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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10:00:47

이병희(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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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병희독립운동가.jpg
1936년 3월 19일 촬영된 사진.
출생 1918년 1월 1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봉익동
사망 2012년 8월 2일 (향년 94세)
서울특별시 중앙보훈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본관 진성 이씨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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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경성 종연방적, 영등포방직 등에서 항일노동운동을 하였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을 위한 군자금 모금을 하였다.

그녀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로, 10촌 친척인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독립유공자 이효정(李孝貞)은 그녀의 질녀이다. 이재유의 말년을 증언한 것도 이병희다.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18년 1월 14일 서울의 양반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이경식(李京植)으로, 장진홍(張鎭弘) 의사의 대구 조선은행 폭탄투척의거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바 있다. 큰아버지 이원식 등은 안동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이병희는 중국을 오가며 운동에 투신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일경의 감시 속에 어머니는 말도 잘 못하는 우울증에 걸렸고, 이병희가 옥중에 있을 때 별세하였다. 이병희는 15세에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상업학교(서울여상 전신)에 1년간 다니다 중퇴하였다.[1]

집안 어른들은 이병희에게 “학교를 당장 그만두어라.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직접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권유를 받아들여 위장취업했다.

1933년 5월 서울의 종연방적주식회사(鍾淵紡績株式會社)에 여공으로 취업하였다. 1936년 회사에서 동료 김희성(金熙星), 박인선(朴仁善) 등과 여성동지들을 규합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2]
파일:이병희이효정기사.jpg
이효정과 이병희의 검거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1933.10.19.)
파일:이병희독립운동가2.jpg
1936년 5월 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9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2년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으나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었다. 이후에도 삿뽀로 맥주, 기린 맥주회사, 영등포 방직공장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여 여러번 체포, 고문을 받았다.[3]

같이 노동운동하던 이효정과 같이 각종 고문을 받았지만 입을 열지 않아 이병희와 이효정의 묵비권 행사로 수사가 난항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까지 했다. 자궁에 달군 쇠꼬챙이를 넣는 고문을 받을 때는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이재유의 말년을 목격했다. 그녀는 남자 옥사 앞을 지나가다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수용실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봤다. 그런데 안면이 전혀 없는 그가 눈짓을 하며 “병희야, 나 이재유다”라고 하더란다. “이재유가 왜 그렇게 생겼느냐”고 물으니, 악랄한 고문에 얼굴이 퉁퉁 부었다며 "날 열 번은 죽였다가 살려놨다"고 했다고 한다. 이재유는 동지도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변형될 때까지 잔혹한 고문을 당했단 것. 이병희는 이재유를 평생 안타까워했다.

이병희는 원래 권영태와 김희성 그룹이었는데, 이효정이 이관술의 제자이자 이순금의 친구로 이재유 그룹 핵심과 인연이 깊은 등의 이유로 역시 친척인 이병기와 함께 이재유 그룹으로 옮긴 것이다.

1939년 4월 출소했다. 1940년 부친이 활동하는 베이징에서 이육사를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동지 박시목(朴時穆), 박봉필(朴鳳弼)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 역할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43년 이육사와 같이 9월에 체포되어 베이징 감옥에 함께 구금되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이경식을 쫓아다녔던 일본 순사는 그녀에게 “네가 자라 적이 되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4년 1월 11일 이병희는 “개죽음을 당하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지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결혼을 조건으로 홀로 풀려난다.출처 16일 이육사가 감옥에서 순국하자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품인 「광야」, 「청포도」 등 시 작품을 정리하여 국내의 유족에게 전달하는 중책을 맡아 수행하였다.[4]

27세인 1944년에 토목 기술자 조인찬과 혼인하여 몽고 탄광 등지에서 생활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신의주 시가에서 살다가 남편과 함께 월남하였다.[5]

광복 이후 이병희는 자식에게까지 자신의 독립운동을 숨겼다. 이는 그녀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에 반공이 이념이었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박해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같이 항일운동하던 친척 이병기가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으로 학살당했고 친척 이효정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고문까지 당했으니 이를 목격한 이병희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행적 은폐는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민주화 후 1996년에 국가보훈처는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2012년 사망하였고, 그녀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녀에 관한 시가 있다.
지금은 공부보다 나라 위해 일을 하라
아버지 말씀 따라 일본인 방적공장 들어가서
오백 명 종업원 일깨운 항일투쟁의 길
감옥을 안방처럼 드나들 때
고춧가루 코에 넣고
전기로 지져대어 살 태우던 천형(天刑)의 세월

잡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 죽어라
동지를 팔아먹지 마라 결코 팔아먹지 마라
혼절 속에 들려오던 아버님 말씀 새기던 나날

먼데 불빛처럼 들려오는 첫 닭 우는 소리를
어찌 육사 혼자 들었으랴.
이윤옥, 이육사 시신을 거두며 맹세한 독립의 불꽃 이병희


[1] 출처: 이병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 출처: 이병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3] 출처: 이병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출처: 이병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출처: 이병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