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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8:29:14

호러스 뉴턴 알렌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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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al_of_an_Embassy_of_the_United_States_of_America.png 주한 미국 공사
공사 공사 총영사
존 실 호러스 뉴턴 앨런 에드윈 모건

미합중국 주한 미국 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1]
Horace Newton Allen
파일:attachment/호러스 뉴턴 알렌/Allen_O_Neil.jpg
<colbgcolor=#131230><colcolor=white> 한국어명 안련(安連)
출생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사망 1932년 12월 11일 (향년 74세)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
국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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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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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학력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 (학사)
마이애미 의과대학
직업 선교사, 의사, 외교관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
주요 경력 장로회 의료 선교사
제중원 의사 겸 교수
조선 참찬관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
주한미국공사관 총영사
주한미국공사관 공사

1. 개요2. 생애
2.1. 조선 최초 의사이자 선교사2.2. 주미 한국 공사관 설립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외교관으로
2.3.1. 광산 개발
2.4. 러일전쟁 이후 행보
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이며 의사이자 고종의 부름으로 조선의 관리로도 활약한다. 이후 한반도에서 외교관인 주 조선 미국 공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한국 이름은 '안련(安連)'. 현대 외과 의학을 조선에 도입한 공로가 있지만 의료 선교보다 곧 고종에게 고용되거나 미국의 외교관으로 전업한 시간이 선교사로 일한 시간보다 더 많다.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2]인 광혜원(제중원)[3]을 설립한 인물이다.[4] 1885년(고종 22년)에 조선 말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인 광혜원(제중원)[5]을 세우고 의사와 의학 교수를 겸하면서 운영까지 담당했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고종의 특명으로 주미조선공사관 고문으로 파견되어 설립에 관여했으며 1890년(고종 27년)에는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받아 의료 활동 대신 외교 업무를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 전권 공사까지 올랐다.

2. 생애

2.1. 조선 최초 의사이자 선교사

오하이오델라웨어에서 출생했다.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로 청나라 상하이에서 의료 활동을 했지만 상하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청나라 지방관과 싸우고 외국인들과도 마찰이 심했다. 그러던 중에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알렌은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했다. 아니 요청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조선에 안 보내주면 일을 그만둔다는 협박을 했다. 결국 조선 행을 허락 받아 한살 짜리 아들과 아내와 함께 셋이서 1884년에 조선으로 갔다. 아직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지 않은 조선에서 선교사 신분으로 있는 것이 위험하다하여 당시 주조선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는 그를 주한미국공사관 소속 무급 의사로 임명했다. 알렌은 조선에서 지내는 동안 개신교 선교 사업을 겸했는데, 알렌이 부임하자 그동안 타국에서 병에 걸릴까봐 불안해 했던 외국인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10월 27일 조선에 입국했는데 38일 만인 그 해 12월 4일에 갑신정변이 터졌고, 개화파의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수술해 목숨을 구해주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정변으로 미국 공사까지 도망간 상태에서 알렌이 민영익 치료를 자원했는데 이는 민영익이 보빙사의 대표였던만큼 그를 개화파인줄 잘 못 알고 만약에 죽는다면 친미 개화 세력이 타격을 받을까봐였다. 그런데 민영익은 임오군란 때부터 청군을 등에 업은 친청사대파 민씨 척족의 유망주이자 차세대 리더로, 보빙사의 대표로서 미국을 갔다오긴 했지만 그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음에도 가져간 유교경전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고, 미국이 호의로 내준 군함에서는 멀미가 난다고 여객선으로 도망가려던 인물이었다.

어쨌든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은 일곱 군데에 치명적인 외상을 입었고 묄렌도르프[6]가 자신의 호위병과 함께 민영익을 자신의 가마에 숨겨 옮겼고 그리고 한국에 있던 유일한 서양 의사 알렌을 급히 불렀다. 알렌이 도착할 무렵 한의사 14명이 알렌의 치료를 결사 반대하며 막았으나 쫓아냈고, 밤새 지혈을 하고 봉합을 한 다음 일본인 군의관을 불러 함께 치료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행한 외과 수술로 기록된다. 이 때 알렌은 민영익으로부터 치료비를 사양했다. 갑신정변과 진압이 완료되자 고종은 12월 26일에 최상품의 왕실 병풍과 고려자기 그리고 금일봉을 하사했다.

그후 알렌은 당시 주한미국공사관 총영사 대리로 사실상 공사로 재임하던 조지 포크 해군 소위의 추천장으로 1월 22일 조선왕립병원 설립 허가서를 제출했고, 알렌이 병원 설립을 요청하자 고종은 흔쾌히 광혜원 설립을 허가했다. 광혜원 부지는 갑신정변 때 대역죄인으로 참살당한 홍영식과 그의 아버지 영의정 홍순목의 집이었다. 병원 설립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닷새후 1월 27일 민영익은 두 살 많은 알렌을 앞으로 평생 형님으로 모신다며 10만 냥을 기부했다.[7]
알렌은 다음해 스크랜튼언더우드를 초청하여 의료진을 보강했는데 운영비는 선교단체에서 고종의 지원을 받아 충당했다. 이는 조카 민영익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 알렌에 대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전폭적인 신임 덕분이었다.

민영익 치료 계기로 민씨척족과 가까워지고 고종의 신임도 얻어 수월하게 하와이의 노동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와이 이민자 모집을 공고했다. 당시 하와이 이민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들게 고생했으나, 일한 만큼 부지런히 하면 땅도 주고 돈도 벌고, 그곳 농장주들이 조선의 양반지주와 탐관오리들의 수탈보다는 훨씬 낫다는 소문에 이민 희망자들이 몰려서 제비뽑기뇌물까지 주고 밀항까지 하려고 했다.
(Sanford B. Dole) 하와이 주지사에게 보낸 알렌(Horace Allen)의 편지, 1902년
지금까지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려는 허가를 얻기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허가 없이 이민하면 귀국하는데 문제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의 혹독한 기근을 겪고 난 뒤 이들에게 이민은 한층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한편 한국 정부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이려고 많은 양의 쌀을 들여와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민이라는 것에 대하여 관리들이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중국인이 쫓겨난 곳으로 자기 나라 백성들이 간다는 것을 아는 고종 황제의 긍지가 이에 많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중략)

조선인들은 참을성이 많고 근면하고 유순하고 오랜 복종의 습성으로 다루기 쉽습니다. 그들은 보통 외국 교육을 받는 데 대해 예민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미국으로 귀화했고, 그런 가운데 귀국한 이들은 잘 되었으며 그것은 미국 교육의 덕이었습니다.

(중략)

만약 한국 사람들이 얼마든지 그곳에 가게 되면 신이 보낸 한국인들이 될 것이며 나는 그들이 별 탈이 없을 것이며 노동자로서 일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속의 한국인》 1882 - 1974, 김흥찬 ⋅ 웨인 패터슨 著, 1974.

미국 의회에서는 1880년에 중국인 이민 배제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동양인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는 힘들었으나 이 과정에서 알렌이 개입하여 주 지사에게 편지를 보낸것이다. 하와이로 간 조선인들중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인천 내리교회에서 출신들이 많았고, 1902년에 하와이에 한인 교회를 열고 조국을 위해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하와이 한인들의 이주는 1905년(광무 9년) 일제가 하와이의 반일거점화를 우려하여 이민금지법을 제정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들 하와이 한인 이주자와 후손들은 조선과 연락하고 미국내에서 한인 여론을 대표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2. 주미 한국 공사관 설립

1886년(고종 23년) 알렌은 고종의 밀명을 받는다. 임오군란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청나라이홍장이 보낸 원세개에게 이리 저리 쥐어 짜이며[8] 강제로 외채를 빌리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었는데, 청나라의 내정간섭 명분인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미국에 차관 200만 달러를 얻어낼 계획으로 주미 조선공사를 파견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대청속국이니 청나라에 보고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쟁이 오는데, 우유부단했던 고종은 결국 보고를 하기로 하고 베이징으로 사절을 보냈다. 청나라는 세가지 조건을 내걸며 공사 파견을 허용하는데 이를 '영약삼단(另約三端)' 이라한다.

이 과정에서 알렌은 나가사키에서 무려 5달이나 기다렸는데, 고종편지를 받고 홍콩에 있던 '아우' 민영익을 만나러 갔다. 민영익은 고종의 비자금을 HSBC에 예금하고 홍콩의 빅토리아 호텔 스위트룸에 머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형님' 알렌은 아우 민영익에게 "돈을 아껴쓰라"며 "자네 돈도 아니니 조금 싼 방으로 옮기라."고 권고했고, 고종의 명으로 공사관 부지와 건물 매입용 20,000 달러를 인출해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주미 조선국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받은 박정양을 나가사키에서 만났는데, 박정양은 이미 돈 다 받았다는데 바득바득 우겨서 홍콩으로 민영익을 만나러 또 간다고 하여 또 같이 따라갔고, 민영익이 돈이 너무 많으니 한 달마다 공사관 유지비를 부쳐준다느니 안된다느니 옥신각신 끝에 민영익 - 박정양 공동명의로만 기명날인이나 서명으로만 인출 가능하다는 조건으로 매듭짓고 다시 나가사키로 가서 미국 행에 오른다.

알렌은 여행 중인 조선인 외교단의 모습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꽤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나가사키에서 홍콩으로 갈 때, 외교단이 조선에서 싸온 조선 음식을 담은 항아리를 호텔 방에 굳이 넣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것을 말렸으나 실패했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에서는 1등석 표를 5장만 샀는데 다른 2명은 다른 표를 사고도 몰래 1등석 식사에 여러 번 끼다가 걸려 결국 차액을 지불했으며, 방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안내를 무시한 채 담배를 피웠고, 방 안에서 조선 음식 냄새, 씻지를 않아 나는 오줌 냄새와 땀 냄새가 담배 냄새랑 섞여서 더러워 같이 다니기 쪽팔렸다고 디스했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알렌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박정양 일행이 알렌에게 영약삼단(另約三端) 내용을 알리지 않다가 그제서야 실토한 것이다. 알렌은 "조약은 대등한 나라끼리 맺는 것이고 조선과 미국의 조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며 지키지 말라고 설득했으나 박정양은 청나라 공사관을 찾아가 미국 국무부에 안내 해달라고 요청 해버렸다. 기가 막힌 알렌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행을 데리고 나갔고 마침 비가 와서 청나라 일행이 늦게 오자 그대로 쌩까고 단독으로 일행을 끌고가 처리해버렸다. 항간에 알려진 박정양의 자주독립 외교 업적(?)은 실은 알렌이 주도 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청나라이홍장원세개는 대노해서 공사관의 폐쇄와 외교관들의 송환을 요구했고 1년 뒤에 고종이 순순이 굴복하여 주미조선공사관은 폐쇄되고 말았다.

2.3. 고종과 미국 사이에서 외교관으로

알렌은 1890년(고종 27년)에 다시 조선으로 입국했다. 상술했듯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이홍장이 파견한 원세개를 비롯한 청의 영향력으로 인해 기존의 조공국 수준에서 청나라의 일개 성 수준으로 휘둘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거의 직접 통치를 받는 수준으로 국격이 나락으로 떨어졌단 것이다. 이러한 내정 간섭에 혐오감을 품었던 알렌은 '조선의 절대적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알렌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속방 개념을 인정치 않았다. 그래서 1882년(고종 19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선에서 대청국의 속방이라는 문구를 넣자고 하자 미국에서 강력하게 반대했고, 조선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조약에는 없지만 우리 조선은 대청국의 속방입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걸로 타협했다. 명분상 조약은 대등한 국가끼리 맺는 것이므로 속방이라는 개념을 거부했으며 청나라를 핑계대고 파기하거나 조약을 이행치 않을 수도 있고, 또한 청나라가 조약에 간섭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조약을 맺은 서구 국가들은 속방이고 아니고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한 문제이지, 타국과의 조약에 넣을 수 없다고 일관적으로 반대 했다. 모든 서구 열강들은 조선이 청나라에 매여있는 이상한 외교관계를 답답해 했고 이는 조선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1894년(고종 31년)에 발발한 청일전쟁과 1895년(고종 32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을 계기로 조선이 청나라와의 조공 책봉 속국 관계를 청산했으나 고종은 러시아로 기울면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이 일본을 아시아에서 러시아 남하를 저지할 역할을 기대하고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 역시 영국에 동조하는 입장이라 알렌의 구상과 달리 영국 미국등 서구 열강들은 조선의 외교 정책에 실망하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에서는 조선의 전략적 가치를 매우 낮게 보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 가치에 대해 푸트 주조선 미국 공사는 본국에 보고로 ‘수출 가능 물품은 소가죽, 쌀, 사람 머리털, 전복껍데기 정도이다’고 평가하고, 조선의 경제적 가치를 ‘단물 빠진 껌 내지 계륵(鷄肋)’이라고 대폭 평가절하 하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갑신정변이 터지고 외국인 학살 우려 때문에 푸트 공사는 제물포로 런 하고 출국 후에 사임해버렸고, 미국 공사는 당시 갑신정변에 낌새를 채고 연루 되길 바라지 않아 지방 여행중이었던 해군 무관 포크 소위[9]가 총영사 대리를 해야 했을 정도 였는데 포크 소위의 연봉은 푸트 공사의 5분의 1 수준이라 한국산 우표를 미국에 팔아 공사관 운영비를 충당해야 할 정도로 쪼들렸다. 전임 푸트 공사의 사임 이유중에 하나도 미국 의회에서 한국의 가치를 매우 낮게 보고 '납세자의 세금을 조선 공사관 같은 쓸데없는 곳에 낭비 할수 없다'는 이유로 운영비 지출을 거부 하여 공사에서 총영사직으로 강등되었고, 푸트 공사가 사비로 구입한 공사관 비용을 정부에 돌려받지 못한 원인이 매우 컸다. 이후에도 기피직이라 공석으로 오래 있었고 재정난으로 사임한 푸트 공사 보다 겨우 5분의 1의 월급을 받으며 사비로 공사관을 운영했다. 그러다 결국 포크 소위는 건강상 이유로 사임하고 일본으로 떠났는데, 공사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자 다시 포크 소위를 데려다 공사 직을 수행하게 시켰다. 그러나 포크 소위가 청나라와 원세개의 월권과 내정 간섭에 항의하자 원세개의 압력으로 해임되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고, 이런 상황에서 아무도 공사 직을 맡으려고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 협판 벼슬로 정 2품 품계까지 받으며 고종 및 중전 민씨와 친한 알렌이 공사로 임명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알렌도 고종의 미국 의존을 매우 경계했다. 아관파천 이전에 고종은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공사관 등에 총 13년간 파천 요청을 여덟 번이나 했으나 모든 국가에서 번번히 거부당했다. 1894년(고종 31년)에도 고종이 미국공사관으로 진입 요청을 했지만 알렌은 거절했다.

1905년(광무 9년) 러일전쟁 와중에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자 고종은 또 다시 미국공사관으로 파천하기를 요청하는데 알렌은 즉각 거부했고, 아예 본국에 "고종이 허락받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온다 하더라도 쫓아내겠다"고 보고했다.

2.3.1. 광산 개발

광산 개발은 명성황후가 10년 간 알렌이 세운 공을 치하하며 하사한 큰 보수였다. 당시 미국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을 끌어들여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한 고종의 전략으로 미국에 이권을 준 측면도 있었다. 알렌은 이러한 점을 잘 이용하여 한성전기, 전차, 경인철도, 광산 등의 산업 부문에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시아 최대의 금광평안북도운산 금광 채굴권을 미국의 모스(J. R. Morse)가 획득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도 알렌이었다. 알렌은 청일전쟁 이후 친미적 성향의 인물로 내각을 채우고자 했으며, 결국 자신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던 박정양총리대신으로 하는 친미 내각의 성립을 이끌었다. 이러한 친미 내각성립과 더불어 운산금광 채굴권을 모스에게 넘겨주는 데에 있어서 알렌말고도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이러한 명성황후를 일본인이 살해하자 알렌은 그 진상을 세계에 알리고 고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왕비의 한마디에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하루 아침에 하사받게 된 알렌은 모스에게 30,000 달러에 팔아버렸고 모스는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 개광 회사를 설립,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운산 지역의 도로나 물류 상태가 미비했기 때문에 10만 달러로는 개발이 택도 없었다. 결국엔 동업자를 모집하여 1897년 헌트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OCM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제중일전쟁으로 미국 자본의 자국 송금을 제한한 1937년까지 30여 년 동안 자본금 투자의 3배에 달하는 수익 당시 시세로 1,500만 달러를 남겼다. 현재 시세로는 투자금 500만 달러는 2014년 기준 약 1.3억 달러에 해당하고, 수익금 1500만 달러는 지금 가치로 2억 ~ 3억 달러 정도를 남겼다.[10]

성공적인 투자인지는 따져봐야 하는게, 대비 50% ~ 170% 수익률이긴 하나 이것도 100여년전 달러 가치를 기반으로 한 추계치고 초기 투자 7년 동안은 전혀 배당이 없다가 이후 30여 년간 회수가 되었기에 수익성이 높았는지는 조선의 인프라나 정치적 리스크까지 고려하면 이득을 크게 봤다고 하기 애매하다. 그 후 1939년 OCMC는 중일전쟁 이후 수익이 급감하자 평안북도 창성 지역의 대유동 금광을 경영하던 일본 광업 주식회사에 800만 달러를 받고 운산 금광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1941년 이후였으면 적대국 자산이라 강제 몰수당할 것이었지만 매우 운이 좋은 편.

미국의 실(J. M. Sill) 공사는 이 계약에 대해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다고 했으며, 알렌은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기록은 링크를 참조.

이 때문에 알렌은 금광 회사로부터 일종의 두둑한 커미션을 받았고, 제물포에 근사한 별장까지 거느렸다. 자신의 친구인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렌은 "모스와 헌트는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고 금광이 원활하게 운영되자 나에게 두 번에 걸쳐 현금과 선물을 주었다."고 했다.

외교관은 자국 이익에 충실하며 상대국과 공통된 이득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이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또한 국제 사회의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선교사들은 이 당시 알렌을 손절하여 선교사로 취급하지 않았다.

"미국이 운산 금광에서 금 900만 톤을 캐냈다"는 뉴스 기고문 까지 여럿 있지만 이 역시 투철한 반미 운동권식 날조이다. 900만톤 중에 899만9900톤 이상은 아무런 가치는 커녕 처리비와 환경 파괴 비용이 나오는 버럭에 불과하다. 운산 금광을 포함한 북한의 전체 금생산량 최고치가 정보 기관에 따르면 한때 10톤 까지 도달했으나, 현재는 사금까지 탈탈 털어도 연간 3~4톤에 불과하다. 북한의 전력난 으로 낙후되어 있는 점을 감안 하더라도 900만과 최대 10톤의 차이는 굳이 금채굴량을 발표 하지 않고 900만 톤은 큰 숫자로 혼란을 일으키려는 허황된 선동이다. 영화 007 골드핑거와 다이하드3에서 털어보려는 미국 연방준비은행 금 보유고가 고작 6,200톤이고, 지구상에 금은 고작 25만톤 미만 이며,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21세기까지 캐낸 금의 양은 19만 5,000톤 정도이다. 금광석 1톤에 금은 3g 미만이 나온다.[11] 이처럼 금광석과 금생산량에는 막대한 차이가 있다.

2.4. 러일전쟁 이후 행보

고종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러시아일본의 대결로 압축되었으며, 알렌은 1897년 주한 미국 대리공사 겸 총영사를 거쳐 1901년에는 주한 미국 전권공사가 되어 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 정부와 알렌의 생각이 달랐다.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對韓政策) 기조는 불간섭정책이었다. 이는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점차 친일정책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그 보상으로 한반도를 넘겨주고 아시아에서 우월권을 인정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알렌은 주한 미국의 공사로서 이러한 친일 정책은 현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며 1903년 9월 미국으로 들어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알렌은 러시아가 만주를 평정하고 막대한 자본을 들여 항구철도, 도로 등을 건설했기 때문에 절대로 만주에서 철병하지 않을 것이며, 항구․철도․도로의 건설로 엄청난 상업시장이 발생했고 그 개방을 약속한 만큼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친러반일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알렌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알렌은 이에 불복하여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미국일본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한국에서 미국공사관 철수를 결정한 미국 정부는 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알렌을 해임했다. 1905년 6월 알렌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알렌은 다시 의사로서 활동하고 집필에도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국사 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하지만 알렌은, 비록 미국의 친일 기조 정책은 반대했어도 고종에 대한 비판은 점점 심해졌다.

1902년(광무 6년) 평양부제 2의 수도로 만들고 일제의 한성 무력 장악시 평양으로 이어하여 러시아와 함께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풍경궁(豐慶宮) 공사를 강행했는데 공사비 1000만 냥중에 고종이 내놓은 것은 150만 냥 뿐이었고 나머지 비용은 서북 지방에서 세금을 걷어 충당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은 민씨 척족과 탐관오리들의 뱃속으로 들아갔고, 세금의 고작 5분의 1만 공사비로 투입되었다. 더군다나 당시 평안도에는 흉년이 들었고 의정부의정 이근명이 공사현장을 보며 고종에게 “병정들이 소와 말을 빼앗고 재물을 노략질하며 부녀자들을 겁박하고 있다. 잡세가 번다해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이나 된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고종은 이렇게 답했다. “여전히 그렇다고? 그중에는 반드시 올바른 세금(正稅·정세)도 있을 것이다.”라 했지만 이근명은 (잡세는 예전에 다 폐지 하라고 하교 하셨다.) 지금 세금중에 균역세(均役稅) 빼고 다 잡세인데요? 라며 반문 했으나 사뿐히 씹고 풍경궁 공사 관리들을 포상했다. [12]

풍경궁을 짓는 와중에 덕수궁 중화전도 완공했다. 당시 경기도의 백성들은 인조의 능 장릉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보다 못한 고종이 내탕금 50만 냥을 풀어서 구제하라고 했으나 궁궐짓는 것은 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저렇게 혈세를 들인 풍경궁 공사는 러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중단되었고 끝내 미완의 궁궐로 남고 말았다.[13]

알렌은 1904년 경에는 완전히 마음 속으로 고종을 손절하고 그를 이렇게 여기고 있었다.
'이 나라의 거대한 해충이 되어있고, 저주의 대상이 되어있다. ... 로마 제국이 불타고 있는 동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네로 황제처럼 무희들과 노닥거리고 있다.'
라며 네로급 암군으로 혹평했다. 돌아가면서는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한국 황제같은 인종은 처음 봤다."며 무지막지하게 비판했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화재 발발 며칠 뒤에 이하영 대신이 말하기를, 황제가 "궁궐을 다시 짓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벨 것"이라는 결단을 천명했으며 다른 조카[14] 이재완(李載完)이 고종에게 다시 짓는 것보다 일단 창덕궁로 옮기자고 제안했는데 고종은 몹시 격노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으로 “내가 죽거든 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 화를 냈다고 한다. 이렇게 계속 지은 덕수궁 건물들은 고종의 명으로 경복궁 전각을 훼손하면서 자재를 재활용하고 1910년 합일합방 후에 완공한다.

순종도 고종 이상으로 낮게 평가했는데, 알렌의 일기에서는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것은 알렌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서 널리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순종의 지능은 알 수 없으나, 고종이 퇴위 전에도 순종은 서른이 넘었으나 어떠한 정치적 의견이나 입지도 없었고 아무도 순종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튼 알렌은 이렇게 말년의 고종이나 순종에 실망했기 때문에 조선의 망국이 확실시된 후에는 더 이상 크게 관여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살았다.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의사로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으로는 아내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과 1남 1녀가 있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철자로 인해 '호레이스'로도 알려져 있으나 해당 이름의 영어 발음은 [ˈhɒɹəs~ˈhɔɹəs\]로, '호러스'가 실제에 더 가깝다.[2] 다른 하나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조선기독대학(경신학교 대학부)-연희전문학교.[3] 이후 세브란스 병원 및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이어져 연희대학교와 통합 과정을 거쳐 연세대학교가 된다.[4] 다만 이에 대해서는 연세의료원서울대학교병원 사이에 정통성 논란이 있기도 했다. 제중원 정통성 논란 문단 참조.[5]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세브란스 병원.[6] 뮐렌도르프는 독일인인데다가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공식 관리였기 때문에 건드리기가 어려웠다.[7] 다만 당시 조선은 1883년부터 발행된 당오전의 영향으로 1881년에 6.5냥이던 쌀1섬이 1884년이면 14냥으로 뛴다. 당연히 쌀 가격만 올라갔을리 없으니 갑신정변 이전에 고종과 민비가 매관매직하던 시절의 화폐가치로 이 10만냥을 가늠할 순 없다. 당장 알렌 본인이 1884년에 서울에 산 집의 집값을 기록한게 45만냥이다.[8] 원세개는 총영사 직위로 파견되었지만 스스로 총독 행세를 하며 다른 외교관들이 궁문에 내려 걸어가는데 비해 고종 앞에까지 가마를 타고 다니며 폐위협박까지 할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9] 해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어가 유창하고 한문을 독학으로 깨우친 데다가 조선어를 조금 할줄 알았기 때문에 보빙사 일행을 수행했고, 보빙사에서 포크 소위의 동행을 요구했기에 해군없는 조선에 해군무관으로 파견된다.[10] 링크에선 1913년부터 가능한데 1913년 기준 3.6억 달러, 1920년 기준 1.8억 달러, 1930년 기준 2.1억 달러, 1936년 기준 2.6억 달러이다.[11] 지구상에 금은 한정적인데 수요가 많아서 19세기에는 1톤당 5그램 정도 까지 가던 금광 채산성이 점점 낮아져 현재에는 톤당 2.5그램 까지 채굴하고 있다.[12] 1903년 12월 10일 《고종실록》 기사.[13] 지어놓은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자혜의원으로 재활용되었다. 6.25 전쟁 때 불탔고 현재 그 자리에는 평양의학대학이 들어섰다.[14] 실제로는 사촌동생.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아들이다.[15] 인터넷 백과에도 보통 알렌이 설립했다고 나와 있는데 정작 제중원 문서에는 아니라고 적혀 있다. 일반적으로는 알렌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광혜원을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서울대학교병원 측에 따르면 제중원은 엄연히 국립(당시에는 왕립) 기관으로 선교회는 위탁 운영만 했지 소유권은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고로 설립자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단 고용되어 초대원장을 지낸 운영자인 것은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