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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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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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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필주.jpg
출생 1869년 11월 9일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
사망 1942년 4월 21일 (향년 74세)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국적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
본관 공주 이씨(公州 李氏)#
종교 개신교(감리회)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군대 입대와 기독교 입교2.3. 목회 활동과 독립운동2.4. 3.1 운동2.5.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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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필주는 1869년 11월 9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에서 이윤영(李允永)과 모친 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공주(公州)로,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자 태종, 세종 대에 공조,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추증된 이명덕(1373~1444)은 그의 18대조다. 이필주의 조상은 9대조인 승길 대에 이르러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매창리 내포마을[1]에 자리잡았고 5대조 대까지만 해도 대대로 벼슬에 올랐다. 이후 크게 현달한 사람은 없었지만, 이들 공주 이씨들은 예천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승길의 손자 대까지 문집을 발행하는 등 향리에서 사족의 가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필주의 직계는 4대조 이래 대를 잇지 못하여 증조와 조부가 연속하여 양자로 들어와 대를 이을 만큼 손이 귀해졌고, 이필주의 조부의 묘가 실전되는 등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평민 집안으로 전락했다. 결국 이필주의 부친 이윤영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이필주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이미 퇴락했으며 생활 또한 매우 빈곤했다. 그는 태어난 뒤 얼마 안되어 하남촌으로 이사했다. 그는 8살 때부터 한문 글방에 들어가 5년 동안 한문을 공부했지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생업 전선에 뛰어든 이필주는 제사(製絲)일을 배워 가사를 도와야 했다. 그러다가 18세 되던 해 부친이 별세하고 자신도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야 했다. 그는 이때부터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헤어날 수 없는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배운 것도 많지 않은 그는 막노동 일로 근근히 연명해야 했으며, 자포자기한 나머지 주색에 빠지거나 싸움질을 일삼았다. 심지어 절망에 빠진 나머지 자살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 달에 3냥 5~6전씩 수입하는 것을 5~6년간 계속하여 가용을 도아오다가 내가 18세 되던 해 6월에는 부친이 모친과 남녀 네동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시니 천지가 아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나조차 그 무서운 흑사병에 걸려 정신을 잃고 부친의 장례식도 보지 못하고 일혜 동안을 죽은 모양으로 누어 있다가 일혜 되는 날에야 비로소 냉수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 일어나게 되었다. 벌어다 먹이시든 부친이 별세한 후로는 모친과 내가 살림을 하는데 모친은 남의 집 품팔이와 침선을 하시고 나는 제사일을 때때로 하며 또 하등노동을 하여 겨우 그날 그날의 생활을 유지하여 갔다. 이같이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고 고생이 태심하여 나는 때때로 죽고 싶은 생각이 많이 나서 산중이나 물가에 가서 홀로 울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2.2. 군대 입대와 기독교 입교

1890년 봄, 이필주는 친구의 권유로 조선 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는 졸병으로서 매월 받는 월급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어 전라도 전주, 완산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이필주가 속한 관군은 홍계훈이 거느린 장위영병, 증원부대로 온 총제영병, 감영군, 지방에서 선발된 향병 등이 뒤섞인 상태여서 일사불란한 지휘통제가 힘들었다. 게다가 이들은 전주성 공방전에서 농민군이 강하게 버티자 사기가 꺾였고 싸움보다는 민간 약탈에 더 관심을 보였다.

4월 28일부터 5월 3일 완산칠봉 일대에서 진주성의 농민군과의 전투에 참가한 이필주는 골육이 서로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고 내심 괴로워했지만, 군대 말고는 먹고 살 길이 없었기에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고, 군규(軍規)를 잘 지키고 기예운동에도 남달리 노력하여 시험 때마다 승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말단 사병에서 하사관 급의 참교로 승진했다. 1897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3월 16일 시위대가 창설되었다. 이필주는 시위대에 가담해 부교(副校)로 승진하면서 하급지휘관이 되었다. 이로서 이필주는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기반을 마련했고 29세 되던 해 김해 김씨 인숙(仁淑) 여사와 결혼하여, 이후 5년여 동안은 군대 생활에 만족하며 자식 남매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02년, 전염병이 창궐하던 중 두 자녀가 병사했다. 이필주는 이 일로 한없는 회의와 좌절을 맛보았다. 그는 훗날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군대에 출근하며 가정생활을 시작한 5년 동안에 자식 남매를 낳고 퍽 재미있게 살다가 1902년에 와서 늦게야 장가를 들어 얻은 남매 자식을 우연히 일조에 잃어버리고 생각하기를 "이제 필연 나의 죄갑인가 보다"하며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섭섭하기 짝이 없고 심란함을 견딜 수 없이 되어 "예수를 믿으면 무슨 고난을 당하든지 위로를 받고 안심이 된다"는 전도를 듣고 믿기를 작정하였다.

그는 기독교 귀의를 통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로 하고 1902년 봄 상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1년 동안은 별다른 감화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을 사랑한다니 옳은 도(道)"라고 여기고 다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필주는 상동교회의 담임자인 전덕기 전도사와 만났다. 전덕기를 통해 신앙의 힘을 기르던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이후 주색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기도와 세례문답 공부에 힘을 쏟았다. 이윽고 1903년 4월 부활 주일, 그는 W.B. 스크랜튼[2]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1903년 가을 군대를 그만뒀다.

2.3. 목회 활동과 독립운동

군대 생활을 그만두고 기독교에 귀의한 이필주는 1903년 겨울 상동교회에서 교회당 청소일을 맡으면서 스크랜턴과 전덕기로부터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사경회(査經會)에 빠짐없이 출석하며 신앙 생활에 열의를 다했다. 1904년 1월, 그는 속장의 성직을 받았으며, 1904년 봄부터 공옥학교의 체육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또한 1904년 여름엔 권사의 직분을 받았고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한편 목사와 같이 심방도 다니고 속회 회우를 심방하는 등 전도생활을 충실했다.

이 무렵, 상동교회는 초등교육기관인 공옥학교에 이어 중등교육기관을 세우고자 했다. 1904년 10월 15일 상동청년학원이 개교했고 교장에는 이승만, 부교장에는 박승규가 임명되었다. 상동청년학원은 상동청년회에서 청년들을 가르쳐 인재를 배양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상동청년학원에는 기라성같은 교사들이 포진했다. 우선 성경을 필수 과목으로 정해 전덕기가 직접 가르쳤고, 주시경은 국어를 담당하며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했다. 또 장도빈과 최남선 등이 국사를 맡았으며, 남궁억현순이 영어와 영문법을, 조성환이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신체 및 정신 단련을 목표로 하는 체육은 이필주가 가르쳤다. 군인 시절 강건한 체력을 연마했던 그는, 체육 시간에 도수 체조 및 구기운동을 가르치는 한편 군사훈련도 겸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선포되자, 상동교회는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며 구국기도회를 열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구국지사들이 앞다퉈 상동교회로 몰려들었고, 전덕기를 중심으로 김구, 이동녕, 조성환, 이준 등은 상소 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상소운동으로는 기울어진 정국을 바로잡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기 교육에 힘을 쏟아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 이필주는 전도에 힘을 쏟아 1907년 4월 전도사의 직분을 받고 청파동의 기도방을 설립해 저녁마다 전도하여 교회 설립에 주춧돌 역할을 수행했다.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는 등 국운이 갈수록 쇠진해지고 있던 1907년 여름, 상동청년학원은 체육에 한층 더 힘을 쏟았다. 군인 출신인 김창환과 이필주의 지도하에, 학생들은 체조 시간에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북소리에 맞추어 행진하는 등 독립군 양성 교육을 받았다. 1910년, 상동청년학원은 60여 칸의 3층 서양식 교사를 건축하여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 되었다. 또한 이필주는 전덕기 목사의 소개로 YMCA의 체육교사직도 맡았다.

한편, 그는 신민회에 가담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와해되자, 그는 일제의 체포망을 피하고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3년 새로 개척한 왕십리교회의 전도사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왕십리는 서울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가장 약한 구역이었지만, 이필주는 목회 활동을 열심히 해 성도를 대거 늘리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1915년엔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8년에는 정동교회의 담임자로 발령받았다.

2.4. 3.1 운동

이즈음 국제정세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면서 국제사회는 개조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전쟁의 참화로부터 인도와 정의를 부르짖는 인도주의가 부상하며, 핀란드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고 약소국의 독립문제가 크게 일고 있었다. 이때 한국독립운동계에서도 독립선언을 위한 노력이 국내외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중국 상하이를 무대로 활동하던 신한청년당은 이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독립 달성의 절호의 기회로 포착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국내외 민족사회에 알리고 국내외 동포가 호응하는 전민족적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그러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붕어했다. 이후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자 민중들의 반일 감정이 치솟았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인사들은 지금이 바로 독립선언을 할 호기라고 판단하고 3월 1일에 독립선언식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각자 민족대표를 선발하기로 했다. 2월 26일에서 27일, 기독교계 인사들이 이필주의 집에 모여 기독교계 민족대표에 추대할 인물을 선정했다. 이때 이필주는 기독교 감리회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했다. 그가 감리회 대표로 추대된 것은 감리회 교회의 대표격인 정동교회의 담임 목사라는 점과 전덕기 이후 사실상 감리회를 대표하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후에 이필주가 일본 경찰에 신문을 받을 때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2월 24, 25일 경 최성모의 연락을 받고서야 3.1운동의 계획을 알았고, 그때서야 33인의 서명에 찬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전후 상황을 살필 때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는 박희도의 지도 아래 1월 하순부터 추진되던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단의 독립운동 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기독교청년회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던 그의 처지와 또한 정동교회 내 그의 집이 학생단의 회의 장소가 되고 있었던 점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거사가 임박해지자, 이필주의 집은 연일 학생단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때 학생단은 3월 1일 이후에도 연속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 방도를 모색했다. 또한 후에 신채호의 아내가 되는 박자혜가 이무렵 이필주와 연결되어 조선 총독부 부속병원인 조산원에서 간우회 회원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기도 했다. 이로 볼때 이필주는 수동적 참여자가 아니라 만세 시위의 전반에 적극 관여했다고 여겨진다.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마지막 모임을 갖은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탑동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키로 했던 계획을 변경하여 같은 시각 태화관에서 거행키로 했다. 독립선언 식장을 갑자기 음식점으로 바꾼 것은 탑골공원에는 젊은 학생들이 모이게 되어 있어 혹시 불상사가 생겨 행여 큰일을 그르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거사일인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는 길선주, 김병조, 정춘수, 유여대 등 4인을 제외한 29인의 대표자가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가 선언식이 끝난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필주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신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뜻을 당당하게 밝혔다.

이필주는 1920년 10월 30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4일 공덕동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했다.

2.5. 이후의 경력

1922년 9월 장로 목사 안수를 받은 이필주는 정동교회에서 개회된 연회에서 정식으로 감리교 정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 교회에 머물지 않고 주로 전도회, 부흥회 등을 통해 활발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강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기독교 신앙의 전파 외에도 민족의식 고취에도 힘을 쏟았다. 1930년대 초반 그가 재직하던 창천교회에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속회가 있었는데, 이 곳에 속한 학생들은 이필주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고 전해진다.

1934년 65세의 나이로 중부 연회에서 은퇴한 이필주는 수원의 남양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창씨개명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1942년 4월 21일 소천했다. 향년 73세. 1946년에 민족대표로 감옥살이를 함께한 오화영이 참석한 가운데 남양교회 마당에 이필주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고, 1969년에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이갑성이 참여한 가운데 기념비가 다시 세워졌다. 또한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필주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만화리와 함께 공주 이씨 집성촌이다.[2]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