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국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The Residence of the U.S. Ambassador to the Republic of Korea (Habib House) | |
<colbgcolor=#131230>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83 |
건축일 | 1974년 (착공) 1976년 (준공) |
종류 | 대사관저 (공관) |
관리기관 | 미합중국 국무부 주한미국대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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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한미국대사관 하비브 하우스 소개 영상 |
외교공관이기에 타국 대사관저처럼 대한민국 경찰청이 경비를 서고 있지만,[1] 한미관계의 중요성으로 인해 주한미국대사관에 버금가는 가장 높은 수준의 보안을 자랑한다.
2. 역사
2.1. 조선말기~대한제국
1883년(고종 20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은 서양 국가 최초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미국 정부는 첫 공사로 루시어스 하워드 푸트를 파견했다. 푸트 공사 일행은 자신들이 머물고 근무할 공사관을 한성에 설치했다. 처음에는 잠시 박동의 묄렌도르프 집에 두었다가 통역관 윤치호 등에게 새 공사관 부지를 알아보게 했고, 곧 정동에 있는 민계호, 민영교(명성황후의 친족들)의 집을 2,200 미국 달러에 사들여 그곳으로 옮겼다. 민계호 집은 건물 125칸, 빈 공간 300칸, 민영교 집은 건물 140칸, 빈 공간 150칸 규모였으며 이외에도 주변 가옥을 몇 채 더 매입해 미국공사관 영역을 조성했다.#1880년대 후반 미국공사관# |
1899년에 아펜젤러가 촬영한 경운궁 수옥헌(맨 왼쪽)과 미국공사관(맨 오른쪽). 맨 왼쪽의 흰 탑이 러시아공사관이다. |
19세기 말 ~ 20세기 초 즈음의 미국공사관# |
2.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주 경성 미국영사관 정문# |
2.3. 광복 후
해방 이후, 한국에 미 군정청이 주재하면서 옛 미국공사관 건물은 미 국무부 직원들의 합숙소로 사용하였고, 1949년에 공식적인 주한미국대사관저로 지정되었다.하지만, 6.25 전쟁으로 인하여 주한미국대사관저는 북한군의 공습과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아, 서울 수복 후 복구하여 대사관저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 100년 가까이 사용해오던 미국대사관저는 건물의 노후화로 새로운 대사관저의 신축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74년에 한국 건축의 명장인 조자용, 신영훈등 한국 건축가와 미국 정부에서 파견한 건축 인력이 협심하여 새로운 대사관저를 지었고, 1976년 5월 18일에 새 대사관저가 준공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하비브 하우스는 주한미국대사의 사저로 역할을 하고 있고, 때때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관저 개방 행사를 열고 있다.
3. 시설
4. 사건사고
4.1. 1989년 서총련 대학생 관저 점거 및 방화미수 사건
1989년 10월 전대협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서총련) 소속 반미구국결사대를 구성한 대학생들이 나서서 자행한 대사관저 점거 및 방화 미수 사건. 이 사건의 핵심 가담자가 훗날 더불어민주당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정청래인데 당시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정청래 외에 이선홍, 이대준, 심상오 등 학생 총 6명이 사건에 가담했다.1989년 10월 13일 정청래를 비롯한 학생 6명은 새벽 6시 25분경 대사관저 담장을 넘어서 침입해 사제폭탄을 터뜨렸다. 이후 쇠파이프를 휘둘러서 대사관저 현관 유리창을 부수고 응접실로 침입한 뒤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 액자도 파손했다. 그 후 관저 내 집기를 바리케이드로 삼아서 노태우 대통령 방미 반대, 도널드 그레그[2] 주한 미국대사의 추방, 농산물 수입 개방 압력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나섰다.
대사관 측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학생들을 체포하려고 하자 학생들은 관저 바닥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불이 붙지는 않았는데 그동안 대한민국의 운동권 대학생들이 툭하면 미국문화원과 미국대사관 등 미국 관련 시설에 불을 질렀던 전과가 있었기에 미국대사관 측이 관저 거실 바닥을 불연내화재로 만들면서 불이 안 붙었다. 학생들은 마지막까지 항거하는 과정에서 경찰을 향해 사제폭탄을 던졌으나 이 폭탄마저 터지지 않아서 방화에 이어 폭탄 테러도 미수로 끝났다.
결국 관저 침입 후 50분 정도가 지난 오전 7시 15분경 관저 침입 학생 전원이 검거돼 서울남대문경찰서로 연행됐고 모두 구속됐다. 핵심 가담자인 정청래는 재판 결과 징역 6년 자격정지 2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1992년 출소했고 1995년 김영삼 정부의 특별사면 때 복권됐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4번에 걸쳐 서울 마포구 을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인 생활을 하고 있다.
세월이 훌쩍 흘러 2024년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 사건이 다시 언급된 바 있는데 서울 마포구 을 지역의 선거 매치업을 두고 조선일보가 정청래 의원을 '대사관 방화범'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정 의원과 맞붙게 된 함운경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은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도한 인물인데 두 사람을 붙이면서 "'美문화원 점거' 함운경 vs '美대사관 방화' 정청래…운동권 大戰"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에 정청래 의원은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조선일보사와 해당 기자를 상대로 고소했다. 그러자 조선일보 측은 해당 기사의 제목을 수정했다.
4.2. 2019년 대진연 무단침입 사건
자세한 내용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문서 참고하십시오.국내 대표적인 반미 단체인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트럼프 행정부의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인상 요구에 대한 반발로 2019년 10월 18일에 미국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 담장을 넘어 침입, 관저 내부에서 기습 시위를 하였다. 당시 관저를 경비하는 경찰이 있었으나, 주한미국대사관 본관과 달리 경비 병력이 적어, 갑자기 몰려드는 시위대가 담장을 넘는 것을 모두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침입한 대학생 12명은 집시법 위반 및 공동주거침입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그중 4명이 구속되었다. 이후 경찰은 미 대사관저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이후 국회는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민갑룡 경찰청장에게 대사관저를 경비하는 경찰의 부실한 대처를 질타하였다.
대사관저 침입사건 당시 대사관저 영내에서 침입을 저지하고 있던 와중에 미 대사관 직원 2명이 경상을 입었고,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는 이들의 헌신에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