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황제에 대한 내용은 광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사쿠라 대전'의 '광무'에 대한 내용은 영자갑주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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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8. 17. ~ 1907. 8. 2. (9년 11개월 17일) |
1. 개요
대한제국 고종 34 ~ 44년 시기의 연호.1897년 8월 17일, 고종은 칭제건원을 하며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국호를 대조선국에서 황제의 국가라는 뜻의 제국을 붙여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고치고, 동아시아에서는 원칙적으로 황제만이 쓸 수 있던 연호를 독자적으로 정했는데, 이를 건원(建元, 연호를 세우다.)이라 한다. 연호를 정한다는 건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대내외에 황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이미 1894년에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건양(建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건원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일이 일본에게 책이 잡혀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1907년 7월 19일에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 뒤인 8월 3일에는 연호를 융희(隆熙)로 바꾸었다. 이로써 광무 연호는 10년에서 약 보름 모자란 9년 11개월 17일 동안 사용되었다.
2. 상세
고종의 명으로 의정부에서 새 연호를 논의하여 의정 심순택이 후보로 '광무(光武)'와 '경덕(慶德)' 2가지를 올렸고, 고종이 이 중에 광무를 고름으로써 새 연호를 정하게 되었다(1897년 8월 14일).흔히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면서 쓰인 연호로 알기 쉬우나, 대한제국 선포일은 같은 해 10월 12일이므로 정확히는 조선과 대한제국에 걸쳐 쓰인 연호이다. 고종이 이 연호를 마음에 들어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는데, 묘하게도 칭제건원 후 고종은 무력(군사력) 증강에 자기 나름대로 예산을 쏟으며 이런저런 노력을 했다. 이러한 정책은 그가 꿈꿔온 황권 강화의 일환이었다. '광무'는 후한의 중흥 군주 광무제(光武帝)[1]의 시호이기도 했다.
3. 주요 사건
- 광무 원년(1897년, 고종 34년)
-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하였다.
- 10월 11일: 광무개혁이 단행되었다.
-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그리고 1895년에 일본에 의해서 시해된 고종의 왕후 민씨가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사후 책봉되었다. 고종 사후에 고종태황제(高정해지면서 명성황후는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가 되었다.
- 광무 2년(1898년, 고종 35년)
- 1월 27일: 대한제국에서 전차, 전기, 전화 사업을 담당할 한성전기회사가 미국과 합작으로 설립되었다.
- 2월 13일: 경운궁 태극전(太極殿)을 중화전(中和殿)으로 개칭하였다.
- 5월 29일: 명동성당(당시 명칭은 종현성당)이 착공 6년 만에 준공되었다.
- 6월 30일: 보부상단체 황국협회가 설립되었다. 1883년 설립된 기존의 혜상공국은 이에 흡수되었다.
- 8월 10일: 민족 신문인 제국신문(帝國新聞)이 이승만과 이종일(李鍾一), 유영석에 의해 창간되었다.
- 9월 5일: 남궁억과 장지연 등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였다.
- 10월 2일: 미국인 감리회 선교사 조세핀 캠벨 여사가 서울에 캐롤라이나 학당[2]을 설립했다.
- 10월 29일: 독립협회가 주관하고 박정양 등 개혁적 관료들이 참관한 최대의 만민 공동회인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헌의 6조가 발표되었다.
- 11월 2일: 중추원 신 관제가 반포되었다. 고종이 지명한 25명, 민선의원 역할을 하는 독립협회 회원 25명이 선출되어 입헌군주제식 의회 정치가 시도되었다.
- 11월 5일: 만민 공동회가 만들어졌다.
- 12월 28일: 독립협회가 해산되었다.
- 광무 3년(1899년, 고종 36년)
- 광무 4년(1900년, 고종 37년)
- 1월 1일: 만국우편연합 공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 4월 10일: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서울 종로에 처음으로 민간인 사용 전등을 설치했다.(3개)
- 7월 5일: 한강철교가 개통되었다.
- 7월 15일: 한성부와 인천부 간에 시외전화가 개통되었다.
- 8월 20일: 경부선이 기공되었다.
- 광무 5년(1901년, 고종 38년)
- 광무 6년(1902년, 고종 39년)
- 광무 8년(1904년, 고종 41년)
- 2월 8일: 일본군 연합함대가 뤼순항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같은 날 제물포 해전이 벌어졌다.
- 2월 10일: 일본 제국이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 2월 12일: 러시아 제국과 단교했다.
- 2월 23일: 일본군이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제조인시켰다.
- 4월 9일: 부산에서 첫 기상 관측이 시작되었다.
- 4월 10일: 인천에서 첫 기상 관측이 시작되었다.
- 4월 14일: 경운궁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인은 함녕전 온돌기구 교체 공사 중 바람을 타고 불이 궐내로 번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부에서는 고종을 시해하려는 일본 제국의 자작극과 1년 후 을사조약이 오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있다는 추측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년 후 바로 이 장소에서...
- 4월 28일: 목포에서 첫 기상 관측이 시작되었다.[5]
- 8월 20일: 매국노 송병준을 필두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집단 일진회가 세워졌다. 후에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의 성과로 해체된다.
- 광무 9년(1905년, 고종 42년)
- 5월 5일: 이용익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 5월 12일: 춘정 엄주익이 순헌황귀비 엄씨의 지원을 받아 한성부 도렴동에 양정의숙이라는 이름으로 법학과를 창학했다.
-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이 일본 제국에게 패배하였다.
- 7월 29일: 미-일 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어 양국이 대한제국과 필리핀을 각각 식민지로 삼게 되었다.
- 9월 5일: 러-일 간에 포츠머스 조약이란 이름의 강화조약이 맺어지며 러일전쟁이 종전되었다.
- 11월 5일: 경의선이 개통되었다.
- 11월 17일: 한-일 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 11월 30일: 민영환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노하여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
- 광무 10년(1906년, 고종 43년)
- 2월 1일: 일본 제국이 한성부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했다.
- 2월 11일: 한반도 첫 야구경기가 열리다. 황성 YMCA 야구단과 덕어학교가 맞붙었고 덕어학교가 승리를 거두었다.
- 4월: 1905년 해산된 헌정 연구회를 이어받은 자강운동,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가 설립되었다.
- 4월 21일: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에 의해 진명여학교가 설립되었다.
- 5월 22일: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에 의해 명신여학교[6]가 설립되었다.
- 7월 13일: 토지가옥증명규칙 시행
- 7월 22일: 이인직이 만세보에 혈의 누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 9월 5일: 충숙공 이용익에 의해 보성중학교[7]가 설립되었다.
- 10월 15일: 대구광역시 최초의 근대적 학교 계성학교가 설립되었다.
- 광무 11년(1907년, 고종 44년)
- 1월 1일: 평양에서 첫 기상관측이 시작되었다.
- 1월 2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평양, 개성, 서울, 목포 등지로 확산되었고 1907년 1월에는 '평양 대(大) 부흥'으로 발전했다. 대부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수많은 샛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물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듯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결집된 것이었다.
- 1월 31일: 대구에서 첫 기상관측이 시작되었다.[8]
- 2월 10일: 경북대학교병원의 전신인 대구동인의원이 개원 하였다.
- 2월 21일: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 5월 22일: 이토 히로부미의 압력에 의해 이완용 내각이 성립되었다
- 6월 24일: 헤이그 특사가 파견되었다.
- 7월 14일: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열사가 순국하였다.
- 7월 20일: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4. 연보
연도 대조표 | |||
광무(光武) | 육십갑자 | 서력기원 | 비고 |
당해 8월 17일부터 원년 고종 34년 | 정유(丁酉) | 1897년 | 고종, 광무 연호 개원 및 대한제국 선포 |
2년 고종 35년 | 무술(戊戌) | 1898년 | |
3년 고종 36년 | 기해(己亥) | 1899년 | |
4년 고종 37년 | 경자(庚子) | 1900년 | |
5년 고종 38년 | 신축(辛丑) | 1901년 | |
6년 고종 39년 | 임인(壬寅) | 1902년 | |
7년 고종 40년 | 계묘(癸卯) | 1903년 | |
8년 고종 41년 | 갑진(甲辰) | 1904년 | 러일전쟁, 한일의정서 |
9년 고종 42년 | 을사(乙巳) | 1905년 | 을사조약 |
10년 고종 43년 | 병오(丙午) | 1906년 | |
11년 고종 44년 당해 8월 2일까지. 이후 융희 원년 | 정미(丁未) | 1907년 | 헤이그 특사사건, 고종 퇴위, 차남 이척 즉위(순종) |
5. 광무 연호를 딴 것
- 광무대(光武臺) : 1898년부터 1930년까지 오늘날의 을지로 5가에 있던 극장이자 공연장.
6.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1] 《후한서》에 따르면 한 왕조를 부흥시켰다는 뜻에서 광(光), 환란을 평정하였다는 뜻에서 무(武)의 문자를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2] 오늘날 배화유치원, 배화여자중학교,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대학교의 전신[3] 현재 존재하는 제물포역과는 이름만 같은 역이며, 현재 인천역이 해당 역을 계승하고 있다.[4]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한 여권을 소지한 이민을 말한다.[5] 다만 연속성이 보장되는 관측은 1906년 1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6] 지금의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중학교[7] 지금의 서울 보성고등학교와 보성중학교[8] 다만 처음에는 띄엄띄엄 관측하는 정도로 시작되었으며, 본격적인 관측일은 1909년 1월 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