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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루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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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30일 ~ 1945년 5월 8일 (향년 61세)
1. 개요
나치 독일의 정치인이자 히틀러 내각의 교육부 장관, 슈투름압타일룽 대장.2. 생애
1883년 독일 제국 하노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베를린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 및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08년 교사 자격을 취득하여 하노버 라츠김나지움(Ratsgymnasium)의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육군에 입대하여 참전하였는데, 이때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고 전쟁이 끝난 후 하노버로 돌아왔다.1922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하노버 및 브룬스비크의 대관구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나치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933년 총리가 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프로이센 자유주의 문화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34년 교육부가 신설되자 루스트는 교육부 장관[1]에 임명되어 독일의 교육 체계를 개편하였다.
그는 우선 새로운 교육의 상징으로 교사와 학생들 간의 인사를 나치식 경례로 통일시켰다. 또한 독일의 각 대학에서 유대인 출신 교수 1,000명 이상을 추방하였다. 이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프랑크[2] 등 유명한 과학자들 또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되어 스위스나 미국으로 떠나야했다.
또한 장래 나치 지도자의 육성을 위해 나폴라라 불리는 새로운 학교를 만들었다. 이렇듯 그는 교육의 모든 기능은 나치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장관으로서의 권한을 상당히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바로 히틀러 유겐트가 탄생한 것이었다. 1936년 발두어 폰 시라흐의 주도로 <히틀러 유겐트 법>이 제정되면서, 히틀러 유겐트는 각급 학교를 뛰어넘는 국가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모든 독일의 남녀 어린이들은 10세부터 여기에 참가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루스트는 이러한 정책은 학교의 정식교육에서 벗어난 위험한 행위라고 판단하였으나, 히틀러가 시라흐를 지지하면서 그의 의견은 묵살되고 말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나치의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서 아이들까지 전쟁에 동원되자 루스트는 이에 반대하여 비록 학습 시간은 대폭 줄였지만 방공호 내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자 루스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뉘벨(Nübel)이라는 도시에서 권총으로 자살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6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