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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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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李範奭 | Lee Beom-seok
파일:LEEBEOMSEOK.png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ca993b> 출생 1900년[1] 12월 11일[2]
한성부 중서 수진방 수진궁계 용동[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사망 1972년 5월 11일 (향년 71세)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가톨릭대학교 명동성모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1호
본관 전주 이씨[4]
이명 왕운산(王雲山), 이인남(李麟男)
철기(鐵驥, 哲琦)
재임기간 초대 국무총리 (이승만 정부)
1948년 8월 15일 ~ 1950년 4월 20일
초대 국방부장관 (이승만 정부)
1948년 8월 15일 ~ 1949년 3월 20일
제8대 내무부장관 (이승만 정부)
1952년 5월 24일 ~ 1952년 7월 22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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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ca993b> 부모 아버지 이문하
어머니 연안 이씨(생모)·김해 김씨(계모)
배우자 김마리아(1970년 사별)
자녀 아들 이부흥, 이인종(李仁鍾)
친척 손자 이규준(李揆俊), 이규원(李揆元)
학력 사립 경성장훈학교 (수료)
이천공립보통학교[A]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 (중퇴)
항저우체육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종교 유교 (성리학)대종교개신교 (침례회)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5(참)
약력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한국광복군 참모장
초대 국무총리국방부장관
제2대 주중화민국 특명전권대사
제8대 내무부장관
초대 참의원 의원
상훈 건국공로훈장 복장(1963년 수훈)[6]
군사 경력
임관 중국 윈난 육군강무학교 (기병과 / 1기)
복무 중국 국민혁명군
1919년 ~ 1946년
한국광복군
1940년 ~ 1946년
최종 계급 중장 (한국광복군)
주요 보직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대한독립군단(고려 혁명군) 기병 대장
한국광복군 부참모장 및 참모처장
병과 기병
참전 청산리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
파일:이범석총리_초상화.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독립운동2.3. 대한민국 시기2.4. 6.25 전쟁 시기2.5. 6.25 전쟁 이후
3. 타 독립운동가들와의 관계4. 관련 문헌5. 저서6. 노래7. 기타8. 대중매체에서
8.1. 대체역사물
9. 선거 이력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국(祖國)!”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 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제 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이다.
이범석의 회고록 『우둥불』
대한민국독립유공자. 8.15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 활동했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청산리 전투 참전, 한국광복군 참모장 등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활약했으며 8.15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국방부장관을 지내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을 빛낸 인물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900년 음력 10월 20일 한성부 중서 수진방 수진궁계 용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서 아버지 진사 이문하(李文夏, 1872. 9. 10. ~ ?)와 어머니 연안 이씨(1869. 2. ~ ?)[7]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천연동(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48-1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1934년에는 만주국 흥안북분성(興安北分省) 하이라얼(海拉爾)[8]거주했고 1967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9] 366-16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세종대왕의 5번째 아들인 광평대군[10]의 17대손이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20대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5대조 이창중(李昌中, 1728. 8. 5. ~ 1781. 3. 17.)은 1756년(영조 32) 식년 진사시에 3등 31위로 입격하고 안성군수(安城郡守, 종4품)에까지 올랐고 증조부 이목연(李穆淵, 1785. 2. 28. ~ 1854. 12. 9.)은 1821년(순조 21) 정시(廷試)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고 호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조부 이인천(李寅天, 1845. 12. 14. ~ 1876. 9. 6.)은 효력부위(効力副尉) 행(行) 용양위 부사맹(龍驤衛副司猛, 종8품)을 역임한 무관 출신이고, 아버지 이문하는 1891년(고종 28) 증광 진사시에 2등 2위로 입격하고 농상공부 주사(農商工部主事), 농상공부 본청 상공국 상무과 기사(技師) 등으로 근무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1911년부터 1919년까지 강원도 이천군수,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양양군수,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추원 조사과 촉탁 등을 역임하고[11]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과 쇼와 덴노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받아 친일인명사전 관료 부문에 수록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어릴 때 친모를 여의고 8살 때 계모 김해 김씨를 맞이하여 그 슬하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지만 개구쟁이였는데 일본 헌병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에게 돌을 던지거나 새총을 쏘기도 하는 악취미가 있었다. 하루는 말이 놀라 요동치는 바람에 일본 헌병들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일제는 그의 아버지를 소환해 벌금을 물리기도 했지만 일본 헌병들을 대상으로 한 장난이었는지라 부친은 이범석을 별로 꾸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고도 그는 통 장난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번은 을 맨손으로 잡아다가 외양간에 가서 들의 항문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소들이 놀라 경기를 일으키다가 하나 둘씩 푹푹 쓰러져 그대로 죽었고 아버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그에게 도끼를 던졌다.[12] 그러나 새어머니 김해 김씨는 어린 아이가 그 정도 장난도 칠 수 있지 않느냐며 그를 편들어 감싸 줬고 덤으로 아버지가 던진 도끼를 몸으로 막기까지 한다.

이후 그가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고 집안은 일본 경찰 감시 하에 놓였지만 새어머니는 그가 노숙자 생활을 하며 끼니를 거르지 않나 염려하면서 그를 찾아 멀리 만주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작 자신이 낳은 친자녀들은 본국에서 일본 감시하에 놓이게 됨에도 새어머니의 지극 정성에 감복하여 그는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에게 더욱 각별해졌다.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집안 머슴 출신의 대한제국 군인 정태규(丁太圭)가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 해산에 저항하다가 죽는 것을 보고 항일투쟁을 할 것을 결심했다. 1910년 사립 경성장훈학교에 입학했다가 1911년 아버지가 강원도 이천군수로 발령받자 이천공립보통학교[A]전학을 갔고 1913년에 졸업했다.

2.2. 독립운동

파일:임정시절이범석.jpg
한국광복군 시절의 이범석 장군[14]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3학년이었던 1915년에 우연히 한강에서 수영을 하던 여운형[15]을 만나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상하이에는 그의 매형인 신석우가 살고 있었고 그는 신석우가 함께 살던 신규식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때 신규식이 중국동맹회 회원으로 쑨원 등과 인연이 있었기에 이범석은 쑨원의 소개[16]로 1917년 운남 육군강무학교[17]기병과를 들어가 191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18]

1919년 5월 3.1 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상하이로 돌아갔지만 상하이에서는 무장 투쟁이 여의치 않아 만주로 이주했다.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유하현(柳河縣) 제3구(第三區) 고산자가(孤山子街) 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大肚子)[19]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고 1920년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자리를 옮겨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이 되었다. 그해 10월 발발한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했는데 사실상 거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며 용감히 싸웠다.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이범석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냐며 노고를 칭찬하는 친필 서신을 매년 보냈으며 만년필, 종이, 호랑이 가죽 피복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는 감격을 받았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에 밀려 연해주 이만(달네레첸스크)으로 넘어가 다른 독립군과 합류했다. 1921년 초 무장 해제를 요구받자 김좌진과 서일 등 북로군정서의 일부는 만주로 돌아갔는데 그는 김좌진보다 앞서 만주로 돌아갔다고 회고했지만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 이만을 왔다갔다하면서 독립군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1923년 러시아에서 김규식의 고려혁명군(대한독립군단) 기병 대장을 맡았다고 회고했는데 동아일보의 1922년 11월 기록에 이미 시베리아에서 이범석이 김규식의 기병 대장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23년 11월 연해주에서 백군이 축출되자 러시아 공산주의 세력은 고려혁명군을 무장 해제시키려고 했고 반발한 김규식 등은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도 아마 같이 중국으로 돌아간 듯하다. 그러나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소련 합동 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만주에서 김좌진, 김규식 등과 활동했고 1925년 김좌진이 주도한 신민부에 참여했다. 이 무렵 연인인 올레리야가 자살했고 김마리아와 결혼했다. 1927년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내분을 겪자 그는 신민부를 이탈했다. 1928년 고려혁명군(결사단)을 조직해 무장 활동에 나섰지만 주요 동지들이 체포되고 장쉐량의 탄압이 강해지자 중앙아시아로 도피했다. 만주 사변 즈음에 쑤빙원의 부름으로 중국으로 돌아왔다가 마잔산의 작전 참모와 중국 동북 항일군 작전과장(중국군 소장)이 되었다. 1932년 마잔산이 일본군에 밀려 소련으로 도주했을 때 그도 같이 포로처럼 수용되었지만 중국과 소련의 국교 회복 후 주소련 중국 대사 옌후이칭의 중재로 협상을 거쳐 풀려났다. 1933년 4월 석방된 그는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지시로 동북(東北) 장령(將領) 유럽 군사 시찰단이 되었는데 독일에 갔을 때가 때마침 아돌프 히틀러 정권이 출범한 시기였다.
이범석이 파시즘 지지자였음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몇가지 있다. 그가 창립한 조선민족청년단이 히틀러 유겐트를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고, ‘민족 지상, 국가 지상’이라는 구호와 혈통 중시의 민족론 등에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 ‘민주주의니 무엇이니 하지만, 나치스 같은 정치체제가 아니면 안된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범석의 민족주의가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인종주의적임을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보다는 나치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반면 유가의 민본사상에 머물렀다고 보기도 하고, 히틀러를 수용한 이유는 파시즘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요소 때문이라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물론 이 경우 파시즘과 민족주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엄밀하게 전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범석이 직접적으로 파시즘이나 나치즘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장제스가 운영한 중앙훈련단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1930년대 중국에서 민주주의는 혼란과 비능률을 조장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체제로 국가의 통제를 통한 경제 발달을 이루자는 주장이 부각되었고, 장제스의 남의사(藍衣社)는 ‘중국의 파시스트’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장제스의 파시즘 노선과 일본의 그것 사이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실제 1947년 이범석이 쓴 글들 속에 파시즘적 요소가 있는지 찾아보자. 이범석에게 혈통의 공통성은 민족 형성의 기본 조건이자 본질적 성격이다. 우리 민족은 자랑스러운 전형적인 단일민족이다. 혈통이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민족의식 형성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민족적 정서와 동포적 정애가, 강한 민족의식을 양성케 해준다. 민족의식만 있으면 민족은 멸망하지 않으며, 민족 역사의 진퇴는 민족의식 강약에 정비례한다. 즉, 역사는 민족과 민족의 투쟁을 통해서 발전한다. 이범석은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세계의 모든 현상에 대해 판단한다. 일본은 야마토[大和] 민족이라고 떠들지만 민족 형성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태로 ‘천손 민족’이니 ‘팔굉일우’니 헛소리를 하고 있다. 반면 히틀러의 순혈운동은 민족적 결속에 심대한 효과가 있었으니 ‘피의 순결’이 얼마나 존귀한지 증명해 준다. 민족의식을 중시한 것은 헤겔과 레닌 모두 마찬가지이며, 개인 간 혹 계급 간 투쟁은 민족 내부의 일로 부차적인 것이다. 한국의 공산운동 역시 민족운동의 변형된 형태로서 충실했다. 민족 내부 사안과 외부 사안 사이에 위계가 정해지다 보니까, 개인이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는 것도 당연해진다. 민족의 역사는 그러한 사례들을 발견하기 위해 필요하다. 단일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동포들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균등하고 차별받지 않는다고 선언된다. 그러나 민권을 내세우는 서구 민주주의는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 병’을 일으킨다. 이범석 스스로 ‘궤변’, ‘봉건사상’ 같다고 말하면서도 동양 전통의 ‘민유방본(民維邦本)’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면서도 현재는 군중의 시대라며 민주주의는 곧 군중주의이고, 군중이 역사 발전의 주체로 등장했으므로 군중(=민족)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안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해방 이후 파시즘적 역사인식의 정립 과정#

그는 나치경제 재건에 감명을 받았고 독일에서 공부하던 한국인 유학생 '명'[20]의 영향으로 나치즘에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프랑스이탈리아 로마를 거쳐 6월에 상하이로 귀국했고 김구의 부름으로 중국 낙양 중앙육군군관학교 교관 및 장교 대장이 되었는데 1936년 시안 사변 이후 양후청 밑에서 기병 연대장을 했고 장제스의 명으로 양후청이 중국을 떠나자 한푸취의 고급 참모가 되었다. 한푸취가 처형된 뒤에도 주임 참모로 활동했으며 1939년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훈련위원회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파시즘적인 사상 훈련과 영향을 받았다. 1941년 1월까지 훈련단에서 중대장과 교관 등을 지냈으며 1940년 9월 19일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으로 인선되었지만 한국광복군이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예속되는 형태로 바뀌면서 1942년 3월 참모장은 중국인 인청푸가 되고 이범석은 부참모장 및 참모처장이 된다. 인청푸는 이범석이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자신이 참모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21] 1942년 8월 부참모장 자리를 버리고 제2지대 지대장을 맡았는데 이는 김원봉의 합류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공합작에 반발하는 차원이었다. 미국 OSS와 협작하며 서울 진공 작전을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아래 사진의 아랫줄 가운데가 이범석이다.

파일:im374627g.jpg

2.3. 대한민국 시기

1945년 8월 18일 미군 중국전구 총사령관 고문 자격으로 귀국하려고 했으나 경성 신 비행장에 도착하자 일본군에 의해 입국이 저지되어 다시 상하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46년 6월 개인 자격으로 비로소 귀국한 뒤 그 해 10월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운 청년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22]을 창설해 단장에 취임했다.[23] 이러한 그의 행보는 상대편으로 하여금 그를 조선의 군국주의자, 심지어 '히틀러 추종자'라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고 족청은 '이범석 유켄트'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히틀러가 죽고 나치 독일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24]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초반에는 민족주의 운동 및 나치 연구를 했던 독립운동가도 소수지만 존재했다.

장창국중앙일보에 연재한 육사 졸업생들에 따르면 주중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가 하지 중장에게 통위부장으로 이범석을 추천하였으나 이범석이 광복군 귀국 전에 군대를 창설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독립운동 시절부터 이승만과 친했고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자였기에 1948년 정부수립 당시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윤치영 초대 내무부장관의 후처 이은혜의 인척이기도 했다. 허정자서전에서 그가 윤치영 후처인 이은혜를 '누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여순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해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 정객이 공년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국회 속기록에도 나온다.[25] 얼마 후인 10월 28일 내무부장관 윤치영과 함께 여순사건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2.4. 6.25 전쟁 시기

이름 출신경력 직책 주장
채병덕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총참모장 결전
신성모 파일:영국 해군기.svg영국 해군 국방장관 결전
김홍일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육군사관학교 교장 지연전
유동열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결전
지청천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국회의원 지연전
이범석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국무총리 지연전
김석원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1보병사단장 지연전
이종찬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결전

1950년 여름 6.25 전쟁이 터졌고 한강 인도교 폭파를 건의했다.[26] 사실 한강 인도교 폭파는 조선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언젠가는 꼭 해야만 할 일이었다. 6월 27일 국방부에서 열린 군사원로회의에서 김홍일 장군의 한강선 지연전을 지지했던 3인 중 1명이 그였다. 오히려 그가 일찍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6.25 전쟁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후방 3개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1사단 병력을 한강선으로 집결시켜 지연전을 했다면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지금의 6.25 전쟁 초기 서부전선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헌데 군사 경험이 전무한 신성모가 타이밍도 제대로 안 재고 한강철교를 너무 빨리 폭파시켜 버린 탓에 국군의 물자 및 장비들이 후퇴를 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이 사태 한정으로는 이범석 대신 신성모가 더 많은 비판을 받는다. 사실 그도 제대로 된 건의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가 한강철교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황당하게도 "퇴로가 막혀야 한강 북쪽의 국군이 더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신성모가 한강철교를 너무 일찍 폭파해 버려서 국군을 궤멸시킨 것은 이범석의 건의를 충실하게 따른 셈이 되는 것이다. 창동전투는 배수진과 비슷하였고 이른 폭파로 배수진 따위는 영영 꿈도 꿀 수 없게 되면서 국군은 철교를 전격 우회하였다.

1950년 12월 6일 제2대 주중화민국 특명전권대사임명되었다.

이범석은 이승만에 대한 열성분자였으며 장택상, 이기붕과 각각 충성 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27] 부산에서 장택상과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이승만이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려고 했던 이른바 발췌 개헌에도 관여했다. 그는 자신이 부산 파동을 일으켜야만 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내가 부산에서의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매사가 전부 돈이고 국회의 공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통령 임기가 차들어가니 정치적으로 움직임이 있었다. 여기에다 출처 모르는 돈이 들어온다, 생겼다, 어쨎다, 별소리를 다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백척간두에 선 이 나라를 살리는 문제였다.

⋯ 이 국가가 어떻게 된다는걸 염두에 두지않고 정치적 현실에만 급급하고 중시하여 정권을 미리 생각하고 그 야단들인 것이다.[28]

하지만 이승만 주변에서 강경파들을 떼어놓으려고 했던 미국이 당시 주한미국대사 무초를 통해 이승만과 이범석 사이를 이간질했다. 무초는 보고서에 "이승만의 마음 속에 이범석 집단이 이승만 자신과 한국 그리고 유엔에 대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심어놓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여러 사람들이 이승만과 이범석을 격리시키기 위해 막후에서 노력한 일들이 목적에 달성되었다고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최근 나와의 면담에서 이범석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점이나 국무회의에서도 이범석이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캠페인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썼다.[29]

1951년 8월 31일 대만에서 귀국하기 직전 이승만은 이범석의 부인 김마리아에게 사람을 보내 정당을 창당해야 되겠다는 의사를 알려 왔다. 그는 자유당을 창당하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은 민주, 공화당만 봐도 알겠지만 어디 군소정당이 정당 구실을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자유중국도 마찬가지다. 국민당 독재라지만 국민당 이외의 정당이 4~5개가 있으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굵은 자유당이 생기면 최소한 정권의 지속을 싫어하는 반대 세력이 뭉쳐져 큰 정당이 생기고 한 수레에 두 개의 바퀴처럼 한 새의 양 날개 같이 균형이 맞게 움직일 것이다.

⋯ 왜냐하면 항쟁 과정에 전쟁을 겪으니 전쟁 후에 헌법의 불완전한 점을 우리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평온 무사할 때, 더군다나 정당 정치가 질서가 잡히며 상당히 긴 역사를 지나 정치도의가 제 구실을 다한 다음, 자율 자각으로서 된 다음의 이야기지 간접 선거처럼 민중의 본 뜻이 아니고 위험한 것은 없다. 정당 내의 썩은 자들이 그룹을 지어 묘안을 세우기 위해 물질적으로 허수아비를 세워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당시 부산의 정치 움직임이었다.[30]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조선민족청년단대한청년단에 흡수시켜야 하니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범석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승만은 이에 맞서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 지도자 이범석을 떨어뜨린 뒤 이승만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던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은 이범석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이범석은 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비밀리에 자유당 당원들에게 이범석 대신 함태영을 지지하라고 했고 미리 손을 써 두었다. 결국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했고 장택상이 배후 공작을 벌인 걸 확인해 이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경찰이 관여했다며 장택상을 고소하였지만 무죄 판결 이후 족청계 인물들과 정변을 모의했으나 하필 소문이 유포되어 실패했다. 장택상은 일제강점기경기도지사를 지냈던 일본인부산광역시에 밀입국하자[31] 그의 신원을 보증해 주고 따로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사실을 조선민족청년단 부하들을 통해 입수한 이범석은 장택상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국무총리직에서 해임시켰지만 이 일로 이범석의 측근 양우정 등이 희생되었다.

1952년에는 자유당 원외 부당수에 취임하고 그해 5월 24일부터 7월 22일까지 제8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2.5. 6.25 전쟁 이후

1960년 4.19 혁명 후에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충청남도 참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에 국민의당을 창당해 이듬해인 1962년 최고위원이 되었다. 이후 생존해 있는 인물로서 1963년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훈받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11월 7일 후보를 사퇴했고, 12월 16일에는 탈당했다. 1967년에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 회담을 성사시켜 통합 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으며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70년 2월 1일에 부인 김마리아가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2년 후인 1972년 5월 10일 오전, 이범석 본인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대방동 366-7번지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가톨릭대학교 명동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입원 치료를 받다가 이튿날인 5월 11일 새벽 5시 40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장례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그의 유해는 1972년 5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타 독립운동가들와의 관계

그는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송호성 등 기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들과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창군기 시절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송호성은 한독당 계열에 가까웠지만 이범석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이범석은 이미 광복군 시절에도 총사령관 지청천과 사이가 좋지 않아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보직을 바꿨고 광복 이후에는 김구보다는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32] 실례로 송호성이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이던 1947년 12월 생도 분열식 중 이범석이 연설 직전 사관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송호[33]는 단을 내리라(연단에서 내려가라)!"고 할 정도였다.

이재현의 광복군 제2지대사에 따르면 나월환 암살 사건 직후 이범석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범석은 암살 사건의 배후에 송호성이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나월환 암살 사건 직후 광복군 제5지대 대원들이 2지대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당시 2지대장이던 송호성이 광복군 장악을 위해 광복군 부하인 배아민을 시켜 이범석을 암살하고자 했다고 추측했다. 이 사건 이후 이범석은 제2지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재현, 김동수 등 나월환 암살 사건 연루자들은 중국 감옥에서 전격 석방되었다고 한다.

광복 후 군정청장 하지는 웨드마이어의 추천으로 이범석을 통위부장에 임명하려고 하였지만 이범석은 통위부장을 거절한 후 유동열 통위부장 휘하의 국방경비대에 참가하지 않고 족청 활동에만 전념했다. 당시 최갑석의 증언에 따르면 송호성이 훈시를 통해서 "족청이 국군이 되고 국방경비대를 대체했다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생각해봐도 맞지 않다. 이미 다른 단체가 국군을 대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수시로 언급한 데서부터 틀렸다."고 증언했다. 최갑석은 이에 대해 국방경비대의 사기를 위해서 언급했다고 보지만 송호성과 이범석 간의 좋지 않은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이범석과 족청을 겨냥해 일부러 돌려서 언급한 것으로 추측된다.

예비역 공군 장군인 최규순의 증언에 따르면 이범석은 후일 국방부차관과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최용덕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범석의 입각 당시 최용덕이 이범석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국방부차관이 되는 걸 주저하자 김정렬이 공군 창설을 위해서 국방부차관이 되어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겨우 승낙했다고 한다. 중화민국 북양정부 당시 중국군은 군벌에 따라 황포군관학교, 운남강무당, 보정군관학교, 귀주군관학교[34] 등의 군관학교를 별도로 두었는데 송호성과 최용덕은 북양정부에서 운영하던 보정군관학교 출신이고 이범석은 운남 지역 군벌이 운영하던 운남강무당 출신이었다.[35] 모두 독립운동가이기는 하였지만 이들은 출신 군관학교와 모시던 군벌이 서로 달랐으며 독립운동 및 광복군 운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입장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 유동열이 통위부장을 맡고 박시창, 채원개, 고시복, 박승헌, 최덕신, 박기성 등 일부 광복군 출신들이 육사 2기 및 3기로 입대하였지만 이범석을 비롯한 대다수의 광복군 출신들은 국방경비대에 참여하지 않고 족청에서 활동하다가 이범석의 국방장관 입각 후 육사 특 7기 및 8기로 합류하였다.

4. 관련 문헌

5. 저서

6. 노래

(1절)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한 왜적놈들을
삼천리 강산에 열혈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후렴)맹세코 싸우고 또 싸우리니
성결한 전사를 하게 하소서

(2절)백두산 찬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위에 은월이 밝아
고국에 전해오는 피비린 냄새
분하고 원통하다 우리 동족들

(3절)물어보자 동포들아 내 죄뿐이냐
네 죄도 있을지니 함께 싸우자
하나님 저희들은 굽히지 않고
천만대 후손의 자유를 위해

7. 기타

의장, 부의장 및 국회의원여러분.
상제(上帝)는 정의를 보우하심으로써
우리 민족의 40년 동안 최고 지상의 염원이던 민족자유와
국가독립을 성스로운 선열지사의 부단한
분투노력과 전 세계 평화와 정의를 애호하는 국가의
지지 협조하에 이제 국회를 산생(産生)하였으며,
이 국회에서 고명탁절(高明卓絶)하신 대통령 부통령을 추대하였고,
국회에서 만민의 지침으로 제정한 법률에
의하여 정부가 수립되는 것은 오직 감격무지하여 마지않습니다.
오늘 천학 비재한 이 사람이 대통령의 간곡하신임명과 국회의원
제위의 엄정하신 승인으로 국무총리의 중책을 외람히 지게 되어
이 사람으로서는 과분의 영광을 느끼는 동시 그 책임의 중대와
전도에 가로놓인 거대한 임무를 생각할 제
일개 군인으로서 평생을 지나온 나로서는 부담이
너무 크고 어려운 것을 심심히 느끼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정세의 긴박한 수요에서 나의 엄연한 지령인 것을
알고 오직 대통령 부통령의 의지를 승승(乘承)하여 국회, 즉 우리 민족 전체의 협조를 얻어 이 중임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국외 국내에 허다함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권의 완전한 회복, 거족적 단결의 구현, 생산 없는 산업, 혼란과 경제,
불감침공(不敢侵攻)의 국방, 민족문화의 현양(顯揚),
과학의 발달 등등 지대 무한한 것으로 재인식할 때 오직
민족 전체의 요구와 우리의 자활책에 의거해서
나의 가지고 있는 충성 정력 시간과 생명을 민족과 국가에 바칠 뿐입니다.
이로서 총리에 취임하는 인사를 삼으랴 하며 여러분의 두터운 협력과 지교(指敎)를 바랍니다.

초대 국무총리 취임사
1947년 5월말, 미국 신문 기자단은, 서울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옛 성곽 도시 수원에 있는 대한 청년단의 훈련 학교를 우연히 찾아갔다.

이 운동의 지휘자는 이범석이었는데 그는 일제 시대 김구의 광복군 참모장이었다. 1947년 7월까지 약 7만 명이 수원 훈련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공식 발표에 의하면, 1947년 말까지 10만 명의 훈련생을 배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수원 훈련 학교 교장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히틀러 청년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것을 신문 기자단은 알게되었다.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신문 기자단은 "Sprechen Sie Deutsch?"(독일어 할 줄 아십니까?)라는 인사를 받았다. 그와의 계속된 대화를 통해서 그 조직이 히틀러 유겐트(Jugend)를 본떠서 만들었으며, 조직의 목적은 남조선 국군을 양성하여 '광복군의 영광스런 전통'을 계승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훈련 학교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기관이지만, 김구가 상임 교관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다양한 정치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에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똑같은 사상을 가지고 나간다는 정보도 그는 스스로 제공했다.
리처드 D 로빈슨(한국 미군정의 대민 정보 수집 분야에서 일했고, 이후 제24군단 사령부의 정보과에서 점령기를 다룬 전사 편찬 업무를 맡음.), 미군의 배반, 과학과 사상, 1988년, 215 - 216
오후에 연락원은 우리를 또다른 "신사"인 한국 민족 청년단(족청)의 단장이며 극우 진영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는 이범석 장군에게 데려다주었다. 나는 줄창 그의 이름을 들어왔었고, 몇몇 미국인들은 우리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나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는 미군이 한국 민족 청년아 베당해준 2층 건물에 자리잡은 본부에서 그를 만났다. 이는 좋은 체격의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의 얄팍하고 굽은 코와 빈약한 콧수염이 기묘하게도 호전적인 인상을 풍겼다.

그는 말했다. "오늘날의 한국은 1919년의 독일과 같소.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과 민족적 불화, 경제적 곤궁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요. 청년들의 단결이 민족 해방의 관건이 되오. 지도자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요. 우리는 그들에게 명령에 복종하는 것, 실천적인 능력의 함양과 도덕심의 회복 등을 고육하려 하고 있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점차로 내가 한국의 한 민주주의 조직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히틀러의 저 악명 높은 "지도자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민족, 사명, 규율, 인내 등의 단어들이 우선동일했다.

이범석은 예정된 커리큘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역사학, 윤리(이범석 자신이 강의할 예정이었다.), 정치학 등이었다. "파업 분쇄 방법도 가르칠 거요. 히틀러의 유겐트의 역사도 물론." 그의 핵심 참모 중에는 3년 동안 히틀러 유겐트의 열렬한 멤버가 되었던 사람이 있다.

마크 게인(동북아시아통의 저널리스트. 마크 게인은 1946년 10월 15일에서 1946년 11월 7일까지 한달 남짓 한국에 머물면서 서울, 개성. 옹진, 부산, 동래, 대구 등을 취재함.), 해방과 미군정, 까치출판, 1986년, 118 - 120 (본 부분은 1946년 11월 7일 서울에 갔을 때 일기임. -115쪽)
⋯ 계엄령 선포는 각의에서 논의가 되었다. 내무부 장관이 된지 약 1주일쯤 되었을성 싶고 그때가 금정산 사태의 발생 시기니 상당히 중요했다. 그 당시 야당에선 계엄령을 선포해서 강압적으로 이 대통령을 재선시킬 목적으로 헌법을 뜯어고치려고 금정산에서 쇼를 했다고 말한다. 쇼로 금정산에서 미군을 죽였다고... 나는 참으로 나라위해 일생 피투성이로 싸우던 사람으로선 도무지 상상조차 못하겠다.[40]

8. 대중매체에서

8.1. 대체역사물

일제강점기나 근현대를 배경으로 삼는 대부분의 창작물에서는 파시즘 이력으로 인해 취급이 안 좋다. 원 역사처럼 유능한 한국 독립군 장군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파시스트다 보니 파시즘에 변질된 새까만 대한민국을 만들거나 한국의 히틀러가 되기도 한다. 실제 이범석이 성격이 매우 좋았으며 그의 족청도 폭력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간은 너무한 행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9. 선거 이력

<rowcolor=#c39335>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2 제3대 부통령 선거 대한민국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1,815,692 (25.45%) 낙선 (2위)
1956 제4대 부통령 선거

[[무소속(정치)|
무소속
]]
317,579 (3.67%) 낙선 (3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1부(참의원) 267,391 (26.90%) 당선 (1위) 초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1[53]

[[국민의당(1963년)|
파일:국민의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
후보 사퇴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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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5년 작성된 대한연감 4288 및 1956년 작성된 대한민국건국10년지에는 189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음력 10월 20일. 1900년(경자년) 출생. 독립유공자 공적조사 대한민국헌정회 역대 의원 프로필 등 대부분 음력 생일인 10월 20일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3] 이 마을 경내(現 수송동 80번지)에 명종외아들 순회세자가 살던 용동궁(龍洞宮)이 있었던 것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으며 고종 시기에 민겸호의 소유가 되면서 박동궁(礴洞宮)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용동과 박동이라는 지명은 계속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4] 광평대군파 17대손, 시조 42세손 범○(範○) 항렬.[A] 강원도 이천군 소재.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이천초등학교의 전신 이천공립보통학교와는 다른 학교다.[6] 1967년 상훈법이 개정되면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으로 개칭되었다.[7] 이교재(李喬宰)의 딸이다.[8]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시 하이라얼구(海拉爾區).[9] 1975년 중구에 이관되었다.[10] 족보상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사망하여 자손이 끊어진 무안대군 이방번의 봉사손이다.[11] 그 밖에도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 기수(技手), 1918년 강원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등을 겸임했다.[12] 위의 건과 달리 소를 대상으로 이런 장난을 친 것은 그냥 단순한 장난이라고 넘어갈 수준이 절대로 아니었는데 당시 소값은 엄청났다. 물론 인명과 소값은 직접적으로 비교 수준이 될 수는 없는 만큼 이건 이범석의 아버지가 더 잘못한 것이 맞기는 하지만 매를 들어 훈계할 수도 있는 문제를 아들의 생명이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도끼 던지기를 했으니 이범석 아버지의 성격도 장난이 아니게 불같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A] [14]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은 미국 스미스 & 웨슨 사의 회전식 권총.[15] 당시 여운형은 조선인들의 도항 절차와 수속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16] 당시 운남성 독군 탕지야오가 과거 중국 동맹회 회원이었고 훗날 틀어지지만 당시에는 쑨원과 합작 관계였다.[17] 북한의 초대 민족보위성장(한국의 국방장관에 해당되는 직책)인 최용건과 동문이다. 베트남보응우옌잡, 중국 인민해방군주더 원수와 예젠잉 원수(국방장관)도 여기 출신이다. 4개국의 국방 장관을 배출한 학교인 셈이다.[18] 그러나 이범석이 입학한 운남 육군강무학교 12기의 교육 과정은 30개월이었고 이범석과 같은 육군강무학교 12기생인 예젠잉은 1919년 12월에 졸업했는데 이범석은 1919년 봄에 졸업했기 때문에 이상한 점이 있다. 이범석이 회고 과정에서 혼동했을 수도 있고 쑨원과 탕지야오가 1918년에 관계가 틀어진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운남 강무당 교장(탕지야오)이 한국인 학생들은 독립군에 참여시키기 위해 조기 졸업시켰다.[19]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구산쯔진(孤山子鎭) 다두쯔촌(大肚子村).[20] 후지이 다케시는 강세형으로 추정했다.[21] 예를 들어 중화민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가 삼민주의 교육을 강요하자 이범석은 삼민주의를 강요하는 것은 다시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것이라며 항의했다.[22] 일명 족청.[23] 극우 단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단명한 단체여서 정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고 족청단원 출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범석은 족청을 꾸려나갈 때는 그렇게 이념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름 전직 좌익 출신 청년들도 족청에 대거 가입했다고... 실질적 해체는 1949년 이승만의 청년 단체 통합 명령으로 이루어졌다.[24] 이범석은 한국에서 나치를 연구한 몇 안 되는 인물인데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에서 나치를 연구한 인물로 이범석과 안호상을 지목했으며 춘원 이광수도 히틀러를 연구했다고 한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은 나치즘에 영향을 받아 '강력한 지도자 밑에 모두가 단결하자'는 일민주의를 제창했는데 그도 이범석처럼 나치의 패망 소식을 듣고 슬퍼했고 자발적인 학생회를 해산하고 학도 호국단을 만들어서 학교를 군대식 체계로 조직했으며 박정희 정권에서도 승승장구해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었다.[25] 훗날 실리 문서에 의하면 김구와 백의사염동진은 극우 반대파, 제4연대장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고 한다. 실리 보고서 제4연대장은 최남근으로 여순사건의 주모자 중 1명이었다.[26] 백사 이윤영의 회고록에 나온다.[27]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자는 이기붕이다.[28] 이범석,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둥불 후편》, 1991, 외길사, p. 300[29] 김일영, '전쟁과 정치',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 출판부[30] 이범석,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둥불 후편》, 1991, 외길사, p. 304-305[31]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선원을 제외한 일본인들의 입국이 금지되어 있었다.[32] 하지만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바뀐 데는 나월환 암살 사건의 영향이 컸다는 견해도 있다.[33] 송호성의 별칭.[34] 김홍일이 귀주군관학교 출신이다.[35] 운남강무당 출신 독립운동가들로 이준식, 김관오 등이 있다.[36] 파시즘 지도자들 중에는 사회주의 정당 출신(대표적으로 베니토 무솔리니)이나 좌파 성향을 갖고 있다가 극우로 전향한 인물이 많다. 파시스트가 서구식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에 맞서서 사회공동체의 혁명을 추구할 때 공산주의식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 대신 민족혁명을 내세우기 때문에 자유주의자에겐 파시즘이 공산주의와 비슷해 보일 수 있다. 리버럴에서 리버테리안 사이에 위치한 지식인인 장준하가 보기에는 못마땅했던 듯하다. 한편 장준하는 이범석과 족청에서 함께 일하다가 이범석의 좌익들을 끌어들이려는 행보가 마음에 안 들어 족청을 조용히 떠난 적이 있지만 사상에 대한 회의감과는 별개로 장준하는 사망 직전인 1975년 여름 몇 년 전 별세한 이범석의 묘지를 방문하는 등 이범석을 여전히 독립군 시절 상관으로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37] 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지도 교수 : 서중석, 학위 논문(박사)--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사학과 2010년 8월[38] 샤를 드골도 정도는 덜했지만 만만치 않은 권위주의적 지도자였다. 드골주의에서 신대통령제라는 단어까지 나왔다.[39] 당시에는 경찰에 기마대가 존재했고 국군에서도 장철부 소령이 6.25 전쟁 당시 마지막 기병대를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40] 이범석,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둥불 후편》, 1991, 외길사, p. 315-316[41] 이는 비단 박정희에만 국한된 일도 아니었다. 광복군, 독립운동가 출신의 군인들은 광복 후 자주 국방 및 치안 수립을 우선 선결 과제로 보았기 때문에 일본군 및 만주군 세력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신생 조국의 창군에 동참하여 속죄하라"는 명분으로 끌어들이려 노력을 했다. 일본군 출신 김석원, 이종찬은 "나는 나라와 민족에 큰 죄를 지었으니 더 이상 나서면 안 된다"라며 해방 후 군 창설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으나 앞으로 속죄하면 된다는 설득으로 합류했으며,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이 해병대 창설을 위해 만주군 출신의 신현준을 데려오고 마찬가지로 공군의 아버지인 광복군 출신 최용덕 장군이 김정렬 등의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들과 협력한 것도 바로 그 일환이다. 박정희 본인도 해방 1달 뒤 광복군에 들어가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때까지 활동했기에 자연스럽게 광복군 내에 인맥이 생겼다.[42] 정작 제3공화국 당시 이범석은 야당 인사로 활동했다. 그나마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위촉되었으나 이조차도 명예직이었고 강원룡 등 친여계가 아닌 인사들도 포함되었다.[43] 광복군 출신인 황의선은 광복군 출신이라서 받은 차별 대우는 딱히 없었지만 육사 특 7기와 8기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고 증언하였는데 특 7기&8기에 족청, 대동청년단 등 청년단체 출신들이 다수 참여했기 때문에 족청 파벌에 대한 경계심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44] 이들 대부분은 조지원이 숙청한 친일파나 조지원에게 저항하다 죽은 정치범의 자식들이다. 이중에는 최남선도 있고 작중에는 고아라서 그런지 조남선이라고 불린다.[45] 정작 조지원은 이들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모두 숙청하거나 사회로 복귀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46]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47] 대체 역사가 주요 소재인 게임이며 게임의 핵심 기능이 당시 대표적인 정치 사상(민주, 공산, 파시, 3세력(비동맹))을 기반으로 국가의 방향성을 잡는것 이다 보니 파시즘쪽 주요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48] 나치가 선전해 프랑스, 소련등이 무너졌지만 일본은 오히려 현실보다 더 작살났고 파시즘의 나치 독일과 미국, 중화민국 등으로 구성된 자유세계가 냉전을 벌이는 세계관[49] 경술국치 없이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된 세계관[50] 정조의 장수를 시작으로 조선이 근대화에 성공한 세계관[51] 한국이 일본을 대신해 제국주의 국가가 된 세계관[52]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제국주의국가이다.[53] 대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