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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3:56:09

이명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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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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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월북, (日):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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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명룡.jpg
출생 1873년 8월 2일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차련관리#[1]
사망 1956년 11월 12일 (향년 84세)
서울특별시 충무로
본관 전주 이씨
묘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통일교육원
춘헌(春軒)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종교 개신교(장로회)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기독교 입교와 신민회 가담2.3. 105인 사건3.1 운동2.4.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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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장로회 목사. 본관은 전주(全州).#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명룡은 1873년 8월 2일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차련관리에서 상인 이창엽(李昌葉)의 육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7살 때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1884년 부친이 사망한 후 12살의 나이로 이웃 신풍리에 사는 김성련과 결혼했다. 하지만 부친의 사망 후 가세가 기울어지자 15세에 이웃 동네에 사는 부잣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5년간 머슴살이를 한후 20세 때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도 생계를 이어나갈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 아버지의 친구이며 같이 장사를 했던 사람을 만나 고민을 나누다가 같이 장사를 하기로 결심, 전답과 집을 처분하고 철산을 떠나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하단동으로 이주했다. 부친의 장사 수완을 물려받은 그는 무명이나 삼베를 헐값에 사들여 이윤을 붙여 판매했다. 거래처는 정주를 비롯해 선천, 구성, 박천에 이르는 등 광범위했다. 사업이 번창해 현금이 많아지자 재산가로 소문이 난 이명룡은 담보를 받고 현찰을 빌려 주는 대금업에도 진출, 막대한 돈을 벌었다.

2.2. 기독교 입교와 신민회 가담

1900년 즈음, 고향 친구인 유상도가 이명룡을 찾아와 철산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알리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권했다. 이명룡은 유상도에게서 받은 쪽복음서인 누가복음을 통독한 뒤 정주읍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이윽고 1902년, 그는 30세의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주일 성수를 반드시 하는 등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동업자가 안식일에 장사를 하지 않는 그에게 불만을 품고 교회를 그만두던가 장사를 그단두던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이명룡은 동업을 못하면 못했지 안식일을 어길 수 없다고 말하며 아버지의 친구인 동업자와 결별하고 다시 가게를 열고 장사를 했다. 그러자 주일에 쉬는 이명룡의 가게에 더 많은 손님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정주에서 포목상으로서 큰 돈을 번 그는 이를 발판삼아 대금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대금업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조선 청년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학교 기성회 조성에 많은 기부를 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1902년 상업회의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신산흥업과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던 1907년 4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정주 일대의 유지인 이명룡은 1908년 3월 이승훈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신민회에 가입했다.

이후 그는 정주읍교회 담임 최성주 목사와 여러 인사들과 더불어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주지방 신민회 지도자로 다양한 활동을 했고 1909년에 서북학회에 가입해 정주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1909년 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 전략을 최고 전략으로 채택하고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2.3. 105인 사건3.1 운동

1911년, 총독부는 안명근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이용해 신민회가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조작해 신민회 회원 및 기독교계 인사 389명을 체포했다.당시 정주지역 신민회 간부였던 이명룡 역시 1911년 10월 자택에서 체포되었고 1912년 4월 5일 경무총감부에서 신문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재판에 기소된 105인의 한 사람으로서 재판을 받았고,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그는 출옥 후 종교 활동을 하며 조용히 지냈고 1917년부터 덕흥교회 장로로 시무했다. 그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지만, 이승훈 등 신민회 동지들과 계속 교류하면서 국내외 정세를 예의 주시했다.

1918년 말, 이명룡은 언론을 통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접했다. 이에 고무된 그는 그해 12월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승훈, 양전백 등과 함께 독립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어 1919년 2월 선천 사경회(査經會) 때 이승훈을 만나 같이 자면서 독립선언 및 동지 규합 문제를 재차 논의했다. 그러던 중 최남선으로부터 급히 상경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2월 12일 상경한 이승훈은 송진우, 최남선, 최린 등을 만나 천도교 측에서 추진하고 있는 독립선언 계획을 들은 뒤 2월 14일 평양에서 길선주 등 장로회 지도자들을 만나 3.1 독립선언 계획을 논의했다.

이승훈은 뒤이어 평북노회가 열리던 선천으로 내려가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명룡,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4인에게 거사 계획을 재차 설명했고, 이명룡을 비롯한 4인은 민족대표로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이명룡은 2월 15일 상경하여 이승훈과 함께 행동했지만, 정작 후의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만난 사람은 오직 이승훈 한 사람 뿐이며, 양전백의 집에서 유여대, 김병조 등과 만난 사실 조차 부인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홀로 있었다면서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사실만 인정했다. 그가 왜 이런 진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위증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곧이어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이날 참석한 민족대표 29명 전원이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이후 이명룡은 취조와 재판을 받았고,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조선 독립의 미래를 낙관하며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혔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그렇다. 일본과 각국이 같이 독립을 승인하여 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 앞으로도 또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답: 나는 일한합병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독립할 생각을 가졌었고 앞으로 또 독립운동을 하고 안하고는 아직은 미래의 일이니까 말할 수 없다.
1919년 3월 14일, 경무총감부 취조기록
문: 독립선언서는 어떠한 취지라고 하던가.
답: 조선은 역사를 가진 나라인고로 일본과 분리하여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문: 그 선언서를 배포하면 인민은 그것을 보고 자극되어 혹은 소요도 하고 혹은 폭동도 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가.
답: 그렇다. 경성에 선언서를 배포하여 일반 인민이 그것을 알고 소동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들의 계획에 이익이 될 줄로 생각하였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 심문 기록

이명룡은 1921년 11월 4일 마포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했다. 이명룡이 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막 감옥에서 나온 동지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없어 곤란해 하자, 손병희가 사재를 털어 1인당 50원씩 여비로 주었다고 한다.

2.4. 이후의 경력

이명룡은 출옥 후 이상재 등이 주도하던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26년 5월에는 정주산업조합 발기 총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1930년에는 정주군 학교평의원이 되었으며,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큰아들 이경화가 설립한 신안학교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사장으로서 그해 3월 25일에 열린 학교 평의회에 참석해 일본인 교사 대신 조선인 교사를 적극 채용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1932년 2월에는 동아일보 정주지국 운영에 참여하면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조만식이 11월 3일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명룡은 조선민주당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었지만, 그해 12월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졌을 때 조만식이 반탁을 결의했다가 소련 군정에 의해 연금되면서 그 역시 가산이 몰수 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이에 그는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47년 4월 25일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이후 서울 홍제동에 기거했지만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조선민주당에서 같이 활동하던 이윤영, 105인 사건 때 같이 옥고를 치른 유동열, 정일형 등 각계의 유지 20여 명이 그를 고급 양식점 미장 그릴로 초청해 위로회를 열어줬다.

이명룡은 월남 후 애국동지원호회 고문, 3·1정신성양회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이준열사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맡았다. 또 김창숙 등과 함께 야당 활동을 하면서 자유댱 정권의 전횡에 맞섰다. 특히 1956년 자유당 정권이 김구, 윤봉길, 이동녕 등 임시정부 선열 7명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운동장을 만들려 하자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이명룡은 월간잡지 <청사(靑史)> 발간을 주도했다. 이 잡지는 청소년과 일반국민들에게 우리 역사를 알기 쉽게 알리기 위해 창간되었으며, 사학자와 유지들로 구성된 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청사>의 회장을 맡았고 1955년 6월에 창간호를 냈으며, '민족정기를 양양하자'는 글을 기고했다.

이렇듯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956년 11월 초 젊은 학생들에게 3.1 정신을 심어주겠다며 서울로 강연을 왔다가 11월 12일 새벽 충무로 자택에서 급성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했다. 향년 84세. 그의 장례는 12월 20일 오전 중앙청 후원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경항신문>은 11월 17일자 기사에서 '이명룡 옹의 생애와 그 교훈'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개재해 그를 "고생을 의무로 알고 영예로 삼은 무명영웅이자 국민의 사표"라고 극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명룡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성동의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