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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22 01:59:54

문홍의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남평 문씨[1]
출생 1921년 1월 3일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2]
사망 1951년 1월 21일[3]
강원도 원주군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41판-7면-210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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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홍의는 1921년 1월 3일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에서 아버지 문기현(文基鉉, 1888 ~ 1967. 12. 29)과 어머니 합천 이씨 이시보(李始輔)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했는데, 1939년 7월 왜관 철도노선 매립작업에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5학년생들이 민족차별을 일삼던 일본인 교유를 작업장에서 구타한 사건을 목격했다. 이후 그는 1939년 10월 하순에 동교생들이 조직한 윤독회(輪讀會)에 가입하고 박효준(朴孝濬), 강두안, 이태길, 유흥수 등과 함께 항일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들은 방학 동안에도 귀향하지 않고 수집한 원고를 편집하여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발행했다. 그 내용은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것이었으며, 책자는 약 200부를 발간하여 학생들에게 배부되었다.

이후 1940년 11월 23일, 문홍의는 박효준, 강두안, 이태길, 유흥수 등과 함께 일제의 패망을 대비하여 조국독립을 이루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이태길의 하숙집에서 학생결사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했다. 이들은 동지포섭과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등을 운동방침으로 정하고 1940년 11월부터 1941년 3월 9일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갖고 민족문화 존중 및 항일의식을 고양했다. 또한 1941년 3월에는 기관지 <학생>을 발간하여 이를 부원들에게 배부했다.

1941년 2월, 문홍의는 유흥수, 권쾌복, 배학보 등 15명과 함께 대구시 대봉정에 소재한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학생결사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다혁당은 문예부의 조직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서 교내 조직에 국한되지 않고 대외적으로 확대해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조직으로는 당수, 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 등 각 부서를 두었다. 이때 문홍의는 연구부 책임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당원의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했다. 그리고 동교 내 일본인으로 구성된 연습과 학생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심상과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모색했다.

그러나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서 비밀결사의 전모가 발각되었다. 결국 경찰에 체포된 그는 미결수 신분으로 2년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지내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입대, 미합중국 육군 제7보병사단 소속 이등병[4]으로 조선인민군중국 인민지원군에 맞서 싸웠으며, 1951년 1월 21일에 원주 전투를 치르던 중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문홍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1] 판도판서공파-합천 심묘 문중 27세 홍(洪) 항렬.[2]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 문병권 전 서울특별시 중랑구청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남평 문씨 족보에는 1950년 12월 15일 출전 후 실종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4] 군번 K1139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