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본적은 함경북도 경원이고, 노령(露領) 동부시베리아 우스문에서 출생하여 그곳과 중국 국경에서 성장하였다.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지금은 배움보다 실행할 때라며 동지들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길림에 가서 같은 해 11월에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총독부고관 사살, 주요기관 폭파 등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김원봉과 함께 상해에 가서 폭탄 20여개와 권총, 탄환 약 100발을 구입하였다. 일본 경찰에 잡혀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청진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인 1922년 8월 감방의 동료들과 탈옥을 하려다 실패하여 형이 2년 가산되었다. 1928년 3월 출옥하였다. 이후 고문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몸으로 간호를 받다 1929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성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오른쪽 선 사람부터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앉아있는 사람은 정이소다. 우측 하단에 따로 붙은 사진은 김익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