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남수(南秀) / 석담(石潭) |
본관 | 남평 문씨[1] |
출생 | 1921년 9월 15일 |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선소리[2] | |
사망 | 2001년 11월 1일 |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 대구보훈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4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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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문익점의 19대손이다.
2. 생애
문덕길은 1921년 9월 15일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선소리에서 유어면장을 지낸 아버지 문동숙(文東淑, 1893. 5. 6 ~ 1976. 4. 19)[3]과 어머니 서흥 김씨 김계팔(金桂八, 1887. 12. 19 ~ 1959. 9. 24)[4] 사이의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광주 노씨 노문출(盧文出)과 혼인하여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그는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이던 1941년 2월 15일 동교생 권쾌복, 배학보, 문홍의 등 15명과 함께 대구시 대봉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했다. 다혁당은 문학, 미술, 학술, 학생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해 조국 독립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또한 다혁당은 조직을 대외적으로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다혁당의 조직은 당수, 부당수 아래 총무, 학술, 문예, 연구, 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문덕길은 경기부원(축구부 책임)의 일을 맡았다. 또한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했다. 또한 문덕길은 동교내 일본인 학생으로 구성된 연습과와 조선인 학생으로 구성된 심상과에 대한 차별 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했다.
그러나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다혁당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로인해 체포된 그는 2년여 동안 미결수로서 옥고를 치르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후 대구사범학교에 복학하여 졸업하였으며, 대구에서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62년에는 유어국민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원생활을 했다.
2001년 11월 1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 대구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문덕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1년 11월 5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