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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5:01:46

어니스트 베델

파일:대통령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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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裵說|Ernest Thomas Bethell
파일:어니스트베델.pn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한국명 배설(裵說)
출생 1872년 11월 3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브리스톨
사망 1909년 5월 1일 (향년 36세)
대한제국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묘소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종교 개신교 (성공회)[1]
약력 대한제국 외무아문 자문관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3. 활동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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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가 술술 - 나라 빚을 갚자! 국채보상운동_#001 영국 청년이 지켜낸 '경천사지십층석탑' / YTN
대한제국일제 치하에서 활동한 영국 국적을 가진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데일리 코리안 뉴스》의 발행인. 한국식 이름은 배설(裵說).[2]

2. 생애

영국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브리스톨(Bristol) 출생으로 16살 때부터 일본 고베에서 거주하며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분쟁이 발생하여 사업을 접었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직에 지원하여 1904년 구한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러일전쟁 관련 취재를 위한 입국이었지만 일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3]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4]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5]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신문사에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까지 달아 저항하였으나[6] 일본 정부영국 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하여 제소까지 걸어[7] 결국 벌금금고형을 선고받는데 금고 기간이 끝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8]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1909년 5월 1일 한국에서 향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 요소 중 하나인 심근비대증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장지연이 비문을 썼지만 늘 베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일제는 이 비문마저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수난당한 묘비는 1964년 4월 4일 편집인 협회가 전국의 언론인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호머 헐버트와 함께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외국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언인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베델이 진심으로 한국을 위해 힘썼음을 잘 보여준다.
"나는 죽지만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하시오."
베델이 죽기 직전에 남긴 유언.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고종 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呼)"라며 애통해 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신문사는 유지되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경술국치 다음 날부터 유명세를 악용당해 '대한' 제호만 떼어낸 친일 신문 《매일신보》로 바뀌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신문으로 바뀌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 입구 쪽에 베델의 묘가 있으며, 1968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3. 활동

4. 기타



[1] 잉글랜드 국교회 소속.[2] 다만 영어 단어 Bethel이나 성씨인 Bethell은 /ˈbɛθəl/(베설·베슬)로 발음하므로 오히려 그가 사용했던 한국어식 이름인 배설이 관용 표기로 굳어진 베델에 비해 본래의 발음에 더 가깝다.[3] 한국의 침탈에 관한 기사를 썼지만 그가 몸 담고 있던 <런던 데일리 뉴스>는 친일 성향이 있어서 베델의 기사는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4] 영어 이름은 'Korean Daily News'였는데 본인이 종사하던 'London Daily News'의 영향이 보인다.[5] 발행인을 영국인인 자신의 이름으로 내세웠다. 당시 영국이 조선 내 자국민의 영사재판권을 갖고 있던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한국인이 아닌 동맹국의 영국인이 언론사를 지배하는 입장이므로 이를 함부로 건드리다가는 국제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해질 수 있는 점을 이용했다.[6] 이 간판을 달았을 시기는 을사조약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실어 일본의 간접적인 괴롭힘과 정보원들의 감시가 아주 심했을 때였다.[7] 영사 재판권의 혜택을 받으며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였고, 일본은 그를 두 번이나 재판에 회부하였다[8] 대한매일신보는 이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당시 편집인이었던 양기탁이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사망했을 때 대한매일신보 건물에서 태연하게 태극기를 걸고 대놓고 성대한 잔치를 여는 등 일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던 신문사이기에 어떻게든 잘라내고 싶어 안달이 났었던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9] 알렉산더 S. 해밀턴이 롯지의 마스터였다.[10] 그런데 여기의 내용에 따르면 메리 스크랜턴 여사의 아들이자 마찬가지로 선교사였던 윌리엄 스크랜턴도 프리메이슨이었다고 나오기에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드는 점이 없잖아 있다. 물론 실제로 스크랜턴이 1907년 6월 감리교를 떠났기에 1907년 겨울에 모임을 가졌다는 내용에 대해 시기상으로 맞기는 하다.[11] 국내명. 원제는 'KOREA'로 스웨덴에서 1912년에 출판되었다. 국내에서는 2005년 '책과함께'에서 번역출판하였다.[12] 신문박물관에서 상시 전시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해당 문서 참고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