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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국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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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국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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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colbgcolor=#b31c31><colcolor=#fff> 소재지 한성부 서부 황화방 정동
상급기관 미국 국무부
공사관 설립 1883년
공사관 폐쇄 1905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2호
미국공사관
美國公使館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83 (정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근대정치국방 / 외교
수량 / 면적 건물 1棟
지정연도 2001년 4월 6일
시대 1883년 (고종 20년)
파일:구한말 미국공사관.png
<colbgcolor=#131230> 19세기 말 ~ 20세기 초 즈음의 미국공사관[A]
파일:현재 미국공사관.png
미국공사관의 현재 모습[3]
1. 개요2. 역사3. 역대 공사 / 총영사 (1883 ~ 1905)4. 건물5. 여담
5.1. 고종의 미관파천(美館播遷) 시도
6. 매체에서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미국의 옛 공사관이다.

2. 역사

1883년(고종 20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은 서양 국가 최초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미국 정부는 첫 공사로 루시어스 하워드 푸트를 파견했다. 푸트 공사 일행은 자신들이 머물고 근무할 공사관한성에 설치했다. 처음에는 잠시 박동의 묄렌도르프 집에 두었다가 통역관 윤치호 등에게 새 공사관 부지를 알아보게 했고, 곧 정동에 있는 민계호, 민영교(명성황후의 친족들)의 집을 2,200달러에 사들여 그곳으로 옮겼다. 민계호 집은 건물 125칸, 빈 공간 300칸, 민영교 집은 건물 140칸, 빈 공간 150칸 규모였으며 이외에도 주변 가옥을 몇 채 더 매입해 미국공사관 영역을 조성했다.#
파일: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png
<colbgcolor=#131230> 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A]
파일:수옥헌과 미국공사관.png
1899년에 아펜젤러가 촬영한 경운궁 수옥헌(맨 왼쪽)과 미국공사관(맨 오른쪽).
맨 왼쪽의 흰 탑이
러시아공사관이다.
서양 외교공관 중 처음으로 생긴 미국공사관의 정동 입주를 계기로, 정동은 한성서양인들의 터전이 되어갔다. 1897년(건양 2년)부터 고종이 인근의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거주했고, 점점 경운궁의 영역을 넓히면서 미국공사관은 경운궁에 둘러싸인 모습이 되었다. 1900년(광무 4년) 즈음에 부분적으로 개수했고, 실내도 고쳐지었다. 그리고 행랑도 만들었다.
파일:구한말 미국공사관2.png
<colbgcolor=#131230> 19세기 말 ~ 20세기 초 즈음의 미국공사관[5]
미국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 공사관들과 차이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처음부터 단교 때까지 쭉 한옥이었고 자리도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조선전통을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조선 주재 미국 외교관들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편한 양옥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본국에서 지원을 적게 해줬기 때문에 짓지 못했다. 정동공사관을 마련한 첫 미국공사 푸트는 미국 정부서양식 건물을 짓기 위해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에서는 자금을 주지 않았다. 푸트가 이유로 든 것이 ‘모자가 천장에 닿는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국무장관은 ‘실내에서 모자를 안 쓰는 것이 조선 풍습으로 안다’고 답하며 거절한 것. 표면적인 이유는 저렇지만 미국이 조선에 큰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실내에서 모자를 벗는것은 정작 서양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관습은 실내에서도 의관을 정제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어전회의에서 신하들이 사모를 벗던가? 따라서 진짜 이유는 미국 의회에서 조선의 가치를 매우 낮게 보고 "납세자의 세금을 조선 공사관 같은 필요없는 곳에 쓸 수 없다." 고 지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옥을 수리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푸트 공사는 사비로 사들인 공사관 대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의회의 공사관 운영비 지출 거부와 더불어 공사 직위가 총영사 내지 변리공사로 강등당했다. 이에 그는 갑신정변을 핑계로 제물포로 런한 다음 그길로 사퇴했고, 공사관 수장의 급은 총영사 대리로 낮아져 고작 해군소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가 혼자서 운영하는 막장상황에 이르렀다. 재정난이 심해 사퇴한 푸트 공사보다 월급도 5분의 1에 불과한 소위급 박봉으로 포크는 조선인을 고용하고, 정보 수집 보고를 훌륭하게 해냈다고는 한다.

한옥 청사에 대한 공사관 직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선교사, 의사 출신 호러스 뉴턴 알렌 공사는 자신들의 공사관이 다른 나라 공관보다 초라한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고, 이에 대해 자신의 책 《조선의 이모저모(Things Korean)》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른 열강들은 각자 자신들의 대표자가 살 곳으로 미국공사관보다 훨씬 더 허세부린 건물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한때 조선 고관이 살던 진기한 모양의 아름다운 방갈로를 계속 사용했다. ...(중략)... 광활한 잔디밭이 있고 나무가 우거진 넓은 부지가 있어서 편하고 예술적인 거주지를 만들었지만, 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가 세운 큰 건물에 비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후략)...
반면 궁내부 찬의관 겸 외부 고문을 지냈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만족스러워 했고, 자신의 회고록인 《비외교적 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 이렇게 써두었다.
미국공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편한 곳 중 하나이다. 다른 공사관, 영사관 건물들은 유럽건축물을 본떠 지은 것들로 칙칙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이밖의 다른 공관들은 한옥을 고쳐 지은 것이었으며, 한옥은 고치기 매우 편리한 구조였다. 그것은 잘 다듬은 화강암 기초 위에 튼튼하게 세운 건물이었다. 벽은 진흙 또는 벽돌이어서 기후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으며, 육중한 참나무나 밤나무 대들보로 받친 지붕은 수 톤의 흙으로 채워서 높이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놓아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강추위가 침범하지 못했다. ...(후략)...#
파일:앨리스 방한 당시 미국공사관.png
<colbgcolor=#131230> 1905년에 주 대한제국 미국공사관을 방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큰딸 앨리스 루스벨트[6]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제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한국과 미국국교는 끊겼다. 당시 미국일본에 굉장히 우호적이었고 이미 그해 7월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을 인정했다. 그래서 을사늑약 직후 제일 먼저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파일:미국영사관 정문.png
<colbgcolor=#131230> 일제강점기 주 경성 미국영사관 정문[7]
옛 미국공사관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까지 주일미국공사관 소속 주 경성 영사관으로 기능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미국이 일본의 적대국이 되자, 영사관 피해가 우려되어 경성 주재 미국영사관은 중립국인 스위스 국기를 내거는 보호조치를 해서 전쟁 중 일제에게 피해를 입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8.15 광복 후에는 미국 국무부에서 직원들의 합숙소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에 한국미국재수교했고 구 공사관은 주한미국대사관저로 쓰였다. 다만, 대한제국 시기처럼 대사관과 관저가 같은 영역에 있지는 않았다. 주한미국대사관을지로 옛 미쓰이물산 경성지점 건물로 옮겨갔다.[8] 이후 대사관에 대한 내용은 주한미국대사관 문서 참조.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하여 주한미국대사관저는 북한군의 공습과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당하지는 않았고, 서울 수복 후 복구하여 대사관저의 기능을 회복했다.
<colbgcolor=#131230> [[주한미국대사관|{{{#fff 주한미국대사관}}}]]{{{#fff 에서 제작한 미국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영상'''}}}
1976년 5월에는 정동 대사관저 부지 내에 현대건축기법으로 지은 새로운 한옥 관저를 지었다. 1974년 처음 신축 계획할 때 미국 국무부에서는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필립 찰스 하비브 (Philip Charles Habib)가 아주 강력하게 한옥으로 짓기를 주장했다고. 그래서 새 관저의 별칭이 하비브하우스(Habib House)이다. 단, 완공할 때 하비브 대사는 이미 물러나있었다.[9]

1976년에 새로 지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비브 하우스 문서 참조.
파일:보수전 미국공사관.png
<colbgcolor=#131230> 보수 전 미국공사관[10]
이후 기존 대사관저는 게스트하우스, 영빈관으로 쓰였다. 2001년 4월 6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받았고, 2003년부터 2004년에 복원, 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3. 역대 공사 / 총영사 (1883 ~ 1905)

※ 임기 시작일은 취임일을 기준으로 한다.
행정부 이름 임기 시작일 임기 종료일 지위
체스터 A. 아서 루시어스 하우드 푸트
(Lucius Harwood Foote)
1883년 5월 20일 1885년 2월 19일 특명전권공사
그로버 클리블랜드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
1885년 1월 1886년 6월 12일 총영사 대리
윌리엄 하워 파커
(William Harwar Parker)
1886년 6월 12일 1886년 9월 3일[11] 변리공사 / 총영사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
1886년 9월 3일 1886년 4월 13일 대리공사
휴 앤더슨 딘스모어
(Hugh Anderson Dinsmore)
1887년 4월 13일 1890년 5월 26일 공사
벤저민 해리슨 어거스틴 허드 2세
(Augustine Heard II)
1890년 5월 26일 1893년 6월 27일 공사
그로버 클리블랜드 존 매험 베리 실
(John Mahelm Berry Sill)
1894년 4월 30일 1897년 9월 13일 공사
윌리엄 매킨리 호러스 뉴턴 알렌
(Horace Newton Allen)
1897년 9월 13일 1901년 10월 1일 공사
시어도어 루스벨트 1901년 10월 1일 1905년 6월 9일 특명전권공사
에드윈 버넌 모건
(Edwin Vernon Morgan)
1905년 6월 26일 1905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4. 건물

5. 여담

5.1. 고종의 미관파천(美館播遷) 시도

고종은 1894년(고종 31년)부터 약 10년 간 미국공사관으로 파천을 시도했었다. 결과적으로는 다 실패했다.

첫 시도는 청일전쟁 직전에 했는데 무산되었다. 그리고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번 더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하려다 실패했다. 이것이 춘생문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그 이듬해인 1896년(건양 원년)에는 미국공사관 대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러시아 외교관들과 친러파가 도리어 고종을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전임연구원 장경호에 따르면, 러시아에 부담을 느낀 고종은 덕수궁 환궁 전후로 해서 더욱 미국 의존도를 더욱 높였고,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할 의도를 비공식적으로 몇 번 내비쳤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런 정황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경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12]
(전략) 특히 황제우리 공사관으로 오고 싶어합니다. 저는 황제가 다른 열강들을 불신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보호처를 말해줄 수 없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 언급했습니다. (중략) 황제는 지금 그가 여기로 영구히 파천해 온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소위 "왕립도서관"이라는 것을 우리 공사관 옆문에 설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미국인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제가 그린 "왕립도서관"을 참조하십시오. 저는 황제가 위험이 닥치면 이 도서관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략)
1897년 10월 13일에 알렌 공사가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13]
저 편지에 의하면, 미국공사관 행이 좌절되자 고종은 차선책으로 미국공사관 바로 옆에 임시 피난처 개념으로 왕립도서관을 세웠다. 그 곳이 을사조약을 체결한 장소로 유명한 중명전이다.

대한제국을 수립한 후에도 파천 시도는 이어져서, 1897년(광무 원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고종은 다시 미국공사관으로 가려 했으나 전부 거절당했고 심지어 러일전쟁 시기에도 다시 파천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14] 러일전쟁이 막바지이던 1905년(광무 9년)에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자 고종은 또 다시 미국공사관에 파천 요청을 하지만 알렌은 거부했고, 본국에 "고종의 행실로 보아 억지로 담을 넘어 올수도 있으나 그 경우에는 단호히 퇴거 조치를 하겠다"고 보고 할 정도로 고종을 부담스러워했다. 알렌의 일기를 보면, 고종이 공사관과 덕수궁 사이의 땅을 미국 측에 기부한 일을 두고, "고종이 유사시에 그 땅을 도주로로 활용하려 한 걸 알아채지 못했다."고 매우 후회할 정도로 여러 번의 파천 요청에 대해 매우 난감해했다.

6. 매체에서

7. 같이 보기


[1] 공사관은 영어로 Legation이라고 하며, 공사는 Minister라고 한다.[A] 사진 출처.[3] 사진 출처 - 《경향신문》.[A] [5] 사진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6] 사진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7] 사진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8] 1968년 주한미국대사관세종대로 현재 자리로 옮겨간 후 미국문화원이 되었다가 현재는 그레뱅 뮤지엄으로 쓰이고 있다.[9] 완공 당시 대사는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Lee Sneider).[10]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1] 부임 중에 객사한 것은 아니고, 워낙 술고래에 술주정도 심했던 터라 본국에서 소환시켰다고(...).[12] 장경호,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 《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p.181 ~ 182.[13] 장경호,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 《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182.[14] 장경호,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 《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p.194 ~ 195.[15] 화가 김기창이 살았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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