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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수원 백씨[1] |
출생 | 1864년 5월 8일 |
전라도 남원도호부 하번암면 죽림리 (현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 |
사망 | 1940년 2월 24일 (향년 75세) |
별칭 | 속명: 백상규(白相奎) 법호: 용성(龍城, 龍成)[2] 법명: 진종(震鍾)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
종교 | 불교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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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승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하번암면 죽림리(현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백남현(白南賢)과 어머니 손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출가했다. 현재 조계종의 약 60%가 용성의 법맥이며,[3] 그 중 유명 승려로는 성철이나 법륜 등이 있다.3. 3.1 운동
용성은 3.1 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경술국치 이후 나라의 녹을 먹었던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나라를 되찾자고 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리는데 그러다 임철호 한 사람만이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4]
이후 관리들로는 안 되겠다 싶어 종교계로 눈을 돌리는데 불교는 조선왕조의 탄압으로 세가 약했고 그래서 당시 동학의 후신이자 최대 종교조직이었던 천도교의 수장 손병희를 찾아간다. 손병희는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고 또 그 지도자 중 전봉준, 김개남과는 달리 살아 있었기 때문에 찾아간 것. 그러나 아무래도 전과가 있고 자기 휘하의 수많은 신도들이 있어 주저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용성의 은사인 혜월이 예전에 남원의 덕밀암에 있으면서 동학교주 최제우를 숨겨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보답으로 참여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불교의 삼십삼천에서 따온 의미로 33명을 대표로 하기로 하고 불교, 기독교, 천도교 각 11명으로 정한다. 이때 실질적인 행동은 용운을 시켜서 하고 용성은 계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설득하러 다녔다.
그런데 기독교 측이 당시 서로 다른 파로 나뉘져 있었는데, 같이 못 하겠다고 하여 당시 아주 작은 조직이었던 기독교에 불교의 인원을 줄이는 배려를 해 불교 2인(용성, 용운), 기독교 20인(두 파가 10명씩), 천도교 11명씩 33인을 결성하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5]
원래 계획은 선언문 낭독 후 해산이었으나 그렇게 될 경우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부족할 것으로 판단, 여종업원을 시켜 겉옷과 신발을 숨기고 제자 동헌 스님을 시켜 종로 경찰서에 신고를 한다.
4. 3.1 운동 이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을 세웠고 신불교운동을 주창하며 서울에 대각사[6]란 절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선농일치 등을 주장하며 국내와 만주 등에서 과수원, 농장 등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힘썼으며, 60여 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아들뻘 제자인 동헌은 불교정화운동 당시 수장 역할을 하며 왕성히 활동하였고 증손주뻘인 법륜은 정토회 등의 단체를 만들어 활발히 사회참여 중이다.
윤봉길을 불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 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7]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인데, 안타깝게도 백용성의 제자였던 도문의 구술 말고는 이를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 실의 속에 1940년 입적하였다. 입적하기 전 제자 완규에게 유훈 10가지를 남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가야불교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
2. 고구려불교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
3. 백제불교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
4. 신라불교 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어라.
5. 신라고도 성지 남산을 잘 가꾸어라.
6. 신라고도 성지 남산 가운데 고위산 천룡사사지 호국호법도량을 잘 가꾸어라. 그리고 여력을 몰아서 부처님이 탄생하신 서역의 가비라 룸비니원과 부처님이 성도하신 마갈다 보드가야 보리수원과 부처님이 최초에 설법하신 바라나 녹야원과 부처님이 이십여 성상을 주석하셨던 기수급 고독원과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구시나가라 사라쌍수원을 생각하면서 이 불교 오대성지를 잘 가꾸어 부처님 은혜 갚는 마음을 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니라.
7. 20여 종의 번역본 불경과 20여 종의 어록을 100만여 권이 넘도록 발간 유포하라.
8. 100만여 명이 넘도록 삼귀의, 오계를 수계, 설법하되 그 수계제자 등으로 하여금 한 아들이나 한 손자나 내지 한 증손자를 잘 낳아서 잘 길러서 잘 가르쳐서 부처님 전에 바쳐 출가봉공케 하여서 불교중흥, 민족중흥, 종교중흥, 인류중흥 터전을 삼도록 하라.
9. 수행은 비묘엄밀하게 하고, 교화는 중생근기를 따라 하나씩 착실히 현실과 근기를 여의지 말라.
10.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과 참선수행, 염불수행, 간경수행, 주력수행, 불사수행인 불교 5대수행으로 지도하되 잘난 이나 못난 이나 선한 이나 악한 이를 가리지 말고 인연따라 출가한 승려를 만들고 재가한 신도를 삼아 성불인연지어 나아가는 분상이니 많은 부작용이 따르겠지만 찬양과 비방을 함께 수용을 하여 성불인연으로 알고 묘법연화경 제이십 상불경보살품의 상경보살님을 본받아 일체 중생과 성불인연을 지어 나가라.
2. 고구려불교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
3. 백제불교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
4. 신라불교 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어라.
5. 신라고도 성지 남산을 잘 가꾸어라.
6. 신라고도 성지 남산 가운데 고위산 천룡사사지 호국호법도량을 잘 가꾸어라. 그리고 여력을 몰아서 부처님이 탄생하신 서역의 가비라 룸비니원과 부처님이 성도하신 마갈다 보드가야 보리수원과 부처님이 최초에 설법하신 바라나 녹야원과 부처님이 이십여 성상을 주석하셨던 기수급 고독원과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구시나가라 사라쌍수원을 생각하면서 이 불교 오대성지를 잘 가꾸어 부처님 은혜 갚는 마음을 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니라.
7. 20여 종의 번역본 불경과 20여 종의 어록을 100만여 권이 넘도록 발간 유포하라.
8. 100만여 명이 넘도록 삼귀의, 오계를 수계, 설법하되 그 수계제자 등으로 하여금 한 아들이나 한 손자나 내지 한 증손자를 잘 낳아서 잘 길러서 잘 가르쳐서 부처님 전에 바쳐 출가봉공케 하여서 불교중흥, 민족중흥, 종교중흥, 인류중흥 터전을 삼도록 하라.
9. 수행은 비묘엄밀하게 하고, 교화는 중생근기를 따라 하나씩 착실히 현실과 근기를 여의지 말라.
10.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과 참선수행, 염불수행, 간경수행, 주력수행, 불사수행인 불교 5대수행으로 지도하되 잘난 이나 못난 이나 선한 이나 악한 이를 가리지 말고 인연따라 출가한 승려를 만들고 재가한 신도를 삼아 성불인연지어 나아가는 분상이니 많은 부작용이 따르겠지만 찬양과 비방을 함께 수용을 하여 성불인연으로 알고 묘법연화경 제이십 상불경보살품의 상경보살님을 본받아 일체 중생과 성불인연을 지어 나가라.
5. 제자, 법맥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여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지만, 교계 내에서 승려로서의 위상도 상당하다. 조선왕조 500년 간의 강력한 불교 탄압으로 맥이 끊기 다시피한 한국 불교의 불을 다시 지펴내어, 근현대 한국 불교의 뿌리를 이루게 된 승려 중 한 사람.[8]조계종 8대 총림 중 하나인 해인총림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으며, 성철도 용성의 법맥을 잇고 있다.(용성-동산-성철),[9] 직계 법손은 법륜(용성-완규-도문-법륜).
6. 대중매체에서
2023년 영화 만해 한용운 님의침묵에서 그를 모티브로 한 대각사 스님 역으로 김희라가 연기하였다.[1] 29세.[2] 호는 전통적으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부모님이나 스승이 아닌 사람이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짓는 것인데, 동아시아 불교에서도 쓰이고 있다.[3] 동국대학교 김광식 교수의 말.[4] 임철호는 후에 자기 아들을 출가시키는데 그 사람이 직계법맥인 도문이다.[5] 인원 비율은 정확하지 않아, 불교 2명,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6] 일제의 간섭을 회피할 목적으로 불교 계통의 신흥종교인 대각교를 창시했다고 총독부에 등록하고, 대각사는 대각교의 교당, 본인은 대각교의 교주라 칭했다. 하지만,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결국 말년엔 조선불교 조계종 대각사로 고칠 수밖에 없었다.[7] 이에 대한 감사인사로 해방 뒤 귀국한 김구가 대각사를 방문했다고 하는데, 백범 김구 평전에는 김구가 대각사를 방문했다는 내용이 없다. 백범 김구 평전이 빠트렸을 수는 있으나, 하필 이것만 빠트렸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8] 월간해인 - 용성선사와 같은 어른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전통 한국불교 종단인 조계종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고 반문하여 본다.http://haein.or.kr/contents/?pgv=v&cno=278&wno=55[9] "항상 다른 스님은 '선생'으로 부르는 용성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만은 '스님'이라는 칭호를 썼다고. 그 이유는 대단한 학식과 구도에 전념하는 모습이 제자의 제자라지만 존경스러워서".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3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