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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8:18:44

두쥔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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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두쥔후이
杜君慧(두군혜)
파일:두쥔후이.jpg
출생 1904년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
사망 1981년 (향년 76~77세)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
가족 배우자 김성숙
슬하 3남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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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좌익계 여류 지식인.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아내이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04년경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과자점 점원이었고 부유하지는 않지만 먹고 살만한 재산을 보유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역사상 영웅들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노력했으며 정의감도 남달랐다고 한다. 1984년 상하이 여성연합회에서 편찬한 <여성운동이론 연구의 선구자-두군혜>에 따르면, 하루는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집 앞에서 혁명가들이 청나라의 군인들에게 붙들린 채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이때 어머니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혁명가들은 다 훌륭한 분들이야.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사나이들이란다."

또한 그녀가 7살이었을 때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그녀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삼촌의 변발을 잘랐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가 과자점을 운영하는 것을 도우면서 틈틈이 학업에 정진하던 그녀는 광동대가 여학생들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즉시 입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이로서 그녀는 광둥성 최초의 여대생이 되었다. 그 후 광동대에서 공부하던 그녀는 한 청년으로부터 일본어 과외를 받았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김성숙이었다.

김산, 님 웨일즈의 공동 저작 <아리랑>에 따르면, 김성숙은 1927년 늦여름부터 두쥔후이를 열렬히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매일같이 두쥔후이를 데리고 '72열사의 광장'이 있는 공원에 데리고 갔다. 김성숙의 친구들은 그가 '연애병'을 버리고 공산주의 활동에 전념하길 바랬지만, 김성숙은 끝내 그러지 못하고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고 한다. 두쥔후이 역시 그를 마음에 들어했고, 두 사람의 애정은 갈수록 커져갔다.

그러던 1927년 12월 광저우 폭동이 실패로 끝난 직후, 광저우 폭동에 참여해 연결책 지도원을 맡았던 김성숙은 두쥔후이의 집에 찾아와 친필로 쓴 한국어 공책을 주면서 안전한 곳에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노트에 기록된 것은 광저우 폭동에 대한 상세한 경과였다. 아울러 대학교 기숙사 안에서 위기에 처한 학우들에게 피신해달라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두쥔후이의 모친은 김성숙을 위해 중국식 상의를 만들어 주면서 돈 10원을 함께 넣어줬다.

다음 날 아침 김성숙의 임무를 도와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두 사람은 중산대학교 기숙사로 가면서 유혈이 낭자하고 시체가 가득 쌓인 광경을 목격했다. 두쥔후이는 이 광경에 큰 충격을 받고 혁명가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당국에 분노를 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무사히 대학교에 도착해 학우들을 피신시켰고, 그녀는 이때부터 혁명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928년 초,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3개월간 학업에 전념했다가 6월에 귀국해 상항이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녀는 김성숙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선전하고 국민당 정부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두 사람은 <사회과학사전>과 <교육사>를 함께 번역하기도 했으며, 일본 작가들이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기반을 두고 집필한 <국가와 계급>을 번역하기도 했다.

1929년, 김성숙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3명의 아들(두건, 두견, 두련)을 두었다. 이후 그녀는 1930년 8월 김성숙과 함께 중국창작비평위원회에 가입했고, 1935년 12월 12일 중국좌익작가연맹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일제의 화북 지역 침탈을 성토하는 내용의 <상하이 문화계 구국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남편과 함께 서명서에 서명했다. 또한 그녀는 상하이 여성구국회에 가입해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했다.

그 후 한국의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남편을 따라가며 가정을 보살피던 그녀는 1943년 2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으로 선임되었으며, 3월 30일에는 외무부 외사과 과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그녀는 1943년 9월 28일까지 외무부 정보과 과원으로 활동했으며, 1945년 5월부터는 안정근이 회장을 맡고 있던 한국구제총회의 이사로 활동했다. 또한 1945년 7월 11일에 미국에서 발행되는 신문 <독립>에 "해외 조선부녀 동포들에게-혁명자 후원사업을 하자"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조선 해방을 위한 혁명자 후원 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렇듯 그녀는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한중 우호를 다지는 등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8.15 광복 후 한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마련하지 못해 남편이 홀로 한국으로 떠나는 걸 지켜봐야했고, 세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50년대에 중국에 남아있던 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배를 타고 인천에 들어왔지만, 당시 김성숙을 불온인사로 간주하고 탄압하고 있던 자유당 정권은 그들을 인천 월미도에 있는 수용소에 감금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했다. 김성숙은 이 일로 실의와 좌절에 빠져 동지들과 만나서 밤을 새워가며 폭주를 한 탓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중일전쟁 종식 후 육재학교(育才学校) 주임 교사로 부임했고, 1949년 2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제1차 전국여성대표대회에 참석했고, 9월에 제1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엔 북평여2중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1955년 베이징 제6중학교 당지부 서기 겸 교장을 역임했고, 1956년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1981년에 고향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사망 일자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두쥔후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