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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86호 | |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원소재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충목왕 1년(1345)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소장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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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보 제86호로,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라고도 한다. 높이 13.5m로 한국에서는 드문 10층 짝수의 대리석으로 만든 불탑이다.[2]일반적으로 연상하는 한국적인 이미지의 불탑의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사실 고려 후기 친원파인 강융, 고용보 등이 원나라의 양식을 도입해서 만든 것이라서 그렇다. 탑 1층부에는, 원나라 황제 혜종, 기황후,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만수무강과 원나라의 만세불변을 기원하는 글이 있는데, 당시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까지 된 기황후와 그녀를 발탁한 고려 환관 고용보의 권세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서 흥미롭다.
기단부에는 서유기가 기반으로 하는 설화 속 장면들을 묘사한 부조도 새겨져 있다. # 특히 저팔계를 묘사한 시각 자료로는 이 석탑의 부조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
경천사는 예종, 인종, 의종, 공민왕이 직접 찾은 유서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훗날 조선 세조 때 만들어진 원각사지 10층 석탑에 영향을 주었다. 실물을 보면 재질이나 외관이 유사하다. 참고로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현재 탑골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10층 석탑이지만 구조적으로는 3층석탑과 7층석탑을 합친 형태로 구획되었다. 중국 문화권 불교에서 사찰의 탑은 양(陽)을 상징하는 홀수에 따라 층을 홀수로 맞춤이 원칙이다. 반대로 각은 음을 상징하는 짝수로 맞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있는 n각m층 석탑은 보통 n은 짝수, m은 홀수다. 월정사의 8각9층 석탑이 그 예시.
2. 역사
고려 충목왕 4년(1348년) 3월 개성 교외 지역[3]에 있는 경천사에 중대광 진녕부원군(重大匡 晉寧府院君)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院使) 고용봉(高龍鳳), 대화주(大化主) 성공(省空), 시주(施主) 법산인(法山人) 육이(六怡)가 후원하여 세워졌다.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하려고 왔다가 경천사지 석탑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황태자가 하사했다고 사기치고 대놓고 무단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7일자 논설을 통해 일본의 다나카를 거명하며 석탑 약탈을 폭로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 대변지 '재팬 메일' 이 해당 논설은 거짓이며 석탑 약탈을 부인하였다.
당시 헤이그 특사를 준비하던 호머 헐버트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3월 19일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천사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반출 현장을 촬영하고 해당 주민의 증언을 인터뷰하였다. 이후 '재팬 크로니클'이란 고베 신문에서 '한국에서의 만행'이라는 기고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도 반환하지 않자 헤이그로 가서 이 사건을 폭로해 뉴욕포스트 등 세계언론이 대서특필하는 등 석탑을 반환하도록 촉구했다. 이후 석탑은 1918년 다시 한국으로 반환된다. 조선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반발 여론이 들끓었다고 한다.
이같은 세계 여론 때문에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일본에 도착한 후 포장도 풀지 못한 채 십여 년 넘게 방치되었다.# 그 후 조선총독부에서 실태조사 후 반환요구를 하여 1918년 다시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왔다. 대한제국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온 셈.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반도가 지속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반환을 요구했다. 쉽게 말해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딱히 조선의 물건을 조선에 반환시켜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앞마당에 있는 장식물을 훔쳐갔다고 생각한 것.(...)
해방 이후에는 6.25 전쟁 등의 수난을 겪다가 1960년에 서울 경복궁 뜰에 전시시켜 놓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원래 자리(개풍군)에 가져다 놓거나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 상태가 유지됐다면 지금 우리가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눈으로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4]
이후 경복궁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산성비로 인해서 대리석재인 석탑의 보존문제가 심각해져서 결국 문화재청은 석탑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산성비로 부식된 석탑의 복원공사를 마친 후에 이전하여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로비에 서 있다. 관련 기사[5]
3. 기타
- KOF 97에서는 한국의 경복궁 스테이지에 이 탑이 보이는데 당시는 국립중앙박물관[6]이 세워지기 전이었기에 97년 당시 그곳에 전시되어 있어 해당 스테이지에 나왔다.
- KBS 1TV의 교양 프로그램 천상의 컬렉션 14회에 대표 문화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 더 콰이엇과 염따의 곡 Bentley 2 뮤비의 배경이다.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 한국 미의 재발견 - 탑: 개성 경천사지십층석탑 (1)
- 한국 미의 재발견 - 탑: 개성 경천사지십층석탑 (2)
- 네이버캐스트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경천사 십층석탑
- 미술대사전(용어편): 경천사지십층석탑
- 미술백과: 경천사 십층석탑
- 두산백과: 경천사 십층석탑
5. 국보 제86호
경천사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던 절로, 고려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 세워져 있었던 이 탑은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무단으로 반출되었던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3단으로 된 기단(基壇)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基壇)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조각이 가득 차 있는데, 부처, 보살, 풀꽃무늬 등이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4층부터는 각 몸돌마다 난간을 돌리고, 지붕돌은 옆에서 보아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을 표현해 놓는 등 목조건축을 연상케 하는 풍부한 조각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많이 출현했던 고려시대에서도 특수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훼손되었던 원래의 탑 형태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새로 개관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단으로 된 기단(基壇)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基壇)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조각이 가득 차 있는데, 부처, 보살, 풀꽃무늬 등이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4층부터는 각 몸돌마다 난간을 돌리고, 지붕돌은 옆에서 보아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을 표현해 놓는 등 목조건축을 연상케 하는 풍부한 조각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많이 출현했던 고려시대에서도 특수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훼손되었던 원래의 탑 형태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새로 개관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6. 같이보기
[원소재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2] 후솔하겠지만 이런 특이한 양식으로 지어진 이유는 건축 당시 원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3] 오늘날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화군 양사면을 마주 보고 있는 바로 그 동네로 사실 개성시에서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4] 원소재지가 북한에 있으면서 비슷한 신세였던 북관대첩비는 2005년에 남한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가기라도 했지 이 쪽은 분단으로 인해 원소재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한에 계속 남게 되었다.[5] 남북통일이 이루어져도 원래 자리가 있는 개풍군으로 옮겨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는데, 실외에 대리석재인 석탑을 세워두면 산성비나 새똥 등으로 훼손될 가능성이 크고, 원각사지 십층석탑처럼 유리로 둘러싸 보존하기에는 미관상 좋지 않기 때문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마저도 2030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로 옮길 계획이 있다.[6] 건물로 쓰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역할을 하고 있었다.