집단군 소속인 귄터 폰 클루게의 제4군 소속으로 배속되어 공세의 핵심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의 우측방을 엄호하며 병렬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벌어졌는데 15기갑군단을 이루는 두 기갑 사단장인 제5기갑사단장 막스 폰 하르클리프 소장과 훗날 명성을 크게 얻게 되는 제7기갑사단장 에르빈 롬멜 소장의 갈등이었다.

롬멜은 어차피 좁은 기동로에 2개 사단이 한꺼번에 투입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사단이 선봉에 서고 제5기갑사단으로 갈 도하 물자와 기타 지원 장비를 죄다 자신의 사단에게 몰아 달라고 호트에게 강력히 요청했고[1] 하르클리프는 롬멜의 요청에 펄펄 뛰며 맞섰다.

롬멜의 파격적이고 이기적인 요청에 호트는 무척 난감해 했지만 결국 롬멜이 계속 졸라댄 끝에 롬멜의 요청을 들어 주고 하르클리프를 겨우 진정시켰다. 그 결과 롬멜의 7기갑사단은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인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보다 먼저 뫼즈강을 도하하고 사단급 제대로써 대활약을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2]

물론 그 과정에서 군단장인 호트는 잊혀졌으며 프랑스 전역을 조금이나마 다룬 책에서는 호트의 돌파 축선에서 호트는 언급이 안되고 롬멜만 언급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쨌든 호트는 프랑스 침공 때의 공을 인정받아 7월 19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2.4. 독소전쟁

2.4.1. 바르바로사 작전

파일:external/weaponsandwarfare.files.wordpress.com/tumblr_lyo1hiqiw11r3eyedo1_1280.jpg
바르바로사 작전 전날 하인츠 구데리안과 담소하는 호트. 이들은 중부집단군 소속 기갑군 사령관으로 참가해 기동전을 제대로 보여 주었다.

독소전쟁 전에 호트는 새롭게 편성된 제3기갑집단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3 기갑 집단은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과 함께 독일 중부 집단군의 중핵이 되었다.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제3기갑집단은 바일리스톡으로 진격, 네만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하여 작전 목표인 민스크 동쪽으로 향해 남쪽에서 버그 강을 건너서 진격한 제2기갑집단과 회합 지점에서 합류해 민스크 포위망을 완성했다.

민스크 포위망이 재빨리 안정화되자 호트는 진격을 속개해 7월 3일에 제2기갑집단과 함께 스몰렌스크 포위에 나섰다. 7월 6일에 소련군은 700여대의 전차를 동원해 제3 기갑 집단에 역습을 가했으나 호트는 독일군이 잡고 있던 제공권을 바탕으로 소련의 공세를 차단했다. 한편 제2기갑집단은 드네프르 강을 도하해 북쪽에서부터 남하를 시작해 제3기갑집단과 포위망을 형성하려 하고 있었다. 스몰렌스크 포위망 안에는 소련 3개 야전군이 갇혔다. 7월 18일에는 포위망의 틈이 10마일로 좁혀졌고, 결국은 소련군 8만을 포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바르바로사 작전이 한계에 달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략을 위한 '타이푼 작전'을 입안하고 개시했다. 타이푼 작전에 따라 10월에 호트의 제3기갑집단은 제2기갑집단과 협격하여 바쟈마-브랸스크 포위망을 형성하고 소련 4개 야전군을 섬멸했다. 그때 호트는 제17군 사령관으로 전속되어 남부집단군에 배치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공방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호트는 클루게의 제4군을 엄호하며 철퇴전을 벌여 비교적 성공적으로 후퇴를 마무리했다.

2.4.2. 청색 작전

후방에서 제17군을 재정비시키던 호트는 제4기갑군의 지휘권을 에리히 회프너에게 인수받아 제4기갑군사령관이 되었다. 제4기갑군은 카프카스 공략 계획인 '청색 작전'에 B집단군에 전속되어 진격했는데 호트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과 보조를 맞추며 맹렬한 진격 속도를 선보였다.

제4 기갑군의 공세는 소련 브랸스크 전선군을 강타했고 결국 제4 기갑군은 브랸스크 일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제4 기갑군은 스탈린그라드를 향한 공세에 합류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제6군과 합세해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을 밀어붙였다.

2.4.3. 겨울폭풍 작전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의해 역전 국면으로 들어갔고 제6군과 4기갑군 소속 제24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 안에 포위되었다. 호트의 제4기갑군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가 지휘하는 급조된 돈 집단군에 배속되었다. 만슈타인의 제6군 구출 작전인 겨울폭풍 작전에 따라 호트는 제4기갑군을 몰고 돌진해 들어갔다.

겨울 폭풍 작전에서 제4기갑군 소속 제6, 23 기갑사단은 북동쪽으로 진격하며 소련 제51군을 강타하고 12월 12일 하루 동안 50킬로미터를 진격했다. 제6기갑사단은 치르 강을 넘어오며 역공을 가하는 소련 제5전차군을 상대로 7:1의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40차례나 공세를 격퇴해 냈다. 그러나 알렉세이 강 목전에서 소련 제5 근위군이 증원되어 제4기갑군의 공세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12월 13~18일 사이 소련군은 '소(小) 토성 작전'을 실행, 돈 집단군의 겨울 폭풍 작전을 되받아쳤고 파울루스 또한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오려 하지 않아 결국 겨울 폭풍 작전은 좌절되었고 호트는 24기갑사단을 구하지 못한 채 후퇴해야 했다.

제4기갑군은 로스토프를 향해 밀려오는 공세를 막기 위해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에 병력을 보냈지만 결국 로스토프에서도 밀려나야 했다. 하지만 돈 집단군을 개칭한 남부 집단군의 사령관 만슈타인의 계략에 따라 제4기갑군은 전력을 보존한 채 후퇴했고 결국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파블로그라드 북쪽 포위와 소련 제3 전차군의 하르코프 지원 기도를 무너트리는 등의 강력한 기동 전력으로서 대활약을 하며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2.4.4. 쿠르스크 전투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쿠르스크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를 잘라내기 위한 치타델 작전을 준비했고 호트의 제4기갑군은 쿠르스크 남쪽에서 남부집단군의 선봉으로 주공을 맡게 되었다. 호트의 제4기갑군은 제24기갑군단, 그로스도이칠란드 기갑척탄병 사단이 배속된 제48기갑군단, 그리고 강력한 전력을 갖춘 제2SS기갑군단을 배속받아 독일군이 보유한 어떤 기갑군보다 더욱 강력한 기갑군이 되었다.

호트는 제48기갑군단과 제2SS기갑군단을 쿠르스크 남쪽에서 병렬 진격시켜 작전 목표에 도달할 생각이었다. 호트는 제48기갑군단의 공세를 성공시킬 목적으로 제10기갑여단 소속 194대의 최신예 중형전차 5호 전차 판터를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에 배속시켜 거의 350대에 이르는 거대한 기갑사단을 만들었다. 한편 하우저의 제2SS기갑군단에는 제8항공군단의 지원 출격을 거대하게 할당해 균형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작전이 시작되자 테스트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급하게 투입된 판터 194대 중 160대에 설계 결함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것이 호트의 극단적인 배치와 공격 계획에 더해 좁은 기동로에 지나치게 많은 전차를 투입한 제48기갑군단에게 있어서 최악의 시너지 효과를 초래했고, 이는 결국 판터의 배치를 기다리는 기간 동안 강화된 소련군의 방어에 의해 작전 목표 달성에 크게 실패하는 결과를 낳으며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돌출부 남쪽 공세를 삐걱이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호트는 전술적 예비대를 두지 않는 리스크가 큰 도박수를 두었는데 공세의 핵심을 맡았던 제48기갑군단의 실패로 부정적인 연쇄 효과가 발생하며 자충수가 되고 말았고 쿠르스크 남부에서의 진격이 실패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제2SS기갑군단은 대진격에 성공했지만, 결국 제4기갑군은 히틀러의 결정에 의해 쿠르스크 전투에서 물러나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2.5. 학살 명령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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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으로 부패한 열등 민족인 적을 제거하는 것만이 국방군이 유럽과, 특히 독일을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1941년 11월 17일 내린 '동부에서의 독일군의 행동 강령' 中. 《히틀러의 장군들 1: 만슈타인 평전》 338p에서 재인용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준동하는 파르티잔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많은 소련군 부대들이 독일군의 공세에 섬멸되긴 하였으나 모두는 아니었고, 많은 수의 소련군 잔당 및 주민들이 파르티잔으로 변하여 후방에서 독일군의 보급선을 위협했다. 물론 그들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인종주의에 물들어 조국을 침략하고 자신들에게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침략자들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수의 독일 장군들은 볼셰비키와 유대인이 주민들을 선동해 파르티잔을 일으킨다고 여겼으며, 따라서 파르티잔 근절을 위해서는 이들을 말살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카이텔 원수가 내린 지령을 시작으로, 현지의 작전 지휘관들 다수가 휘하 유대인과 볼셰비키에 대해 일반적인 전쟁 규칙과는 다른, 파괴적인 절멸 전쟁을 수행하기를 기대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독일군의 장기이자 전통적인 전술인 섬멸전이 나치의 인종주의와 결합하여 소련인들에 대한 종족적 파괴로 확대 실현되는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6군 지휘관 라이헤나우 원수가 주창한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이다. 이 명령은 룬트슈테트, 만슈타인 등 다수의 야전지휘관들이 재차 강조했는데, 호트도 그 중 하나였다. 만슈타인 평전의 저자 브누아 르메이에 따르면 호트는 라이헤나우보다도 더욱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국가와 민족에게 해가 되는 외래 인종에 대한 가혹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선포하였다.

독일군은 찬란한 유럽 문명의 질서, 그리고 도덕을 수호하는 우등민족의 기사로, 반면 볼셰비키와 유대인은 이를 파괴하려는 열등인종이자 아시아의 적으로 선포되었다. 호트는 독소전을 이 두 양립불가능한 세계의 생사를 건 싸움으로 이해했기에 이 '적'들에 대한 조직적 섬멸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와 독일 장군들이 보았을 때 '적'인 유대인과 볼셰비키가 파르티잔을 조직하는 주된 세력이었으므로, 파르티잔과 이를 도와주는 주민들은 그 자체로 유대인이자 볼셰비키였고, 따라서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이는 독일 국방군 병사들이 직간접적으로 전쟁범죄에 관여하게 되는 근거로 작용했다.

2.6. 퇴장과 전후

호트의 제4기갑군은 소련군의 미우스 강과 드네프르 강 공세를 막아내려는 만슈타인의 기동 전력으로서 곳곳에 투입 되었지만 호트의 노력으로도 이미 전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호트는 소련군의 계속되는 공세를 일부 저지시키거나 지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남부집단군의 다른 제대들과 함께 드네프르 강 우안에서 축출당하고 키예프를 소련군에게 내주었다.

히틀러는 키예프를 함락당한 것의 책임을 물어 1943년 11월에 호트를 해임했다. 이후 계속 예비역이었던 호트는 1945년 봄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독일과 체코 북부사이의 에르츠 산맥 수비대장으로 임명되어 종전될 때 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호트는 추가적인 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아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6년 만인 1954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호트는 제3기갑집단을 지휘할 때의 참모장이었던 발터 폰 휘너스도르프[3]가 죽자 이를 추모하며 발간한 제3기갑집단 지휘기록인 <기갑 작전-제3 기갑 집단과 1941년 하계 독일군 지휘에 대한 작전적 사고>(Panzeroperation - Die Panzergruppe 3 und der Operative Gedanke der deutschen Führung Sommer 1941)를 썼다.

호트는 1971년 1월 26일 니더작센 주 고슬라르에서 죽었고 그곳에 묻혔다.

3. 평가

호트는 독일 국방군이 배출한 뛰어난 기갑 지휘관 중 하나였고 야전군급 기갑 부대 지휘에서는 하인츠 구데리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에리히 회프너,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뛰어난 장군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상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도 호트의 기갑 운용 경험과 기갑 부대 지휘 능력을 존중했고 기갑부대 운용에 대해서는 대개 호트의 의견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상당히 겸손한 성격으로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거나 과장하기는커녕 객관적으로 뛰어난 전공도 내세운 적이 없다시피 하다.

또한 휘하 장병들을 아끼는 덕장(德將)으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제4기갑군 장병들은 호트를 '파파(Papa)'라는 애칭으로 부를 정도였다. 프랑스 침공 당시 롬멜과 하르클리프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롬멜의 무리한 요청을 받아들이고 이를 조정하여 독일군의 쾌속 진격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4기갑군 사령관 당시 "볼셰비즘과 그 살인 조직을 지지하는 유대인, 파르티잔을 섬멸하는 것은 자기 방어 조치이다."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면서 남부집단군 주둔 지역에서 행해진 포로와 민간인 사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고 이러한 혐의가 인정되었다. 20세기 후반, 독일 군사학계에서 슈츠슈타펠만이 아닌 국방군이 동부전선에서 행한 인종 범죄에 대해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호트는 자신이 아끼던 부하들을 전범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지휘관으로 비판받고 있다.

4. 호트의 기갑 이론

호트는 그의 저서 <기갑 작전>에서 그의 기갑 운용 방법을 설명했는데 그 요점은 이것과 같다.

먼저 기갑 부대의 집중 운용의 이유를 명시한 내용이다.
“기갑 및 차량화 사단은 지상군 작전의 집행자이다. 기갑은 가장 강력한 공격 무기이나 그 전투력이 신속하게 약화되므로 집중 운용하여야 한다. 각각의 사단과 군단을 분리하여 운영하는 것은 실패로 인도하는 과오이다. 기갑군은 2전선이나 부차적인 목적이 아닌 결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곳에 투입하여야 한다. 과정면에서 통일되지 않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분할 운용은 힘의 분산으로 이어진다.”

서부와 동부전역의 기갑 운용 실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40년 서부 전역은 작전적 사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적 중앙으로부터의 돌파, 해안으로의 진격, 연합군의 분리 및 각개격파, 거의 모든 기동 부대를 결정적 지점에서 통합 효과 발휘를 위해 집중 운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시아 전역은 육군 차원의 통일된 작전적 사고가 부재했다. 바바로싸 부대전개 지침은 국지행동을 위한 전술적 명령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기갑 부대는 모든 전선에 걸쳐 분산 운용되었다. 모스크바 공격이라는 최후의 결전을 시도할 때도 기갑 부대의 1/3은 여기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기계화 고속 기동 부대의 기동에 대한 비전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
“기갑 부대는 대담한 작전에 이용하여야 한다. 기갑 부대는 정면 압박이 아니라 적 후방 연결의 차단과 같은 전투를 추구한다. 이때 위험은 피할 수 없다. 고속 기동 부대의 기동성에 대한 신뢰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적의 종심과 후방으로의 진격은 적의 우회 및 포위, 종국에는 붕괴로 이어져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작전에 투입되는 부대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포위의 규모가 커지고 더 많은 적이 격멸로 귀속된다. 즉 공간과 전투력은 통일되어야 한다.”

돌파 시 보병으로 적진지를 최초 개척하고 기계화 부대가 초월 시에 발생되는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기갑 부대를 선두에서 운용해야 기동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래야 기타 행군 대열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보병 부대와 협조하여 적 전선을 돌파해야 할 경우 기갑 부대를 측후방이 아닌 정면에 투입하고 고유의 좁은 정면과 전진축을 부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갑 부대를 후방에 배치하여 차후에 공격 보병을 초월하는 것은 대부분 시간의 손실을 초래하고 적에게 전선을 재보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기갑 및 기계화 부대 지휘관의 대담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대담하고 신속한 행동을 통해 달성된 기갑 부대의 성공은 작전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작전의 마비를 제거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기갑 부대 지휘관의 모험심을 둔화시키지 말고 고무시켜야 한다. 최선의 방호 수단인 기동성을 지체시키고 장시간 동안 지역에 구속하는 것은 기갑 부대 고유의 내적(內的) 본질을 위반하는 것이다.”

또한 호트는 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쟁에서 늘 그렇듯이 적을 기습하는 것은 기갑 부대의 성공 가능성을 용이하게 하고 극대화시킨다. 기습은 무엇보다도 적 부대와 지휘 기능을 마비시키며, 모든 방어 조치를 무너뜨리는 기동의 속도를 촉진시킨다. 기동을 어렵게 만드는 지형에서도 기습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기습이 가능하지 않다면 무리하게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경솔한 행동에 미혹(迷惑)당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교전시의 전투 대형과 행군 대형에 대해 강조한 것이다.
“가용한 모든 기동로를 활용하여 횡대 대형으로 진격하는 것은 각각의 구성 요소의 행군 기동을 용이하게 하고 공중 공격의 효과를 제한시킨다. 그러나 적과의 교전에 있어서 작전적으로 비효율적인 방향으로 지향되지 않기 위한 사전 조치가 필요하다. 전쟁에서 모든 구성 요소의 통합 지휘에 있어 일반적으로 종심으로부터의 전환이 측방으로의 전환보다 용이하다.”

5. 주요 보직 내역

6. 진급 내역

7. 주요 서훈 내역


[1] 요청 뿐만이 아니라 소위 긴빠이(...) 행위도 한 바람에 예하 사단장들을 달래느라 죽을 맛이었다고...[2] 참고로 7기갑사단 최선두로 뫼즈강에 도달한 부대가 다름아닌 5기갑사단에서 뻇어온 오토바이 중대였다(...)[3] 1898.11.28 ~ 1943.7.17. 최종 계급 중장(사후 특진).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 독일 금십자 훈장 서훈자. 1차 대전의 베테랑으로 1941년 7월 1일 대령으로 진급, 이후 호트와 만슈타인 밑에서 활약하였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제6기갑사단을 이끌던 중 아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참모진 몇 명이 후송되었을 때 그는 현장에 남았지만, 얼마 안 있어 적 저격수의 공격을 받아 회복하지 못하고 숨졌다. 그의 장례식에는 만슈타인과 호트, 그리고 전선에서 간호사로 종군하던 그의 부인이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