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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12:57:33

무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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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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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태조의 왕자
무안대군 | 撫安大君
파일:무안대군묘.jpg
무안대군묘 전경
출생 1381년
고려 개경 신덕왕후 사저
(現 경기도 개성시)
사망 1398년 10월 14일 (향년 18세)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재위기간 조선 무안군
1392년 8월 25일 ~ 1398년 10월 14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방번(芳蕃)
부모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신덕고황후
형제자매 부황 기준 8남 5녀 중 7남
모후 기준 2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2명 [ 펼치기 · 접기 ]
정부인 삼한국대부인 개성 왕씨
(三韓國大夫人 開城 王氏)
측부인 원주 변씨
(原州 邉氏)
자녀
양자 1남 [ 펼치기 · 접기 ]
봉사손 -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 ~ 1445)
치호(峙皓)
봉호 무안군(撫安君)
무안대군(撫安大君)
시호 공순군(恭順君) → 장혜공(章惠公)
}}}}}}}}}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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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초기의 왕족. 성은 이(李), 이름은 방번(芳蕃), 시호는 장혜(章惠)이다. 태조 이성계의 7남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2. 생애

고려에서는 어린 나이에 고공좌랑이 되었고 공양왕의 조카딸로서 공양왕의 동생인 귀의군 왕우의 딸 경녕옹주 왕씨[1]결혼했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전에 우왕요동 공략에 나선 장수의 가족들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면서 포천으로 피신할 때 따라나섰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무안군에 봉해지면서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되었으며 세자로 책봉될 예정이었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의 대신들이 "이방번은 거만하고 경솔해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어렵게 여겨 강씨가 낳은 아들 중에 세자를 세우려 한다면 이방석이 낫다"고 해서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다.

하지만 성격 문제는 어디까지나 핑계고 실제로는 그의 혼인 관계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성격과 행실 문제는 겨우 한살 아래인 동생 이방석이나 이방번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이방번의 부인 삼한국대부인 왕씨는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딸로 다름아닌 공양왕의 조카딸이었다. 이방번을 세자로 삼으면 태조 이성계가 끌어내린 공양왕의 형제가 왕의 장인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니 성품과 상관없이 아예 세자가 될 수조차 없었다.

세자책봉이 이뤄진 개국 직후는 아직 공양왕도 살아있던 시기로 그의 저항으로 이성계의 등극이 선양도, 반정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 이뤄진 탓에 명분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사대부들의 왕씨 경계가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방치봉건적 입장을 취한 태조를 제외한 조선개국세력 대다수가 매의 눈으로 공양왕과 왕우, 유력 왕씨들을 주시하고 있었고 왕우는 왕씨 제거 이후로도 계속 제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왕우의 아들이자 방번의 처남인 왕조와 왕관은 왕우가 죽기 전까지 외가 성인 노씨로 개성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왕씨를 차기 국구로 만든다고하면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2]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을 볼 때 동복동생 이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내준게 이복 형들[3] 못지않게 불만스러웠던 모양. 이복 형들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동복 형이면서 밀린 본인은 오죽했을까.[4] 1393년 좌군절제사가 되었고 1395년 병이 생겨 아버지 이성계가 2차례 문병을 갔다.

1398년 이방원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이방번을 찾아가서 합류하겠느냐고 물었는데 이방번은 시큰둥하게 거절했지만 그 사실을 이성계에게 아뢰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강 건너 불 구경'한 셈이다. 이 부분이 큰 관심을 받지는 못하지만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번은 어느 쪽으로 움직이건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방번이 거느린 군사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과 사위의 봉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다.[5] 이 때 이방번은 매형 이제, 이복형 이방과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었다. 이방과는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 이방과를 대표로 맡긴 것이고 이방번과 이제는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다. 태조 3년 군제 개편으로 이방원이 받아서 거느리고 있던 동북면 가별초까지 인계받는다. 이방번의 하인들 중에는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걸 즐기는 불량한 무리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거느린 사병 규모도 만만찮았다는 뜻이다.[6] 이방원이 일부러 난을 일으키는 가운데 굳이 이방번에게 회유를 했다는 것도 이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이방번의 군사력이 결코 적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이방번 자신이 움직이고자 하면 1차 왕자의 난에 대항을 하든 합류를 하든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방번이 세자 자리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석이 죽으면 자신이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하인들이 말하자 그 말을 믿고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했으며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다고 언급한다.[7]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는 이방원이 "남은 등이 이미 우리 무리를 제거하게 된다면 너도 또한 마침내 면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내가 너를 부른 것인데 너는 어찌 따르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외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되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약속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성계가 "방번은 세자 방석과는 달리 죽지는 않고 귀양만 갈 것"이라 생각해서 내보내 주었으나 방간 등이 도당에서 논의해 방번, 방석 등을 죽이니 이방원이 이숙번에게만 "이거이 부자들이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서 도당에게만 의논하여 나의 동기를 살해했는데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속으로 견디어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보이지 못하니 그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8]라고 했다고 한다. 난에서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이방번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게 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무작정 신뢰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방원 입장에서도 세자의 위치에 어린 이방석을 올렸고 세자 외 다른 왕자들과 종친들을 모해했다는 명분만으로 난을 일으켰다는데 이방번 역시 정도전, 남은 등에게 같이 정치적 견제를 받는 처지였다는 점, 난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는 부분, 세자위와는 별 상관없는 이방번까지 살해했다면 정치적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점, 자신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점에 화가 났을 수도 있다. 혹은 화내는 것이 연기였다고 해도, 굳이 죽여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었으니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살려뒀는데 마침 방간이 대신 죽여줬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 때 이복형 이방원을 따라 난에 합류했으면 후계자 자리는 물건너갔을지라도 비참하게 죽은 남동생 이방석과는 달리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방석에 대한 처분도 같이 화를 냈다는 것이니 이방번이 정사군을 따랐어도 곧이곧대로 살려줄지 믿기는 어렵다.

사후 태종 대에 '공순(恭順)군'의 시호를 받고 어린 나이에 죽었기에 후사가 없어 세종 대에 세종의 5번째 아들 광평대군을 그의 양손자로 입적하여 후사를 잇도록 했다. 다만 광평대군 역시 20세의 나이로 요절.[9] 그러나 이 정도면 동생 이방석보다는 나은데 이방번의 양손자 광평대군의 후손들은 광평대군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만 빼면 이후 무난한 삶을 살아서 이방번의 후사는 문제없이 잘 이어졌으나 이방석의 양손자로 입적된 금성대군은 요절하지는 않았으나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에게 반대하다가 폐서인당하고 유배되어 이방석의 봉사손 지명이 철회되었고 단종을 복위하려다가 세조에게 사형당했다. 이방번은 태종에 의해 숙청되어 왕실에서 제명되었다가 숙종에 의해 이방석과 복권되고 무안대군에 봉해진다.

3. 가족관계

4. 대중매체에서


[1]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3월 29일 기축 2번째기사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의 처(妻) 경녕 옹주(慶寧翁主) 왕씨(王氏)에게 쌀 20석을 내려 주었다."[2] 개성 왕씨와 혼맥으로 엮인 왕자는 이방번만이 아니다. 진안대군 이방우는 서자 이덕근이 역시 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했고, 회안대군 이방간의 맏이 이맹종은 정원부원군 왕균의 딸과 혼인했다.[3]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4] "방번이 세자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싶어서 하인들을 시켜서 궁궐을 정탐하게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5] <조선왕조실록>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나라 홍무(洪武) 31년) 8월 9일(임자)" 기사를 보면 당시 정도전이 주도한 진법 훈련에 태만하게 대했던 절제사들의 명단 가운데 이방번의 이름 역시 끼어 있어 그가 사병 혁파에 반발하던 이복 형들과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심지어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이방번의 하인들 잔당이 복수를 하려다가 이숙번에게 걸려서 진압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11월 26일 무술. 난리를 일으키려다가 적발되어 이방번의 종 박두언이 참형을 당하다.[7] 하지만 그토록 큰 세력을 다스릴 정도의 능력이 있는 무안군이 정말로 순진하게 이 말을 믿었다고 보긴 어렵다. 정사군을 물리쳐도 세자가 이방석이고 정사군이 이기면 세자가 이방과이니 어느 한 쪽에 섰다가 덤터기 쓰는 얻을 거 없는 도박을 피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8] 하지만 이 발언이 태종의 진심일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이거이가 나중에 숙청될 때 정황이 모호한 발언을 문제삼아 고향 근처에 유배시켰는데, 태종이 만약 진짜 이거이가 형제를 죽인 것에 화가 났다면, 그 때의 화까지 꺼내서 문제삼았지 유배에서 그칠리가 없다. 그것도 가장 온건한 형태의 숙청이라는 고향에 유배를 보낸 것을 보면 화를 낸 것이 진심이라고 보기 어렵다. 명목은 유배라고 해도 유배지 근처에 본거지가 있기에 정치 활동 자체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게 되지만, 그간 있던 재산으로 호사를 누리는게 가능했기 때문이다.[9] 그러나 광평대군에게는 갓난아이였던 아들 영순군이 있었고 그를 통해 대를 이어 지금까지 후손이 있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광평대군파 묘역에 무안대군 묘도 같이 있는 것. 여담으로 1900년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를 보면 표제에는 무안대군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파로 입계(入系)하는 경우에는 광평대군으로 언급하고 있다.[10] 공양왕의 아우[11] 또는 경녕옹주(慶寧翁主). 후술하겠지만 공양왕의 동생인 귀의군 왕우의 딸이다. 세종 31년(1449년)까지 생존하다가 사망했다. 세종실록 125권, 세종 31년 7월 19일 정유 1번째기사 "무안군(撫安君)의 부인(夫人) 왕씨(王氏)가 졸(卒)하니, 사재감 정(司宰監正) 신자수(申自守)와 서운 부정(書雲副正) 윤통(尹統)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게 하였다."[12] 무안대군 부인 역을 맡은 박루시아하고는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도 부부 역할을 한 적이 있는데 단종정순왕후로 나왔다. 여기서 그를 죽게 하는 정안대군은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는데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 수양대군을 연기했다.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정태우가 이숙번을 연기하게 되면서 자신이 과거에 연기했던 무안대군을 이번에는 자신이 이방원을 도와 죽이게 거드는 정반대 상황이 됐다.[13] 동생 역을 맡은 양희석보다 2살 어리다.[14] 세자가 그랬듯이 신덕왕후가 중병에 걸리자 정신을 차렸다고 이해할 수 있기는 한데, 세자는 작중에서의 대사로 이런 심경이 묘사되지만 무안대군에게는 이런 것이 없다.[15] 신덕왕후는 이방석의 세자 책봉에 분노를 토하는 이방원에게 “자기의 배에서 나은 아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한다”라고 하며 합리화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친아들이자 맏아들인 이방번마저 버림으로서 권력에 눈이 먼 추악한 본심을 제대로 드러내게 된다.[16] 실록에서도 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은 이방번에게 자기와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고 해당 드라마에서도 이방번에게 궁궐은 위험하니 자신과 함께 가자며 사실상 동참을 제안한다.[17] 다만 별개로 살려두었다면 화근이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조사의의 난으로 이성계가 이방원을 내쫓으려고 했을 때 태상왕으로 물러난 자신이나 상왕이 된 이방과가 도로 복위하는 건 모양새가 썩 좋지 않기 때문인데다, 이성계는 죽은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마음은 여전했고 그녀 소생의 이방석을 죽인 이방원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이방번을 다음 왕으로 올릴 가능성도 충분했다. 애초에 조선 최초의 왕비가 강씨였으니 정통 적장자는 이방번이 되는 셈이다. 건국 군주의 권위도 그렇지만 건국 최초의 왕비가 가진 권위도 만만치 않다. 이걸 명분으로 챙겼으면 조사의의 난 역시 단순한 태조의 불만으로 생긴 군사적 반란 정도가 아니라 명분을 건 내전으로 번졌을지도 모른다. 해당 드라마에서는 후계자를 논의할 때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제쳐놓고 강씨의 적장자 이방번을 먼저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