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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두어 폰 시라흐 | 아르투어 악스만 |
국가지휘자 및 국가 유겐트 총책임자 발두어 폰 시라흐 Baldur von Schirach | ||
출생 | 1907년 5월 9일 | |
독일 제국, 베를린 | ||
사망 | 1974년 8월 8일 (향년 67세) | |
서독, 라인란트팔츠 | ||
재임기간 | 히틀러 유겐트 총책임자 | |
1931년 10월 30일 ~ 1940년 8월 8일 | ||
국가지휘자 | ||
1933년 6월 2일 ~ 1945년 5월 8일 | ||
정당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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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돌격대 대장, 히틀러 유겐트의 총책임자.2. 생애
2.1. 대학생 시기
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의 주역 인물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였다. 그가 히틀러와 가까워졌을 때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귀족 출신의 그는 대학생일 때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나치의 활동범위를 대학으로 넓히라고 충고했지만, 지식인 계층을 혐오했던 히틀러는 그의 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열광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자, 히틀러는 생각을 바꾸었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훗날 그가 히틀러의 전용사진사 하인리히 호프만의 딸과 결혼할 때, 히틀러는 독일산 셰퍼드를 결혼선물로 주기까지 했다.2.2. 나치당 활동
1930년대 초, 그는 기존의 모든 독일 청소년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의무화시켰다. 그는 거기서 나치의 미래가 젊은이들의 것이라는 감정을 강하게 심어주었으며. 그러한 미래를 위한 죽음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그는 독일의 젊은이들을 히틀러에 열광했던 스무 살의 자신처럼 만들었으며, 이는 나치의 수괴라면 흡족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로써 나치는 시라흐의 이상이 뭐든 간에, 독일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국방군 군복을 입은 폰 시라흐. |
2.3. 최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그는 할 말이라곤 오직 한 마디밖에 없으며,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이 남자가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믿었다." 고 했다. 그는 슈페어처럼 재판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인물이었으며, 슈페어도 의사와의 면담에서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회하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 점이 참작되어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슈판다우 교도소에 들어갔다.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20년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을 때, 그는 더욱 볼품없고 허약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눈의 한쪽은 실명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은 그가 감옥에 있는 도중 1949년 7월에 이혼을 해 버렸다.[2] 1974년 8월 8일에 67세의 나이에 죽은 그의 묘비에는 자신의 선동을 따라서 죽음으로 헛되히 몸을 내던진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나는 너희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적혀있다.
3. 평가
나치당의 주요 인물들이 본인들이 내세운 우월한 인물상과 상반되는 행보를 보였던 것처럼[3], 시라흐도 개인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정반대 타입의 인물이었다. 그는 돌격대원 같이 저돌적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체격이나 외모도 볼품 없었고, 취미 역시 감성적이어서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 능력으로 히틀러를 사모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그는 대단히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이었고, 젊었을 때부터 이미 '가치 있는 죽음'을 깊이 동경할 정도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한 '가치 있는 죽음'에 대한 동경이 히틀러의 선동과 당시 독일의 영웅주의적 분위기 등에 맞물리며, 그는 히틀러 유겐트 선전 활동을 행하여 수십 만 명의 청소년들을 유혹해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오히려 유혹에 빠졌다며 진심으로 뉘우친 사람이었고, 선전 활동 이외에는 학살 작전 참여도 안 했고 해당 서류 작업 등도 맡은 바가 없기에 이렇다 할 악행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동 때문에 미치광이 어른들이 만든 전장에서 죽은 히틀러 유겐트들을 추모했다.
수많은 나치군 간부들과는 달리, 자신의 행동을 무엇 하나 부정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반성하다 살아간 인물 중 한 명. 만약 나치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그냥 평범하게 시인이나 문학인으로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4. 매체에서
영화 뉘른베르크에서 24명의 전범 피고인 중 한 명으로 등장. 20년형을 선고 받는다.높은 성의 사나이 세계관에서는 나치가 승리했음에도 '나만 정상인' 포지션은 변치 않아서, 대대적으로 추진되던 러시아인 절멸 프로젝트를 기를 쓰고 막았다고 한다. 이후 차기 총통 후보로 거론되지만,[4] 안타깝게도 괴벨스에게 패하고 숙청당한다. 여주인공인 줄리아나 크레인이 진심으로 독일의 총통이 되길 바랬던 걸 보아, 추축국 치하의 식민지인들에겐 한줄기 희망이었던 듯. 아쉽게도 드라마판에선 별다른 언급이나 등장이 없다.
한국의 대체역사물 소설인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선 나치당과 민주주의 세력 간에 내전이 벌여지자, 히틀러의 명으로 유겐트를 전선으로 데리고 왔다가 발터 모델에게 미쳤냐며 멱살을 잡힌다. 다만 본인도 자신이 이건 아니라는 건 통감했는지, 내전이 끝나고 재판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묵묵히 10년형을 받는다.
5. 여담
위 사진에선 꽤 마르게 나오지만 실제로 꽤 통통한 사람이였다.
발두어 폰 시라흐는 20년 동안 감옥에서 살고 도중에 이혼도 당했지만, 적어도 말년에 참회한 덕에 의외로 자손들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꽤 있다. 자녀로는 안젤리카 베네딕타(1933~), 클라우스(1935~), 로베르트(1938~1980), 리하르트(1942~)가 있으며, 차남인 로베르트의 아들인 손자 페르디난트(1964~)는 변호사이자 작가이고, 삼남인 리하르트는 중국학을 전공한 학자이며, 리하르트의 딸 아리에데(1978~)는 철학자이자 작가, 저널리스트 및 비평가[5]이다. 역시 리하르트의 아들인 베네딕트(1984~)는 독일, 스위스 이중국적자로서 '베네딕트 웰스'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소설가이다.
헨리 포드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해당 문서 참조.
나치당의 주요 인물 중 한국인과 연이 있는 인물이다. 다름아닌 강세형. 독일 유학 당시 상당한 이념교류를 하고 히틀러 유겐트 소속으로 3년을 보냈다. 강세형은 해방 이후 이범석의 참모로 파시즘(나치즘에 가까운)의 이념을 개조 및 전파하였다.
[1] 무장친위대에는 아예 부대명이 히틀러 유겐트인 사단도 있었다![2] 전 부인은 1992년 사망.[3] 괴벨스는 소아마비 환자였고, 힘러는 술조차 제대로 못 마실 만큼 병약했으며, 괴링은 비만에 마약 중독자였다.[4] 라이벌은 다름아닌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헤르만 괴링이다! 명실상부 히틀러의 2인자였던 두 인물들과 겨룰 정도로 성장했다는 의미.[5] Deutschlandradio Kultur의 문학 비평가이며, 발트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자이퉁(FAZ) 등의 신문에 에세이나 칼럼을 싣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