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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5:54:23

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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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차관 도입2.2. 대한제국 재정 상황
3. 과정
3.1. 대구 광문사의 건의서3.2. 전국으로의 확산3.3. 일본의 방해
4. 참여세력
4.1. 자본가 및 지식인4.2. 평민4.3. 정부4.4. 여성4.5. 언론사
4.5.1. 대한매일신보
4.6. 기타
5. 결론6. 국채보상운동 기록물7.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8. 같이보기

1. 개요

국채보상운동()은 일본 제국대한제국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국민들이 상환을 주도한 운동이다. 1907년 2월 2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윤필오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대중들의 크나큰 호응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발빠르게 번져나갔다. 여러모로 약 90년 후(1997년~1998년경) 외환위기 당시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과 닮은 점이 많다.

2. 배경

2.1. 차관 도입

1904년 한일의정서의 강제 체결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방법으로 높은 이자를 가지고 있는 차관을 들여오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는 1905년 1월 화폐정리 자금으로 일본의 제일은행으로부터 300만원을 빌려왔다. 1905년 6월에는 舊債(구채) 상환 및 국가 재정의 부족분 보충비로 일본에서 200만원의 국고증권채를 가져왔으며, 일본 제일은행으로부터 150만원 상당의 금융자금채를 샀다.

한편 1906년 통감으로 온 이토 히로부미는 소위 시정 개선을 표방하고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재정이 필요하다면서 그해 3월에 일본으로부터 1,000만원의 차관을 빌리도록 주선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본 흥업은행으로부터 1000만 원의 기업 자금을 차관으로 빌렸다. 차관 조건은 이율 연 6푼5리의 고리에 5년 거치 후 5년간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그나마 실제 수령액은 선이자를 뗀 900만원이었다.

국채보상운동에서 상환액으로 말해지는 국채 1,300만원은 위에 말한 화폐정리자금 300만원, 구채(舊債)상환비 200만원, 금융자금채 150만원, 기업자금 1,000만원 등 도합 1,650만원 중 실제로 들어 온 차관액 1,150만원과 그 이자를 말한다.

2.2. 대한제국 재정 상황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회계는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의 1년 총 수입의 1/3 이하 수준이 된 상황이었다. 여기에 내장원 수입을 포함한 수익 수단은 털어내고 빚만 늘린 메가타 다네타로의 작업으로, 대한제국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1년의 총 세입액이 13,189,300원이고, 세출액은 13,963,000원으로 세출 부족액이 773,000원이었다. 이와 같은 적자 예산으로 거액의 차관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의 국론이었고, 만약 이 거액의 국채를 상환치 못하면 우리 강토는 일본의 영유가 될 것이었다.

실제 1907년 4월 14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1,300만원 차관 용도 내역을 보면 300만 원은 각 은행과 회사에 분급하고, 170만원은 수도국과 위생 등에 쓰고, 100만 원은 일본 유학생 학비로 지급하고, 100만 원은 구전으로 주었으며, 630만 원은 불입금액이었다. 또한 한국인을 조사, 탄압하기 위한 경찰 기구를 확장하고 많은 일본인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의 인건비를 한국 정부가 부담해야 했다. 즉, 차관은 결국 일제의 침략 수단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고 국사편찬위원회의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얻어 온 차관은 시설 개선의 미명 아래 그네들의 사욕만을 채워 주었다." , "일본의 대한 차관은 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하려는 간책이다."라고 하였다.

3. 과정

3.1. 대구 광문사의 건의서

당시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에서 시작되게 되었다. 1907년 1월 29일 오전 경상북도 내 사람들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사인 광문사에서 특별회의가 열렸다. 이 날 회의의 주요 안건은 대구광문사의 문회를 대동광문회로 개칭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직후, 부사장 서상돈은 다음과 같이 건의서를 하나 제출하였다.
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 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 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 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서상돈이 이 건의서를 낭독하자, 참석했던 회원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로 찬성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이 자리에서 의기투합하여 즉시 모금할 것을 결의하고, 각 도마다 이러한 취지를 알려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전개해 나갈 것을 제안했다. 광문사 사장이던 김광제는 당장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자신의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버리고 3개월분의 담배 값에 해당하는 50전과 추가로 10전을 보태 60전을 출연하였다. 서상돈도 그 자리에서 800원을 출연하게 되었는데, 당시 쌀 한 말의 가격이 약 1원 80전 정도였으니, 서상돈이 출연한 800원은 쌀 약 450말 정도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다른 참석자들도 이에 호응하여 의연금을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무려 2천원이 모금되었다.

3.2. 전국으로의 확산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곧 전국민의 호응을 받아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을사조약의 늑결로 잠재되어 있던 민족적 항거 의식이 국채보상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형성됨에 따라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다.

1907년 2월 22일 대한자강회원 김성희, 광학서포 사장 김상만, 중앙서림 사장 주한영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는 등 서울에도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의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병염과 윤흥섭 등은 국채보상중앙의무사를 조직하고 의연금 납부처로 황성신문사를 정하였다. 황성신문에서는 1907년 2월 25일 '斷煙報國債(단연보국채)'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이 운동에 전국민이 참여하여 국채를 갚을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전국 3백여 고을에 반드시 대구에서만 이런 남자들이 나올 것이 아니요. 동포 2천만명에 반드시 서씨 등 몇 사람만이 이런 뜻과 기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믿는다. 이 기운이 한번 움직임에 따라 온 나라가 향응하여 장차 5종의 민족으로 모두를 우리 大韓人(대한인)을 숭배하여 20세기 오늘의 세계에서 대한제국의 聲價(성가)가 온 지구상에 환하게 비칠 것이다.
≪황성신문≫, 1907년 2월 25일, 斷煙報國債

1907년 4월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지도, 총괄하기 위한 통합기구로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소장; 한규설, 부소장: 김종한, 검사원: 양기탁)와 대한자강회 사무소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장: 이준, 부의장: 김광제, 위원장: 윤효정)를 설치하였다. 두 단체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의연금의 수합과 국민 지도라는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된 후에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을 목적으로 한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보상회가 조직된 지역을 각 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강원도: 춘천, 원주
경상도: 대구, 동래, 경남회, 마산, 창원, 청도, 상주, 성주, 의령, 부산(2곳), 경산, 현풍(2곳) 등
경기도: 안성, 수원, 포천, 강화, 장단 등
충청도: 대전, 보은, 청주, 옥천, 한산, 금산, 덕산, 영동, 진천, 공주, 제천 등
전라도: 전주, 광주, 진안, 장수, 군산, 장성, 정읍, 부안, 무장, 완도, 구례, 해남, 무주, 태인, 제주군 등
황해도: 수안, 재령, 은진, 안악, 은율, 옹진, 장연 등
함경도: 함흥, 원산, 흥원, 영흥, 경성 등
평안도: 평양, 정주, 통진, 용천, 중화, 철산, 의주, 태헌, 영유 등

경상도 지역에 특히 수합소가 많이 설립되었다. 그 다음이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경기도, 강원도의 순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민의 전폭적인 호응으로 모금이 시작된 지 3개월 뒤인 5월에는 약속된 모금액이 20만원에 달하였다. 그러나 1907년 말부터 모금은 크게 진척되지 않았다. 바로 일본 제국의 방해 때문이었다.

3.3. 일본의 방해

일본 제국은 국채보상운동이 시작한 직후부터 전국적으로 파급되기까지,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공작을 전개하였다. 국채보상 관련기구의 지도부에 압력을 가하였으며,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였다. 그 발행인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의 추방공작을 전개하였으며, 1908년에는 양기탁에게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구속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양기탁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908년 9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한편 일진회에서도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진회장 송병준은 1907년 4월 2일 대한자강회에서 열린 국채보상연합총회에 참석하여 "한국에 무슨 재정이 있어 거액 차관의 금액을 모을 수 있느냐. 일찌감치 자진 해산해야 할 것" 이라고 반대하였다.[2] 더욱이 "인민이 국채를 보상한다 하여 의연금을 모집함은 실로 애국사상은 가상하되 힘을 헤아리지 못함을 깨우치지 아니하고 수수방관한다" 면서 박제순 내각을 오히려 탄핵하려고 했다.[3]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받은 이후 지도부는 모금운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그때까지 모금된 의연금의 처리를 위하여 1909년 국채보상금처리회를 조직하였다. 처음에 윤웅렬이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그는 수락을 거부하여 유길준을 회장에 선임하였다. 처리회는 1910년 1월 사무소를 서울 중부 흥사단회관에 두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우선 의연금을 정확히 조사하여 한데 모으고자 하였다. 이에 각처 각 단체에서 보관 중이던 의연금이 처리회로 집결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모금된 금액은 대략 20만원 내외였던 것 같다. 처리회에서는 그 기금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그 이자로 교육사업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토지 매수를 시작한 것이 1910년 8월 24일부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국권피탈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10년 9월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개칭되었으며, 그곳에서 관리하였던 모금액 약 15만원마저 경무총감부에 빼앗기고 말았다.

실패한 또 다른 이유로는 처음부터 순수한 애국 충정에서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기 때문에 구심점 세력이 든든하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으며, 일본 제국은 이미 대한제국의 재정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원하는 만큼 대한제국에 차관을 도입할 수 있었다는 점도 실패 요인으로 꼽힌다. 국채보상운동으로 차관을 열심히 갚아주더라도, 일본의 주도로 대한제국 정부 예산을 확대 편성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일본 정부의 채권을 통해 충당하게 되면 다시 막대한 국채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세계 강대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지화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니,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출을 해준 것은 사실상 일본이 대한제국 명의로 일본 자기의 돈을 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참여세력

국채보상운동에는 고관이나 양반. 부유층 뿐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부녀자로부터 상인, 군인, 학생, 기생, 승려, 머슴, 걸인, 백정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었다.

4.1. 자본가 및 지식인

가장 주도적으로 운동을 이끌어 나간 사람들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특히 부유 상인층들은 일본 차관과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있는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에 인천, 부산, 원산, 평양의 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자료집(총5권)에는 약 8천여점에 이르는 그 당시 사료들이 원문 사진까지 첨부되어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 당시 실업가 및 지식인 층의 주요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4.2. 평민

본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집단이 바로 일반 평민이었다. 당시 평민들의 열광과 참여는 엄청난 수준으로 가히 범국민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의연금을 의연소로 이동시키던 중 도적떼를 만났는데 도적들이 눈 앞에 있는 재물들이 국채 보상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손대지 않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까지 모조리 던져주고 간 유명한 실화도 있을 정도다.

평양의 기생 31명도 '비록 천업이지만 국민된 의무는 일반'이라면서 의연금 32원을 냈다.[4] 서울의 인력거꾼 23명은 25전씩 합계 5원 75전을 냈다.[5]대구에서는 걸인들도 의연금을 냈다.[6] 회양군의 빈한한 농부는 농우를 팔아 10원을 의연하였다.[7]

4.3. 정부

황제와 정부대신들도 금연을 하고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고종은 1907년 2월 26일 “신민이 나라를 근심하여 이런 일을 하는데 짐이 어찌 모른 척 하겠느냐”면서 궁중에서도 담배를 끊도록 하였다. 황제의 칙어를 접한 전 참정대신 김성근대한매일신보에 100원을 의연하였으며, 한규설과 민영소, 심상훈 등 정부 대신들은 1907년 2월 27일 모여 김광제와 서상돈이 작성한 내용을 모방하여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사를 비롯하여 보성관과 광학서포, 청년학원사무소 등 8개소에 수합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고관들의 참여는 평민들에 비해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한 鄭喬(정교)(1856-1926)는 대한계년사에서 이르기를 "땔나무를 팔고, 품을 팔아서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고관대작들은 모금에 소극적였다"면서 특히 송병준 등은 오히려 이를 극력 배척하였다고 적고 있다. [8] 대한매일신보에서도 걸인들도 일제히 의연금을 내는데, 오히려 서울의 부자들의 기부가 없고 의연금 액수가 송곳 끝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적다고 비판하였다.
대구에서 걸인들이 일제히 출의하엿스니 대한 인민에 애국사상이 뇌수에 점입함은 推此可知나 경성내 富客은 隨力出義가 尙此寥寥하니 錢客鐵額은 錐末이 不入이로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6일, 잡보.

또한 초기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고관들이 활동을 거부하는 사태도 있었다. 국채보상연합회의소 부소장을 지낸 김종한일진회에 가입하였으며, 윤웅렬은 '국채보상금반환청구서'를 제출하는 반민족적인 행위를 하였다.[9] 김종한은 1910년 친일단체 정우회 총재가 되면서 총독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윤웅렬 역시 1910년 남작을 받은 인물이다.

4.4. 여성

이 운동에는 특히 여성의 참여가 눈에 띈다. 대구의 부인들이 1907년 1월 11일 은지환을 의연하면서 '경고문'을 대한매일신보에 한글로 발표하였다. 이 기사를 본 이준의 부인은 국채보상부인회사무소를 대안동 김규홍 판서댁에 설치하고 1907년 3월 15일에 국채보상부인회 취지서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하였다.

서울에서는 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원일부인회 등 부인단체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부산에서는 좌천리에서 감선의연회를 조직하여 매일 살림을 조금씩 절약하여 국채 상환에 보태자고 하였다.[10] 진남포에서도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가 결성되어 패물을 모아 보상금으로 냈다. 평양에서의 여성 국채보상운동은 기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평양 기생 18명이 신화 50전씩 의연금을 기성회에 납부하였다.[11] 진주에서도 기생 부용이 동료들과 함께 진주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昌原港國債報償婦人會, 안악군국채보상탈환회, 安城場基洞부인회모집소 등의 여성 단체가 조직되어 운동에 참여하였다.[12] 영흥군 김원극의 부인은 체발하여 1원을 의연하였다 한다.[13]

이렇듯 여성들은 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와 가락지 등을 의연품으로 내놓기도 하는 방식으로 운동에 참여하였다.

4.5. 언론사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빠른 시간에 전개될 수 있었던 것에는 언론활동에 역할이 컸다.[14] 당시 국내에서 발간되던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하여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은 1907년 2월 광문사에서 국채보상을 결의한 사실을 보도한 이래 이 운동의 확산에 진력하였다.

신문사내에 모금처를 설치하고 신문에서 그 참여를 촉구하였으며, 기성회 등의 취지서와 의연금납부자의 명단을 게재하는 등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전개 초기에 일부 언론은 그 성과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후 이 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 신문들은 기사나 논설 등을 통해서 국채보상운동의 의의와 당위성을 호소하면서, 날마다 의연자의 명단이나 납부금얄을 게재하여 온 국민들의 동참을 역셜했는데,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기사에서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마디가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임이 크다"고 까지 하는 것을 보아 당시 신문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4.5.1. 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지만, 국채보상운동을 중점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던 시기인 1907년에 일본제 담배 광고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담배를 끊어 의연금을 마련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의 핵심 운동 강령과 반대되는 행위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가 발간되었던 1904년 7월 18일부터 1910년 8월 28일까지의 시기 상황을 봐야한다. 해당 시기는 열강. 특히, 일본의 침탈과 함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던 시대였다. 그리고, 아직 대한제국에는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해, 광고할 수 있는 공산품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이에 일본을 비롯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상품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한글판 신보의 광고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것은 한글판 신보의 광고 부문은 국채보상운동과는 큰 관계없이 운영되었음을 말해주는데, 다시 말하면, 한글판 신보가 순수한 광고매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4.6. 기타

일본 유학생들과 미주와 노령의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 왔고, 일부 외국인들도 참여하였다. 1907년 3월 일본의 대한유학생회 총회에서는 금연하기로 약속하고 의연금 모금 운동을 벌였다. 특히 태극학회에서는 1907년 3월 9일 총회에서 단연하여 국채를 보상할 것을 결의하고 수금 위원 3인을 선정하였다. 이들은 4월 7일 수금한 18원 56전과 5월 수금한 29원 49전을 황성신문사에 보냈다. 미주의 공립협회에서도 3월 25일 국채보상의연회를 조직하고 보상금 수합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에는 로스앤젤러스에서도 공립신문에 취지서를 발표하였다.[15] 미주의 대동보국회에서는 173원 50전, 뉴욕의 한인 교포들도 212원을 대한매일신보사에 송금하였다.[16]

승려들의 참여도 많았다. 동대문 밖의 불암사 현암 스님은 불공미를 절약하여 1원을 의연하였으며, 종남산 미타사 여승 40명이 8원을 의액을 의연하기로 하였다.[17]

군인들의 의연금 납부도 이어졌다. 육군연성학교 교성대의 81명이 45원 52전 5리를 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들의 충의는 가히 世食國祿에 守錢奴者의 鑑戒가 되겟더라"라고 칭송하였다.[18] 시위대의 장교들도 단연하고 기부하였다.[19]

군인들의 의기도 눈에 띤다. 동대문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는 군인들이 삼선평에서 야외훈련을 했는데, 이전에는 휴식 중에 흡연하는 연기가 밥 짓는 연기와 같았는데,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흡연하는 병사가 없었다 한다.[20] 또 1907년 3월 21일에는 20세 된 병사가 농상공부의 건물 유리창을 부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농상공부 관리들이 기생 3, 4인과 창부 4, 5인을 불러 노는 것을 보고 지금 국채를 보상하는 일로 황제도 단연하고 아이들까지도 세뱃돈을 의연하는데, 이처럼 성대한 연회를 하느냐면서 유리창을 분쇄한 것이다.
재작일 농상공부에서 기생 3,4인과 창부 4,5인을 불러 노는데, 20세된 병정이 지금 국채를 보상할 시에 황제폐하쎄서도 단연하시고 아이들까지도 세배전을 연조하는데, 소위 관인은 한분도 의연하는 이가 없고 이처럼 성대한 연회를 하느냐면서 분하여 돌아갔는데, 조금 있다가 자갈돌이 비처럼 관의 유리창을 난타하여 분쇄하였다.
≪황성신문≫, 1907년 3월 23일, 兵詰慶祝.

5. 결론

국채보상운동은 암울한 상태의 한민족에게 국권회복이라는 목표의식을 분명히 해준 점에서 애국계몽운동의 대표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전국민은 국채상환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의연금을 자발적으로 냈다. 그리고 그러한 의연금 납부 행위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여겼다. 의연금을 납부하면서 국민들은 애국심을 고조시켜갔으며, 단일의 집합체로 결속되어 가면서 민족적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 나갔다. 국채보상운동은 남녀노소와 신분, 지역을 떠난 일반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특히 그동안 차별을 받았던 여성층이나 승려, 기생과 같은 이들이 적극 동참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이들은 민족을 구하는 일에 남녀와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대중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국가이념에 철저하였다 이들은 국토가 있어야 국민이 있고,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위기는 국민의 위기임을 자각하도록 하였으며,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 국가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대중들은 자신들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국가의식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동시에 민족공동체 의식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 운동이 전개된 1907년 2월부터 5월이라는 시기는 의병 항전이 정체되어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 형성된 민족의식과 민족역량은 1907년 8월 군대해산 직후 일어난 의병항전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이 운동은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인적,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연면히 그 정신이 계승되어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인의 문화전통이 되었다

6.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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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2015년 8월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약 2,500여종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것을 문화재청에 신청했고, 문화재청이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했다. ##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는 2017년에 열리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를 거쳐 결정될 예정이다.

2016년 1월에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과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세계기록유산 달빛 학술토론회가 개최되어, 기록물 등재에 대해 협력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정식 등재되었다. 제13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국채보상운동이 세계 열강에 맞서 주권을 회복하고자 가장 앞선 시기에 일어났던 국권수호운동이라는 점을 들어 등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7.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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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같이보기



[1] 이송희, 「한말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일 연구」, ≪이대사원≫ 15, 1978.[2]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4일, 宋乃反對.[3]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19일, 鶴錐有[4] ≪황성신문≫, 1907년 3월 8일, 酒姬出義. 『매천야록』, 제5권 광무 11년 정미 1월조.[5]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1일, 차부출의[6]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6일, 잡보.[7]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0일, 賣牛義捐.[8] 정교, 『대한계년사』, 권8, 윤희원년(국사편찬위원회, 『대한계년사』 하, 224쪽)[9] 이송희, 「한말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일 연구」, ≪이대사원≫ 15, 1978.[10]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9일, 부산향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취지서.[11]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5일, 平妓義捐.[12] 박용옥, 『국채보상운동에의 여성참여』, ≪사총≫ 12,13합집, 1968.[13] ≪황성신문≫, 1907년 3월 29일, 愛國剃髮.[14] 정진석, 「국채보상운동과 언론의 역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 1993.[15]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26일, 해외의연.[16]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2일, 잡보, 해외의[17] ≪황성신문≫, 1907년 3월 18일, 天敎愛國.[18]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6일, 軍人出義[19]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일, 시위대출의.[20] ≪황성신문≫, 1907년 3월 9일, 군대단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