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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20:48:50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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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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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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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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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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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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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군부 수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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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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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상옥
金相玉 | Kim Sang-ohk
파일:독립운동가 김상옥.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1889년 1월 5일
한성부 동부 건덕방 어의동계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사망 1923년 1월 22일 (향년 34세[1])
경기도 경성부 효제정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5호
본관 김해 김씨
학력 어의동보통학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경성영어학교
종교 유교(성리학)개신교(감리회)
조직 의열단
의거 종로경찰서 의거[2]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단체 사단법인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사업가 김상옥2.2. 독립운동 투신2.3. 거사
3. 기타4. 가족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3]

한국독립운동가. 독립운동단체 한당(韓黨)의 일원이었으며 종로경찰서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들을 사살하여 항일무장투쟁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후 국내외에서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되었으며 거사 당시 쌍권총을 사용하였다는 점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출생과 사업가 김상옥

1889년 1월 5일 한성부 동부 건덕방 어의동계[4]에서 구한말 군관을 지낸 아버지 김귀현(金貴鉉)과 독립유공자인 어머니 김점순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5]를 다녔다.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910년 경성영어학교를 다니면서 국제 정세와 서양 문화에 안목을 넓혔고 1912년 동대문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였으며 1913년 정진주와 혼인하였다. 1917년 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를 위해 말총모자를 창안하고 생산해 보급하였으며 당시 말총모자 판매고로 3만~4만의 수익을 올렸다.[6] 사업 수완이 좋았는지 그가 운영하던 철물점은 이내 직원 50명을 거느린 철공소로 발전했고 김상옥의 철공소는 각종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거점이 되었으며 농기구, 장갑, 양말 등도 생산해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 데 앞장섰다.

2.2. 독립운동 투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 운동 이후부터였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대량 제작해 배포했으며 철공소 직원 50명과 함께 직접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동대문교회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7]를 발간해 독립 사상을 계몽하고 고취하였다. 1919년 12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및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였고 1920년 4월 한훈, 유장렬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서씨 등을 총살하였으며 조성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1920년 5월부터 북로군정서 김동순, 윤익중, 신화수, 서대순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거사 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었고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중국 상하이망명하였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과 독립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2.3. 거사

1921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을 맡게 되었다. 1922년 11월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시영, 이동휘, 조소앙, 김원봉 등과 의논해 조선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 및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는데 1923년 1월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도쿄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안홍한을 수행시켜 권총 4정과 실탄 수백 발,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경성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김상옥은 상하이를 떠나면서 농부 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면서 국경 경찰을 사살하였고,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 세관원을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이후 서울에 와서 김한, 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상하이 주재 일본 제국 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총독 암살 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었다.

1923년 1월 12일 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는데 이 폭발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경성검시국의 오하라 검사가 나서 수사했지만 의거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가 1월 17일 일본 경찰은 의거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는데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다. 종로경찰서 우메다와 이마세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는데 고봉근의 행랑방에 있던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난 것이다.

은신처가 탄로나자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그를 잡으러 온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한 다음에는 이마세와 우메다 경부를 사살하고 다른 일본 경찰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에 추격하는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가옥의 옥상을 뛰어 다니며 도주했다. 일본 경찰은 육군 병력을 지원받아 산을 포위했지만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교묘하게 산을 내려왔다.[8] 1월 18일은 무내미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월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며 동상도 치료하는 등 앞으로의 거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상하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 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실토하면서 은신처가 발각된 것이다. 1월 22일 5시 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곳의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려졌다. 이때 기마대와 무장 경관 400여 명이나 동원되어[9]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왜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김상옥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자 권총으로 무장한 다음 방 안 벽장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는데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 안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자 김상옥은 그를 가장 먼저 총으로 쏘았다. 그 다음 벽장과 붙어 있던 집 벽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하였으나 겁에 질린 76번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로 갔다.[10] 이후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2자루로 무려 3시간 반 동안이나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마저 떨어지자 벽에 기댄 채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1발을 스스로의 머리에 쏘아 자결해 순국하였다. 현장은 현 대학로 36-4번지 일대다.[11]

김상옥은 순국하고 나서까지도 일본군들을 떨게 했는데 두 눈을 뜨고 이를 악문 채 양손에는 권총을 꾹 쥔 채로 사망하여 그의 시신을 본 경관들이 두려워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그의 어머니를 불러다 생사를 확인하게 하였다. 나중에 김상옥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을 때 확인한 결과 몸에는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결에 사용한 두부의 1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이다. 신념은 총알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셈. 수백여 명의 추격을 받으며 3시간 반이나 총격전을 했음에도 피격당한 총알이 10발밖에 안 된다는 것도 대단하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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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이 전투에서 사용한 권총. 실물은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고 증거품으로 찍힌 상단의 사진만 전해진다. 총열이 조금 더 짧고 방아쇠울 형상이 다르다는 점을 빼면 전체적인 실루엣은 S&W M2와 비슷하다. 형태로 보아 은닉이 쉽도록 개조한 모양이다.

4. 가족

5. 대중매체에서

일본 철혈 통치의 상징인 종로경찰서폭탄을 투척하고 수백의 일본 군경에 혼자 맞서 총격전을 벌인 인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중들이 갖는 국내 폭력독립투쟁의 클리셰적 판타지를 실제로 역사에 남긴 위업에도, 2010년대 이전에는 이상하리마만큼 대중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고 대중매체에서도 다뤄지지 않았다. 그나마 인터넷과 대중매체의 발달로 그의 행적이 넷상이나 유튜브 등지에서 다뤄지는 빈도수가 꽤 증가해서 예전보다는 확실히 인지도가 올라갔다. 드라마틱한 생애로 영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영화드라마를 만드는데 적합한 인물이지만 실제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8.15 광복 이후 영화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이후에도 여러차례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히 엎어졌다. 그나마 가장 비슷하고 유명한 것이 아래에 기술된 영화 암살에서 하정우가 분한 남주인공 '하와이 피스톨'이다.


[1] 의거 [age(1923-01-22)]주년[2] 폭탄 투척 후 일본 경찰들과 쌍권총으로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하였다.[3] 상하이를 떠나면서 남긴 김상옥 의사의 말. 사실상의 유언이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효제초등학교에 이 어록의 비문이 세워져 있다.[4]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5]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효제초등학교.[6] 2021년 환율 환산 기준으로 15억이 넘는 금액이다.[7] 뒤에 『독립신문』으로 개제[8] 이때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일화가 있다. 안장사 방향으로 발자국이 향하도록 짚신을 신었다는 이야기.[9] 실제로 경관이 몇 명이나 동원됐는지는 설이 다양하다. 일부에서는 1000여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당시 언론에는 1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0] 이 과정에서 72번지 거주민이었던 이진옥(李鎭玉)이라는 노인이 유탄에 부상을 입었다.[11] 이때의 포위 광경을 당시 17살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목격했다고 한다. 구본웅은 자신이 목격한 김상옥 의사의 저항을 시화집 "허둔기"에 그림로 남겼을 정도로 감격했지만 이후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있다.[12] 당시 언론 보도에서는 폭탄 제조자가 유대인이나 아랍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KBS 다큐 등에 따르면 폭탄의 제조자는 이태준 선생이 소개해 준 헝가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다만 이태준은 이미 1921년 죽었고 사건은 2년 후의 일이므로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13] 기마경찰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에 타고 있던 상대를 맨손으로 제압했다는 것이다. 그저 구전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며 이 때 빼앗은 검이 실제로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14] 그 사격 실력 덕분에 쌍권총으로 일본 경찰 수백 명과 대등히 싸웠다.[15] 비슷한 이야기가 곽낙원 여사에게도 있다. 여사의 생일상을 차리겠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내 먹을 것은 내가 마련할 터이니 돈을 달라"고 한 다음 생일날 모인 사람들 앞에서 권총 2자루를 내놓았다고 한다.[16] 1967년 12월 26일 사망했다.[17] 김춘원의 아들[18] 전주 최씨 최종록(崔鍾祿, 1921. 10. 6 ~ 2013. 12. 6)의 일곱째 아들이다.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을 졸업하고 대우증권 지점장으로 근무했다.[19] 누이의 딸. 이름은 방송에서 등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