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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5:48:11

가네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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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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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
[ruby(金, ruby=かね)][ruby(子, ruby=こ)] [ruby(文, ruby=ふみ)][ruby(子, ruby=こ)]
파일:가네코 후미코.png
<colbgcolor=#0047a0> 출생 1903년 1월 25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고토부키초
(現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나카구 고토부키초)
사망 1926년 7월 23일 (향년 23세)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 우츠노미야 형무소 도치기 지소
(現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 구로바네 형무소)
묘소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박열의사기념관 경내)
국적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무국적 (아나키스트)
별칭 아명 후미(フミ)
이명 사에키 후미코(佐伯文子), 이와시타 후미코(岩下文子)[1]
한국명 박문자[2]
직업 독립운동가, 사회활동가
학력 충청북도 부강공립심상소학교 졸업
(現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초등학교)
가족 외조부 가네코 도미타로(金子富太郞)
외조모 가네코 요시(金子ヨシ)[3]
아버지 사에키 후미카즈(佐伯文一)
어머니 가네코 도쿠노(金子 トクノ)
배우자 박열
서훈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파일:attachment/박열/park_yeol.jpg
가네코 후미코와 남편 박열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태어날 때부터 나는 불행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하마마쓰에서 나는 언제나 학대를 받았다. 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과거의 모든 것에 감사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도, 외삼촌 이모에게도, 아니 나를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게 하고 가는 곳마다 생활의 모든 범위에서 괴롭힐 만큼 괴롭혀준 나의 전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나 외삼촌 이모 집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컸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경멸하는 그런 사람들의 사상이나 성격이나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나 자신을 찾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덕에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확실히 알았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위 훌륭한 인간만큼 하찮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노리개였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러나 그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
일본아나키스트이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된 일본인 독립유공자[4]이며 박열의 아내다. 한국명은 박열의 성에 후미코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박문자'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치안 경찰법에 근거한 예비 검속으로 남편[5]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다이쇼 덴노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의문사하였다.[6]

2. 생애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에키 후미카즈(佐伯文一)는 히로시마현 아키군의 사족 집안 출신으로 일본 제국 경찰로 근무하면서 야마나시현 히가시야마나시의 소마구치(杣口)에 머물다가 농민의 딸이었던 가네코 도쿠노(金子トクノ)와 결혼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는 등 가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결국 도박에 빠져 경찰 자리에서 파면되는 바람에 후미코는 여러 곳을 전전하는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랐다. 부모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이라 사생아나 다름없었던 후미코는 출생신고도 안 되었으며[7] 소학교에 입학할 수조차 없었다. 때문에 어릴 적부터 호적에 없다는 까닭으로 비국민 취급을 받으면서[8] 큰 상처를 입었는데[9] 이것이 후일 후미코가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 영향을 끼친다.

사실혼 아내와 자식들[10]을 호적에 올려주지 않았고 후미코의 어머니가 사생아로나마 호적에 올리겠다는 것도 체면 상한다며 반대한 데다 학교에 못 가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대신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도 없었고 직장에서 짤린 후 아무 일도 안 하고 술과 노름에만 빠져 지내는 등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던 아버지는 처제(후미코의 이모)와 눈이 맞아 불륜을 저지르다가[11] 가출하였고 어머니도 이런저런 다른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후미코는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목격하고 어머니의 동거남들에게 학대나 절도[12]를 당하는 등 고생했다. 심지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형편에 세간살이를 팔아 생활하다 더 팔 것도 없어지자 집에 남은 '마지막 물건'(본인의 표현이다)이 되어 어머니 손에 사창가유녀로 팔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생각에서 그친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인신매매 업자 앞에 애를 데려다 놓기까지 했으나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마음을 바꾸면서 매춘부 신세는 면했다.
파일:가네코후미코호적등본.jpg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된 가네코 후미코의 호적등본

후미코가 8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새아버지 고바야시 나가요시의 고향 야마나시현 기타쓰루(北都留)로 갔고 이때 이부 여동생이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이 남자와도 곧 헤어졌고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친정 가네코(金子) 가문이 있는 히가시야마나시군 스와촌 오아기 소마구치(같은 군 마키오카, 현 야마나시시)에 가서 자랐다. 어머니는 잡화상 후루야 쇼헤이와 재혼하면서 후미코를 떼어놓고 가는 바람에 결국 어머니에게도 버림받은 후미코는[13] 외삼촌 집에 맡겨져 자랐다. 그리고 9살 때 자식이 없던 고모(생부의 여동생) 사에키 가메가 결혼한 남자, 즉 고모부 이와시타 케이세이치로(岩下 敬三郎)의 집에 입양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로 인해 겨우 호적을 얻기는 했으나 친부모가 아닌 외조부의 5녀로 입적되었다. 하지만 사위의 집에 살던 후미코의 친할머니는 손녀를 조선으로 데려오는 과정에서 거친 환경에서 자라나 말과 행동이 공손하지 못하고 성격도 비뚤어진 데가 있는 후미코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그건 후미코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입양 이야기는 몇 달 만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뭐, 조금 아는 집 아이예요. 아무튼 너무 가난한 집 자식이라서 예의범절도 모르고 말 같은 것도 얼마나 상스러운지 얼굴이 화끈거립니다만 너무 불쌍해서 데려왔지요."
후미코가 듣는 면전에서 후미코를 본 이웃집 여자에게 한 말.
파양된 후 학교 성적표 등 공식 서류에 적힌 이름은 어느새 '이와시타 후미코'에서 '가네코 후미코'로 원상복구되어 버렸고 후미코를 집안의 후계자는커녕 손녀로도 인정하지 않은 할머니는 고모와 함께 후미코를 식모처럼 부려먹으며 학대했다.

고모부와 고모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하다가 사망 사고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 조선에서 지주로 살고 있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후미코를 조카로 인정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모욕을 주거나 정신적으로 학대하였다. 주변에서는 이를 모르지 않았으나 고모네 집이 그 지방 유지였던지라 이웃들도, 다른 친척들도, 학교 교사도 모두 모르는 척할 뿐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미코를 데려갈 당시 약속했던 상급학교까지 보낸다는 이야기 역시 없던 일이 되었으며, 그나마 소학교(초등학교)까지는 졸업시켜 줬으나 이것도 후미코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집 형편이면 수업료가 비싼 것도 아닌데, 애를 데려와 놓고 소학교도 안 보낸다더라' 같은 수군거림을 듣기 싫어서였다. 조선에 와서도 친척들에게 학대를 받던 후미코는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지만, 우연히 간 조선인 동네에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조선인 아이들과 똑같은 아이로 대우받고, 먹을거리를 받는 등의[14] 따뜻한 대접을 받게 된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좋게 볼 리야 없었겠지만, 학대받으며 굶주린 어린아이까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917년 부강공립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후미코는 약 2년간 완전히 식모로 전락해 집안일만 하며 살다가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하여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 올랐다."고 한다.[15] 이렇게 후미코는 조선인의 처지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여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했다.

후미코는 1919년 4월 12일 7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슬슬 후미코도 나이가 차서 시집보낼 곳을 알아봐야 할 때가 되어가는데 그러면 돈이 안 들 수가 없고 자기네 돈 들이기 싫으니까 고향으로 쫓아보내 외갓집으로 떠넘긴 거다. 시집 안 보내고 집안 식모로만 들어앉힌 채 나이먹어 가게 하자니 그건 또 자기 체면이 상하고.(...)[16]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어머니는 그 때까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해 여러 남자들과 결혼했다가 다시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후미코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외가와 짜고 후미코를 돈이 많은 스님인 작은외삼촌[17]과 강제로 혼인시키려고 하였다. 쉽게 말해 돈 때문에 딸을 팔아넘기려고 한 거다. 다만 외삼촌 쪽에서 나중에 후미코에게도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걸 알고 파혼을 선언해서 결국 이뤄지진 않았다.[18] 재산을 노렸던 아버지는 계획이 틀어진 것에 분노해 후미코를 폭행했고, 결국 아버지에게도 실망한 후미코는 학문에 대한 관심이 강해지고 야마나시에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것도 있어서 1920년 4월 도쿄로 상경했다. 부모 양쪽 모두에게서 완전히 독립한 것이다. 도쿄로 상경한 후에는 작은외할아버지 구보타 가메타로의 집에 머물면서 우에노(上野)에서 신문팔이, 가루비누 노점상과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 여러 일을 하면서 고학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일하면서 마사노리(政則) 영어 학교와 겐슈 학관을 다녔다.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사귄 친구의 소개로 사회주의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을 접했고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후미코는 1920년 7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위에 서술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계속 사회주의 책과 잡지를 탐독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접했는데 기독교에는 처음에는 혹했으나 신앙을 가져봤자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에 실망하고 떠났고 사회주의에는 처음에는 관심을 갖고 공부했지만 결국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상처만 받으며 실망했다. 이쪽 계열인 남자들을 2명 정도 만나 짧은 연애도 해 봤지만[19] 결국 지속적인 만남이나 미래를 약속하는 관계로 이어지지 못하고 환멸을 느끼는 등...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한 거부의 자세를 보였다. 공산주의 세상이 되어도 권력자가 교체되는 것일 뿐 민중들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20] 1921년 여름 유학과 기타 이유로 도쿄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원종린, 정우영, 김약수, 정태성 등)과도 교류를 시작하였다. 1921년 11월 후미코는 작은외할아버지 집에서 독립해 유라쿠초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던 이와사키(岩崎) 오뎅집의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낮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녔다.

1922년 2월 후미코는 정우영의 하숙에서 그가 발간준비를 하던 잡지 <청년조선>의 교정쇄에서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 시를 읽었다. 이리도 힘 있는 시가 있으랴.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황홀할 정도였다. 내 가슴의 피가 뛰고 있었다. 어떤 강한 감동이 나의 전 생명을 고양하고 있었다.
(중략)"난 이런 시를 본 적이 없어요.(중략) 어디가가 아니에요. 전체가 좋아요. 좋다는 게 아니라 그냥 힘이 있어요. 나는 지금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을 이 시에서 찾은 듯한 기분이에요."
그리고 그 후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우연히 박열과 마주치고, 그가 바로 박열이라는 걸 알게 된 뒤 정우영에게 소개를 부탁한다.
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그 사람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저토록 그를 힘차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중략)-그렇다, 내가 찾고 있던 것, 내가 하고자 하는 일, 그것은 확실히 그의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할 일을 갖고 있다.
알 수 없는 환희가 내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흥분하여 나는 그날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 달여가 지난 3월이 되어서야 박열은 오뎅집으로 후미코를 찾아왔다. 박열과 교제하기 시작한 후미코는[21] 그의 사상에 공명하여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5월부터 동거를 시작했으며[22] 동거남 박열을 따라 박열이 조직한 사회주의자 모임인 '흑도회(黑濤會)'[23]에 가입했다. 그리고 7월 10일 박열과 함께 흑도회 기관지 <흑도>를 창간했고 한 달 뒤 2호를 냈다. 그러나 흑도회는 9월 사회주의자로 이루어진 '북성회(北星會)'와 아나키스트들로 이루어진 '흑우회(黑友會)'[24]로 분열되었고 후미코는 박열, 홍진유, 박흥곤(朴興坤), 신염파(申焔波), 서상일(徐相一), 장상중(張祥重)이 함께 조직한 흑우회에 김중한(金重漢),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와 함께 가입했다. 11월에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대담한 조선인(太い鮮人)>[25]이라는 운동지를 발간했다.

1923년 4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하였는데[26] 3월부터 살기 시작한 도쿄 도요타마군 요요기 도미카야의 집을 본거지로 정하고 5월 27일에 불령사 첫 모임을 가졌다. <대담한 조선인>을 '현사회(現社會)'라는 제목으로 바꿨고 후미코는 이 잡지에 계속 글을 실었다. 6월에는 당시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였던 모치쓰키 가쓰라와 가토 가즈오의 강연회를 열고 일본의 노동운동가인 나카시니 이노스케의 출옥 환영회도 개최했다. 6월 30일에는 현사회 4호가 간행되었고 8월 11일에는 불령사 6차 정례회의가 박열의 집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박열이 이전부터 은밀히 추진했던 폭탄 입수를 둘러싸고 김중한과 박열의 사이가 나빠지자 불령사는 점점 갈등이 커졌고 1923년 8월 흑우회가 해산되자 니야마 하쓰요와 김중한은 불령사를 나와 자신들만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조선인 학살이 벌어진 지 사흘째인 9월 3일 후미코는 박열과 예비 검속을 핑계로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하루만에 경찰범처벌령에 따라 구류가 연장되었다. 수사 도중 폭탄 입수 계획이 밝혀지자 일본 당국은 10월 20일 형법 73조(대역죄) 위반으로 두 사람을 기소하였다. 처음에는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불령사 동인들을 포함한 16명을 기소했으며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학살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이 '불령선인의 비밀결사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시 후미코는 예심 신문에서 "다이쇼 덴노는 병자이기 때문에 히로히토 황태자를 엿보려 했다 황족과 정치 실권자에게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박열과 논의한 후 김중한에게 상하이에서 폭탄을 입수해 달라는 의뢰를 한 적이 있다"고 했지만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밝혀지지 않았다. 수사를 받으며 권력에 대한 후미코의 반감은 더욱 강해졌으며 다른 불령사 동지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계속 수사를 받았다. 결국 1924년 2월 14일 박열과 후미코, 김중한이 폭발물단속벌칙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고 다른 불령사 동인들은 불기소되었다.

1925년 5월 4일 예심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는 이 사건은 대심원 관할로 넘어간다며 후미코에게 전향을 요구했지만[27] 후미코는 전향을 거부했다. 이 해 여름부터 옥중 수기 집필을 시작했고 7월 17일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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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법정 사진 기사 (동아일보 1927년 1월 21일)[28][29]

위의 법정 사진이 공개되자 일본 사회는 또 다시 발칵 뒤집혔다. 중범죄자라기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모습의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담당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였는데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회유하려고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다테마스 가이세이[30]는 해임되었고 1927년 당시 일본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총사퇴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한 박열은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어로 "나는 박열이다"라고 답했으며 후미코도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박문자"라고 말했다. 1926년 3월 23일 두 사람은 도쿄 우시고메구청에 혼인신고를 제출하며 옥중 결혼했고 후미코는 박열의 호적에 들어갔다. 이틀 후인 25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박열은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후미코는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불과 11일 후인 4월 5일 천황이 명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조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사형수 박열, 25세. 야마나시 현 히가시야마나시군 스와무라 1238번지, 박열의 처 사형수 가네코 후미코, 24세. 특히 사일등(死一等)을 감하여 무기징역에 처함. 내각총리대신은 칙(勅)을 봉(奉)하여 차(此)를 선(宣)함.[31] 다이쇼 15년 4월 5일 내각총리대신 와카츠키.
당시 실제 은사장의 내용.

사실 사형 판결이 있었던 바로 그날 중의원에서 긴급 각료회의가 열려 두 사람을 감형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와카츠키 총리는 이를 들고 재가를 청했고, 에기 법무상은 고야마 검사총장과 협의한 뒤 감형을 상주했다. 사실 이 '은사 신청서'를 신청한 이유야말로 이 사건이 실체가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박열과 후미코의 폭탄 투척 대상을 황실이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었고 계획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종범이기 때문에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가네코에게만 은사를 인정한다면 차별한다는 이유로 조선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박열에게도 은사를 부여해야 한다' 등의 궤변이었다. 판결에서 공모에 의한 대역을 인정한 것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관동대학살을 변명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 정치 재판을 벌였지만, 너무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셈에 비판과 반발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슬그머니 감형해주는 광경을 연출한 것이었다.

후미코는 이 '은사장', 즉 감형 통지서가 왔을 때 오히려 분노하며 찢어 버렸다고 하나, 당국에서 이 사실을 발표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왜곡보도가 실렸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극의 한 장면이었다.
특사장을 받아든 가네코 후미코는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박열도 함께 은전을 입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녀는 웃음 띤 얼굴로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감옥에서 규칙만 잘 지키면 머지않아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며 박열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듣고 있던 후미코의 눈은 눈물로 빛났다.
도쿄아사히신문

후미코는 4월 8일부로 우츠노미야 형무소 도치기 지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7월 23일 향년 23세에 의문사하였다. 일본은 후미코의 사인이 자살이라고 하였으나 일본의 발표에 의구심을 품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흑우회, 불령사의 동료들은 후미코의 어머니와 함께 도치기현 시모츠카군 이에나가촌 갓센바의 형무소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후미코의 시신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사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32] 결국 유해를 화장했다. 일본은 후미코 추모 열풍이 불 것을 염려하여 후미코의 어머니[33]와 동료들을 검속하기도 했다. 8월 1일 후세 다쓰지의 집에 보관해 두었던 유골을 경찰이 강제로 탈취해가기도 했다. 적으로 후미코는 박열의 아내였기에 8월 16일 박열의 형 박정식이 자신의 장남 박형래를 데리고 경북 상주에서 직접 와서 후미코의 유해를 모셔가려 했지만 일본제국 경찰은 유골을 직접 주지 않고 조선의 경찰서로 보냈다. 상주경찰서에서 유골을 인수받은 박정식은 박열의 고향이자 선영인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면 팔령리에 후미코의 유해를 매장하였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8.15 광복 이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으며 한국인 여성과 재혼해 자식도 낳았지만 이후에도 일찍 죽은 그녀를 잊지 않고 후미코의 기일마다 집안 내에서 묵상을 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가졌다고 한다. 1973년 7월 23일, 즉 47주기에는 문경 팔영에 있는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었고 사망 50주기인 1976년 3월 야마나시현 마키오카 소마구치에 있는 후미코의 생가 터에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는 '금자문자비(金子文子碑)'가 세워졌다. 후미코의 는 본래 주흘산에 있는 박열 집안의 선산 지역 문경시에 있었는데 2003년 박열의 생가가 있던 곳에 '박열의사기념관'을 세우면서 후미코의 묘를 기념관 경내로 이장했다.

후미코가 남긴 원고는 동료 구리하라 가즈오가 정리하여 시집과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로 출간되었다(본 문서 인용문들의 출처). 이 자서전에는 '아 이렇게 지지리 복도 없는 인생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혹한 환경이었던, 불꽃처럼 살았다기보단 아프게 살다 간'[34] 그녀의 반생, 아플 만큼 아팠고 외로울 만큼 외로웠으며 '태어났다'가 의미하는 어떤 축복도 갖지 못한 채 태어나서 오히려 세상에 '버려졌다'고 해야 할 끔찍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전 생애를 보낸[35] 후미코의 짧은 삶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후미코의 전반생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녀가 직접 남긴 이 기록 덕이다. 첫 출간은 사망 5년 뒤인 1931년 7월 10일이다. 첫 기억이 시작되는 4살 어린 시절부터 박열과 만나 동거생활을 시작하기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수기는 한국에는 2012년에야 정발되었는데[36] 원제대로 출판된 버전도 있고 <나는 나>또는 <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의 불꽃수기>로 제목이 바뀌어 나온 버전도 있지만 내용은 모두 같다. 출판 당시에는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영화 박열의 상영을 계기로 주목받았다.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는 후미코의 옥중 수기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수기는 번역서에서 떼어낸 추상어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15년의 전쟁을 겪고도 별로 변하지 않았던 오늘의 일본 지식인들의 허를 찌른다.
중대한 사상이 정규 교육제도 안에서 근면한 학습을 통해서만 세워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는 누군가 대신 써준 위서처럼 보일 것이다. 누가 써주었는가 하면 일본의 국가가 쓰게 한 것이고 국가에 대해 혼자 맞선 그녀가 이 수기를 쓴 것이다.

3. 기타



[1] 각각 아버지와 고모부 쪽 성을 딴 것이다.[2] 남편 박열의 성에 이름 후미코(文子)의 한국어 독음을 합쳤다.[3] 호적상 가네코 후미코의 부모로 등재되어 있다.[4] 첫 번째는 박열의 재판 변호를 담당했던 후세 다쓰지.[5] 당시에는 동거인.[6] 구 일본 제국 측에서 유가족에게 통지한 사망 원인은 자살이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7] 이 때문에 후미코의 실제 출생연도와 나이는 확실하지 않다.[8] 당시는 시민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기보다는 국가의 신민(臣民)으로서 납세, 병역 등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에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시기였다. 호적은 국가가 시민에게 부과하는 의무에 대해 뒷받침하는 자료가 되었는데 그렇다보니 무적자(호적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를 국가가 나서서 직권으로 호적에 등재시키거나 복지 정책으로 보호하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돌리고 멸시했던 것이다.[9] 동정심으로 후미코를 다니게 해 준 학교들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차별이 많았다.[10] 후미코 외에도 남동생이 있었다.[11] 심지어 어린아이였던 후미코가 못 볼 꼴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12] 후미코가 학교에 낼 수업료나 학용품이 사라지곤 했다.[13] 그래도 후미코를 아예 버릴 생각은 없었는지 새아버지 집에 데려오기도 했으나 후미코는 그 집에 적응하지 못했고 며칠 만에 스스로 외갓집으로 돌아갔다.[14] 안타깝게도 후미코가 스스로 거절하고 말았다. 혹시라도 조선인에게 얻어먹었다는 사실을 할머니가 알게 되면 또다시 학대를 받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15] 후미코가 본 것은 아마 1919년 3월 30일 부강역에서 열린 만세운동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39일간 세종 각지 8개 면 1개 읍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16] 이후 후미코의 할머니와 고모 부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화딱지가 날 사람들을 위해 언급하자면 그래도 이 인간들의 말년이 그렇게 평온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불과 몇년 뒤에 후미코가 '대역죄인'(일본의 입장에서)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연좌제 문화가 현재까지도 장난 아닌 일본인들 사이에서 저 시대에 저런 혐의를 받아 버리는 친척을 두었으니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을 것이 뻔하다. 쌤통 게다가 후미코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자서전을 통해 다 알려져 있으니 무언가 지원하거나 도움을 주었을 확률은 0%다. 설령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일본은 20여년 후 패망하므로 어찌어찌 꾸역꾸역 살아남았다고 해도 비참하게 쫓겨나(조선을 떠나며 참조) 초라한 처지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17] 2012년 후미코의 자서전이 출간되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이종사촌으로 알려져 있었다(동아방송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1969년 7월 20일 방송).[18] 사실 외삼촌도 이미 여자친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쪽과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왜? 처녀가 아니어서.(...) 그는 명색이 종교인이면서도, 오직 안락한 생활을 위해 출가한 사람이었으며 그렇기에 순결한 노리개만을 원했다. 심지어 후미코와 약혼한다고 한 지 고작 2주만에 다른 여자를 쫓아다니는 등 행실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리고 후미코에게 실망해 파혼을 선언한 것도 조카의 처녀성이 의심되어서라는 뭐라 말이 안 나오는 내로남불의 이유였다...열받을 사람들을 위해 말해두자면, 이 외삼촌은 그로부터 얼마 못 가 병에 걸리면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고 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처량해진 그의 몰골은, 외삼촌이 과거에 뭘 했는지 잘 아는 후미코조차 측은함을 느끼게 될 정도였다고 한다.[19]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육체관계도 있었다고 자서전에서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20] 수십년 후의 일이지만 이후 어떻게 망했는지를 보면 선견지명이었다.[21] 사실 후미코 쪽에서 한눈에 반했다. 정식으로 처음 만났을 때 했다고 자서전에 고백한 표현을 인용하면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는데 당신은 이미 배우자가 있나요? 또는 없어도 누군가...그러니까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만약 있다면 나는 당신과 단지 동지로서만 교제해도 상관없습니다만...어떠세요?" ...사실상 거의 프러포즈인데 후미코 본인도 '바보 같은 구혼'이라는 말을 썼을 정도였다.[22] 이때 둘이 얻어 살던 셋방은 도쿄 에바라군 세타가야정 이케지리에 있었으며 집주인은 신발가게를 운영하던 아이카와 신사쿠였다. 10개월 정도 살다가 도요타마군 요요히타정 요요기, 도미가야의 셋집으로 이사했다.[23] 일본에서 조직된 한인 사상 단체의 효시로 평가된다. 한인 유학생, 고학생, 자유노동자 20~30명이 참가하여 만들었는데 확인 가능한 회원은 김판곤, 권희국, 원종린, 김두전, 임택룡, 김종범, 김사국, 정태신, 조봉암, 백무, 김찬, 이옥, 박열, 최규종, 서상경, 장상중, 한현상, 육홍균, 정태성, 신영우, 황석우, 손봉원 등이다.[24] 최초 이름은 풍뢰회(風雷會)였다가 12월 개칭.[25] 후데이센진이라고 발음되는데 이는 불령선인이라는 멸칭과 같은 발음이지만 상반되는 뜻을 품은 다쟈레(말장난). 내용도 일제에 대한 반발과 불령선인에 대한 옹호가 담겨 있었다.[26] 후미코는 재판에서 불령사의 성격을 "권력에 반역하는 허무주의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라고 진술하였다. 회원은 한국인으로는 홍진유, 육홍균, 한현상, 최규종, 최영환, 이필현, 하일, 서동성, 정태성, 김중한, 장상중, 김철, 서상경, 박흥곤 등을 포함해 17명, 일본인으로는 구리하라 가즈오, 니야마 하쓰요, 노구치 시나니, 나카다 게이자부로, 오가와 다케시 등 6명이 있었다. 대부분 아나키스트였으나 최영환은 불교도로서 벤텐도 승려였고, 한현상은 기독교인이었다. 공통점은 모두 고학생이나 노동자였다는 것.[27] 대심원으로 넘어가면 거의 사형 선고를 받는다.[28] 기사 읽기[29] 그 이전인 1925년 12월 4일에 조선일보 특파원이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박열과 후미코를 면회했다고 한다.[30] 후미코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사진을 촬영할 때 편의를 봐 주었을 뿐 아니라 자서전이 출판될 때도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짧은 편지는 자서전에도 실려 있다.(초역본의 경우 정발판에는 그의 이름이 '다테마스 카네키요'라고 오역되어 있다.)[31] 칙령을 받들어 이를 베푼다는 뜻.[32] 그때는 이미 사망한 지 5일이 지난 데다 7월 하순의 한여름이라 부패가 심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천황에 의한 감형을 받아들이는 것은 천황제를 부정한 후미코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끝까지 천황제에 저항하기 위하여 자살하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33] 딸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딸은 딸인지라 사형 선고 후 면회도 왔고 유해 확인 자리에도 참석했다.[34] 2012년 초역본 번역자 정애영이 역자 후기에서 쓴 표현이다.[35] 2017년 출간된 문화숲속예술샘판에서 사용한 표현이다.[36] 영어권에서는 이미 1997년 정발된 것을 생각하면 늦은 셈. 참고로 영문판 제목은 <한 일본인 여성의 감옥에서의 기억(The Prison Memoirs of a Japanese Woman)>이다.[37] 다른 창작물들은 대개 두 사람의 만남부터 시작하고 회상이나 언급으로 넘어간다.[38] 현재까지도 매년 열리고 있는 추도식은 짝수 년도에는 일본에서, 홀수 년도에는 한국에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